2017년 5월 10일 수요일

Clive Barker, Books of Blood vol. 3

피의 책 연작 3권을 다 읽었다.
과연 완독을 하고 보니 왜 국내 출간이 2권을 건너뛰었는지 알겠더라고.
나로서는 오히려 1권보다도 괜찮았어. 2권에서 느꼈던 실망감이 제법 가신듯.

지금까지 읽으면서 느낀 건데,
호러 소설은 참 희한한 장르일 수 있겠다 싶은 게
별의 별 것들에 인간성이 부여된다는 생각이 들어.
꽤 몽뚱그려서 말한 것이지만 소설의 세계관 안에서 지성이 부여된 존재들은
일종의 의인화인 셈이거든. 저건 인간이 아냐, 괴물이야! 라고 하지만
인간인 작가의 상상력 위에서 펼쳐진 것이라는 점에서 난 결국 그 또한 '인간'이라고 보고 싶어지거든.
그런 식으로 인간 아닌 것이 인간을 모방한다는 모티프가 정말 수도 없이 등장하는 것 같아.

더하여 냉소적인 세계관도 짚어볼 만 하겠네.
호러 소설에서는 인명이 경시되거든.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선 인명이 무엇보다 존엄한 것이니까
결국 호러 소설의 세계는 항상 기묘한 냉소를 품고 있는 거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가볍고, 파국을 맞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니까.

그러하므로, 호러 소설의 세계는 일종의 애니미즘적인 세계이기도 한 것일까?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굉장히 흐릿하고 거기서 한 걸음 나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마저 흐릿하거든.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인간이 될 수 있는,
의지... 특히 그 중에서도 악의와 그 악의로 인한 고통으로 만연한 세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하나만 더 짚자면,
이게 장르에 일반화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설이란 장르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거든.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이 사건들이 펼쳐지는,
또 그것을 묘사하는 리듬이 굉장히 빠른 것 같아.

예를 들면 주인공이 괴물과 맞닥뜨리고,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아마 공포?) 느끼고, 뒤돌고, 건물로 달려가고,
문을 잡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계단을 올라가고, 그러는 사이사이 뒤를 돌아보고, 또 그 사이사이 긴장을 느끼고,...
그러니까, 이게 단편집인 탓도 크겠지만,
전부 몽뚱그렸을 때 결국은 그닥 길지 않은 분량의 시간을 정말 세세하게 쪼개서 묘사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그걸 쪼개는 방식이나 묘사하는 사건사건의 리듬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80년대 공포영화스럽다고 느꼈어, 이 책은.
내가 1권을 읽으면서 읽는 속도가 잘 붙어서 놀랐다고 썼는데
아마 그래서 읽기가 수월했던 거겠지 싶어. 자극적인 사건이 빠른 리듬으로 서술되니까.

그리고 아마 이 책 뿐 아니더라도 이런 리듬의 서술을 하는 소설들은 많은 것 같아.
나는 가끔 어떤 소설을 읽다가 이건 소설이라기보다 차라리 영화를 서술하려고 한 글인가? 싶을 때가 있거든.
하다 못해 작가가 영화의 세례에서 무의식적으로나마 자유롭지 못했던 거겠지.


[Son of Celluloid]
도입부는 바베리오라는 범죄자가 경찰에 쫓기는 장면이야.
자신도 모르고 있었지만 뱃속에는 암세포가 제법 크게 자라고 있었고,
도주과정에서 오래된 극장의 뒷편으로 숨어들어갔다가 거기서 죽게 된 거지.
그의 목숨이 그 장소에 녹아 있던 수없이 많았던 환상들과 함께 녹아들어가더니...

그리곤 얼마쯤 뒤, 어느 운 나쁜 날,
심야에 극장에 남아 있던 관객 둘과 종업원 둘이 재수없는 밤을 보내게 되는 거지.
갑자기 화장실의 공간이 서부의 황량한 마을로 변하고, 웬 존 웨인이 나타나서 총을 겨누고,
전화기에서는 페터 로레가 대답을 하다가 돌연 그레타 가르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영화가 현실로 육박하는 거야.
(이것보다 조금은 더 복잡한 내용이지만, 뭐...)

주인공이 제법 살찐 여자라고 나오는데, 킬로로 환산하면 100kg가 넘는?
그런 부분에서 약간 의외성이 있는 설정이려나?

이 편에서는 '영화'가 괴물이야. 물론 인간성을 몸에 두르고 있지.
영화라는 매체는 탄생부터 사람들을 매혹시켰다는 점에서
그것이 의인화된 캐릭터는 꽤 흥미로울만한 구석이 있지. 환상의 집약체잖아?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아들'이 조금 덜 악의를 지닌 존재였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어.
순진무구한 '환상'이 자신의 본성(?)에 충실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생기는 전개가 더 일의관지하지 않나 했거든.
좀 추상적으로 말했는데 왜 그런 장면이 있어.
화장실이 서부극의 장소로 바뀌는 통에
거기서 일을 보던 등장인물을 '존 웨인'이 버릇이 없다며 쏴버리는 장면이 있거든.

여하간 결말부까지 하여 나름대로 매듭이 지어지는 모습은 좋았는데
오히려 조금 더 매력적일 수 있었던 발상이 전형적인 80년대식 장르물같은 느낌이 된 거는 같네.

[Rawhead Rex]
질Zeal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위치는 글쎄? 영국 어디쯤인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한 마을 청년이 물려받은, 놀고 있던 땅을 경작하겠다고 하다가 거기 봉인되어 있던 뭐... 괴물?을 그만 꺼내버리고
그 괴물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난리를 치고 다닌다는 내용이야. 물론 제목이 괴물의 이름이지.
난리를 치는 과정에서 교회로 쳐들어가서 verger가 뭐 '복사'라는데, 일종의 목사 도우미 같은 거래. 걔도 타락시키고,
아이들도 잡아먹고. 유아살해를 터부시한다는 영미권 문화라고 아는데 꽤 선정적이군! 싶더라고.

교회가 나왔기 때문에 이거는 뭐 종교적인 메세지가 약간은 있는 셈인듯 한데,
저 복사가 타락한 뒤에 내 주인님은 예수보다도 훨씬 전부터 계셨다 운운하기도 하고.
그런 식의 아류 사타니즘은 결국 기독교 거울상의 위악일 뿐이지 않나 싶어서... 뭐 하아품이고.

나는 이런류 괴물이 설치는 내용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
현대문명이 제공하는 어마어마한 살상능력의 무기들이 괴물들을 걸레로 만들지 않나 싶거든.
해결책은 둘 중 하나겠지, 괴물이 강하거나, 배경이 되는 곳이 낙후되었거나, 고립되었거나 중 하나든 둘이든.
이건 둘 다 아닌듯 한 전개라서 제법 신선하다 생각했는데,
그래서 결말이 좀 김이 빠지더라고. 뭐 저럴거면?; 싶어서.

[Confessions of a (Pornographer's) Shroud]
로니 글래스라는 착실한 회계사의 얘기야.
성실하게 잘 살던 인물이 돈좀 만져보려고 하다가 포르노 사업을 돌리는 일당하고 엮인 거지.
그 사실을 모르고 사업 관계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사업장에 들러서 온갖 도색잡지들을 보곤
충격먹고 대판 싸우고. 뭐... 악당(?)이 연줄이 있었는지 주인공을 오히려 포르노 왕으로 둔갑시켜서
언론에 흘린 거야. 인생 망한거지. 처자식도 다 집을 나가버리고.
그래서 주인공이 복수를 하려고 두 명을 죽인 뒤 결국 암흑가에서 처형당하는데,
이 복수를 향항 원념이... 안치소에 누운 그의 시체를 덮은 천에 빙의하고, 복수를 이어 나간다는... 뭐 그런 내용.

나는 자꾸 영화 <할로우 맨>이 생각났는데,
천쪼가리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돌아다는다는 점 때문이겠지.
그다지 트위스트는 없는 전개야. 복수도 잘 마치고. 그런 의미에서는 절정의 만족을 주나?

재미있었던 건 주인공이 도색잡지들을 보고 충격에 빠지는 장면이었어.
그까짓 거 2017년을 사는 우리에게는 조금 더러운 디씨 갤러리만 가도 뭐...
이제와서는 정말 일상적인 영역이거든. 아마 좀 특별한 사람들에게는 80년대에도 각별하지는 않았겠지.
당장 마지막 단편은 남창 이야기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이야기 속에서의 관념적 인간이라도
포르노를 보고 충격먹어서 자기 인생을 뒤집어놓을 선택을 한다는 게
착실한 인간상으로 그려지는 걸 보면 꽤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되기는 하지.
80년대 보통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보게 되는 느낌? 생각해 보면 30년도 전 얘기거든.

[Scape-Goats]
남녀 두 쌍이 요트를 타고 유람하다가 재수없이 한 섬에 부딪쳐서 상륙하게 돼.
지도에도 없던 섬이 갑자기 항로에 나타나서는 뱃머리를 때린 거지.
이들은 꽤 황량한 섬을 이리 저리 둘러 보다가 울타리에 갇힌 양 세 마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풀도 안 자라는 이 섬에 웬 양이? 왜?

왜 김 나는 밥이 올려져 있었다는 이어도 전설같은 게 생각나서
연관된 것이 하등 없는데도 나는 괜히 오싹한 내용을 기대했었는데
그렇게까지 오싹한 단편은 아니었어.

그래도 기본적인 설정이 꽤 매력적이기는 했지.
스포일러인지는 몰라도 저 섬은 결국 뭐였냐면
해류가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이라서 1차, 2차대전을 포함해서 엄청 긴 시간의 온갖 곳에서 흘러온 시체들이
한 곳으로 모여 이루어진 섬이었던 거거든. 저 양들은 영혼들을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었던 거고.

결말이 좀 재미있었는데 주인공은 죽고 난 뒤인데도 서술은 계속 이어지더라고.
죽음이 끝이 아닌 세계를 그린다는 게 얼마나 희한해?

[Human Remains]
주인공 개빈은 제법 잘 생겨서 그걸로 빌어먹고 사는 남창이야.
어느 날 고객에게 서비스를 주러 그의 집에 따라갔다가, 기묘한 걸 보게 되지.
욕조 속에 담긴, 인간의 형상을 한 이상한 물체?
그 날 뒤로 자기는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면서 해코지를 당하고, 등등...

꽤 뻔하지만, 이건 도플갱어의 이야기야.
인간을 흉내내는 괴물이 등장하고,
사실 원래는 먹잇감이 되었어야 할 주인공은 미모 때문에 다음 모방 대상으로 선택되었던 거지.

이 단편도 결말부가 꽤 재미있는데,
인간 아닌 것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는...
그런 대비를 잠깐 그리거든.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어.
물론... 사실은 그런 모습들도 전부 인간이겠지만.


여하간, 드디어... 이 책을 완독했네...
거진 10년은 전에 사서 이사다닐때마다 언젠간 읽을거라며 챙겼던 책을 드디어...
체증이 내려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20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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