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구의 대표작인 관촌수필이야.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영화감독 박찬욱 여러 인터뷰에서 자주 추천했던 책이어서야.
아마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관촌수필을 그야말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면서 자기가 너무 아끼는 책이라고 얘기를 하더라고.
특히 공산토월을 읽으면서는 자기도 어찌나 울었는지 모르겠다면서.
나는 박찬욱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이름을 날린다는 예술가를
그렇게 울렸다는 소설이라니 관심이 갈법도 한 거잖아?
호기롭게 구입한 책이건만 읽기에 녹록한 것은 아니었어.
이문구는 소설어 사전이 나왔을만큼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는 소설가이다 보니
이게 '소설 읽듯이' 후루룩 읽히지가 않는 거라. 아무렴 옛 소설을 읽다 보면
까끌까끌 해석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문장들과 마주치곤 한다지만
아 이거는 정말 심하더라고. 정말 읽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던 거야.
하여 한 번은 읽어내야겠다 하는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방식이었지. 이짓을 책 전체에 했는데
하면서도 이거 참 무식한 짓이다 속으로 몇번은 되뇌였는데, 어찌나 귀찮고 품이 들던지 원;
여하간 이런식으로 부득부득 풀이해가며 읽었던 소설이건만
이렇게 읽어내려니 맛이 맛이 아닌 거라.
그랬던 게 몇 년 전 일인데 요번에 문득 눈에 띄길래 이거 이번에는
조금이나마 편하게 읽겠구나, 하는 마음과 그러니만큼 좀 더 음미를 하면서 읽겠구나,
어휘에 치이지 않고... 하는 기대가 있었지.
이 책은 작가인 이문구가 72-77년 동안 발표한 단편 여덟개를 묶은 소설집이야.
배경은 작가의 고향이라는 충남 대천의 관촌 마을이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 '나'가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야.
내가 이문구 씨의 전기에 대한 정보는 사실상 전혀 없으니 이 연작이 자전적일 것이라
기대할 따름이지만, 아마도 허구 또한 조금씩은 섞여 있을 테지.
그렇다고 허구의 비율이 어느 정도일까? 라고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로서 형상화한 관촌이란 공간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거야.
이 소설은 70년대를 사는 작가가 자기 고향을 다시 찾으면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나,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 어떤 사건들 등을 회상하는 형식이야.
(뒤의 세 편인 관산추정, 여요주서, 월곡후야는 '현재'의 이야기지만)
작가는 그런 그리운 장소와 시간을 떠올리며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아갔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해.
그러면서 이 관촌이라는 향토적 공간이 일종의 아련한 이상향으로 그려진다는 느낌도 살짝 받을법 한데
책의 말미에 권성우의 해설에서도 이 주제를 루카치가 말한 그리스 문화의 충만함과 연결시켜보려 시도해.
그러나 글쎄... 내 생각에는 이 부분은 따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락서산 - 관촌수필 1
말미의 작가의 말에 따르면 연작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기소개가 맞겠다고 생각했다네.
신정을 맞아 할아버지의 성묘를 하러 고향으로 내려온 작가가 풍경을 보며 떠오르는 소회를 서술하고 있어.
도입부터 양놈들 신년을 쇠는 일이 다 뭐냐고 역정을 내던 분이었건만, 신정을 타서 성묘를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묻어나고 있지.
더하여 작가는 선조인 이지함이 꽂아놓은 지팡이에서 잎이 돋아나 큰 소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다는
동네의 명물 왕소나무가 베어져 사라진 걸 보고 그야말로 '타락한 동네'라고 읊조리기도 해.
41년생인 이문구는 토정 이지함의 후예인 모양이야. 그래서 지체높은 양반가라는 의식을 가진 할아버지에게
어릴때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아서 주변의 상놈들을 하대해도 으레 그런 줄 알면서 사는 소년이었다고도 하네.
연작에 실린 단편들 모두 사실 그다지 서사라 할만한 게 없다시피 해.
굳이 말하면 서사보다는 묘사 위주의 소설이라 해야될 것 같네. 이런 풍경, 저런 인물, 자그마한 사건 등등...
소설을 읽어보면 뭔가 이상한 것이 이건 자신의 유년기를 서술하는 소설인데
아버지의 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거든. 찾아봤더니 이문구의 아버지는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한국전쟁기에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고 나오더라고.
거기다 이 소설에는 형제자매의 이야기도 하나 나오지 않는데 두 형이 또한 아버지처럼 처형당했다고 하네.
비단 작가의 아버지 이야기 뿐 아니더라도 이 소설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한국전쟁이 가져온 슬픈 사연들이 많이 등장해.
여하튼 이 편에서 아버지의 이야기가 잠깐 나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조하는 것이 이 단편의 주요한 점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작가는 여기서 가정에 무심했던 아버지의 모습이라던가,
당시에는 '위험 분자'로 찍힌 인물들은 예비 검속이라며 그냥 감옥에 가두기도 했던 모양이지?
그런 옥고를 견디고도 의연했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오히려 거리감을 느꼈다던가,
작가 본인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아버지와의 자그마한 사건이라던지 등등을 근거로
아버지에게 크나큰 거리감을 느꼈다고 토로하고 있어.
그리고 그런 만큼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경외심이 컸다는 고백을 하고 있기도 한데
실제로 바로 첫 페이지에 "내가 그리워해온 선대인은... 그분 한 분만이 진실로 육친이요..."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거든.
부친의 좌익 활동을 연좌제 삼으려는 사람들이 과연 대단했으리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일락서산은 할아버지의 대한 존경심을 담은 단편만은 아니리라고 짐작해봄직도 하겠지.
나는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의, 전통의 편에 섭니다. 라는 고백 아닌 고백이라고 읽을 수도 있을 거야.
여기서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내가 읽은 책의 54쪽에 보면 작가는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전통적 의식이 의미마저 무가치하게 여겨진다고 말하는 부분이야.
전통에 무의미함을 느끼지만, 그런 의식의 화신이었던 할아버지에게는 경애를 느낀다는 말은
단순히 보면 그저 사람의 정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묘한 느낌을 주는 데가 있지.
화무십일 - 관촌수필 2
여기서는 윤 영감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어.
동란 틈에 피난왔던 윤 영감의 가족에게 들이닥친 비극을 관찰한 작가가
그를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는 이야기야.
여기서 윤 영감의 아들인 윤학로는 징집을 피해다닌 청년이거든.
그에게 크나큰 불행이 닥쳤다는 건 과연 작가가 경험하고 관찰한 바를 서술하기만 함일까?
행운유수 - 관촌수필 3
여기서는 작가 집에서 안머슴 노릇을 하던 옹점이라는 여성을 주로 다뤄.
옹점이는 화자인 나에게 말하자면 나이 차 조금 나는 누나 같은 인물이야.
인정넘치고, 남을 항상 보살펴주고, 챙겨주고, 티격태격 할 때도 있지만 져 주기도 하고...
내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 어디서 났는지 카라멜을 가져다가 입에 넣어 주기도 하고.
중간에 작가는 회고조의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에 갑자기 현재로 돌아와서는
근래에 유행하는 주체성이니 주체 의식이니 하는 말이 자기는 참 마뜩잖다고 하거든.
이 또한 '외래종'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나쁘지는 않겠지.
오히려 이런 속 빈 강정같은 말잔치보다는 본인의 행동으로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작가는 옹점이가 본인의 인생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주체적인 인물이라고 공언하기도 해.
그런 옹점이도 다른 집에 시집을 갔다가 동란 중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게 돼서
남편 잡아먹은 년이란 소리에 구박만 받다 결국 약팔이 일행에 떠돌이 신세가 됐다는 내용으로 끝이 나는데,
본인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남긴 소중한 사람마저 그런 식으로 잃어야 했다는
당대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는 셈이기도 하지, 이런 내용은.
관심이 반짝 갔던 내용이 있는데,
옹점이가 시집살이하던 집에서 고추가루와 마늘을 넉넉히 써서 김치를 담갔다며 구박을 맞는 내용이 있거든.
한국인이 세계 기준으로도 고추와 마늘을 그렇게 먹는다고 하더니
당장 5,60년 전에는 이런 사정들이 있었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고추나 마늘을 많이 쓰는 식문화는 그런 식재료가 풍족해지고 난 뒤에
'우리 집도 부잣집처럼 이렇게 해 먹는다'는 일종의 과시적인 형태가 굳어지게 된 건 혹시 아닐까?
여하튼, 이 인물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렇게 순박하고 속없지만 남을 위하는 인물상이 소설에 많이 등장해.
그건 이제는 없는 시골의 따뜻한 사람들을 형상화하는 것이기도 하겠고
작가가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읽으며 마음이 푸근해지기도 하네.
녹수청산 - 관촌수필 4
작가가 따르던 동네 청년 대복이의 이야기를 여기서는 하고 있어.
이야기가 반분되는데, 초반부는 대복이나 그 어머니와 함께 부대끼며 지냈던 작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특히 대복이와 이곳저곳 쏘다니며 짐승들 잡으며 놀고 장난치며 놀았던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동네 망나니 취급을 받던 대복이가 기어이 삐뚤어져서 안하무인에 도둑질까지 일삼으면서 다니다가
결국 잡혀들어가기까지 하는 이야기야.
그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내용은 참봉집 규수였다는 순심의 이야기인데,
군산까지 유학을 했던 지모겸비의 아가씨였으나 이 처자가 도시 물을 먹더니
고향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좌익 활동을 하게 된 거였어. 그러다 어느 날 대복이가
강간 미수 혐의로 잡혀 들어갔다 나온 거야.
국군에게 마을이 수복된 이후 대복이가 빨갱이 척살을 외치고 돌아다니니 참봉집이 벌벌 떠는 거지.
그런데 대복이가 대뜸 참봉집에 머슴살이를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게 되고...
대한민국의 형성 자체가, 그리고 한국전쟁의 경험이
남한 땅에서 좌익 비슷이라도 했던 건 그야말로 일소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여기서도 좌익 활동을 했던 인물에게 커다란 비극이 찾아오고야 말았지?
심지어 결말부를 보면 마치... '범죄자가 도망쳐서는 안 된다'던 범죄영화 장르의 검열 클리셰까지 조금 떠오르고.
이건 자연스러운 사실의 서술이기도 하겠지, 역사가 그랬을 테니. 그러나...
공산토월 - 관촌수필 5
이 단편은 박찬욱이 읽고 이렇게 펑펑 울었다는 편이야.
아... 나도 이걸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뿐은 아니겠지만
연작 중 최고작이라고 여기게 되네. 여기서 소개하는 인물의 됨됨이와, 그의 마지막이 워낙 가슴 절절하게 느껴져서...
단편이 조금 희한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초반에는 웬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
영화 [대부]에 관련하여 이런 폭력적 영화를 개봉해도 괜찮은가 하는 찬반이 있었나봐.
작가에게 찬성 편에 서서 글을 한 편 써달라는 청탁이 오는데 그 근거가 냉혹한 면이 있다는 평가가 있어서라나?
거기에 기막혀 하면서도 과연 내가 그런 면이 없다고만 할 수 있겠나... 하며 회상으로 들어가는 글의 구성이지.
주인공은 신현석, 본인이 돌을 좋아했기도 하지만 천생 돌처럼 우직했던 사람이라 석공石公으로 불렸다는 사람의 이야기야.
이 인물의 소개를 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형태의 혼례식을 묘사하고 있기도 해.
작가에게는 그곳에서 본인의 아버지가 신명나게 노시는 모습을 보고서 감명을 받았던 기억도 있는 듯한데
그런 풍경이 작가뿐 아니고 마을의 모두에게도 충격적이고 의심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인 광경이었던 모양이야.
그 이후로 석공은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외경이 더욱 깊어져서 그렇게 위할 수가 없었다는 식인데
작가 부친의 옥바라지에 정성이었고 그를 빌미로 같이 잡혀 본인도 옥살이에 고문까지 겪었다는 내용이 나오네.
그러다 전쟁기에 인공 치하의 짧은 시기에 석공이 잠시 면청 서기로 발탁되는 일이 생기고
국군의 수복 이후 그 때문에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됐다는 내용이 이어져.
그 이후로 고문과 형무소 생활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몸이 망가졌음에도
그야말로 형무소에서 못한 일 다 하겠다는 듯이 묵묵한 소처럼 내남없이 마을 대소사에 열심이었다고 하네.
그러다 채 40도 채우지 못한 어느 해에 그가 갑자기 쓰러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며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작가는 가족처럼 가까운 이의 일이니 밤낮없이 그를 보살피는 거지.
백혈병으로 투병하는 석공의 마지막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는데,
나는 살아야만 한다고, 논답 다 팔아서라도 살려달라며 부르짖다가도 퍼뜩 자식들 생각에
자기가 죽고 만다며 번갈아 체념하는 모습을 보면 한번씩 울컥울컥 치밀어오르는데,
심지어 이대로 죽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런 자기희생적 인물은 문학을 읽으며 자주 볼 수 있지.
문학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기에 오히려 이런 인물형은 진부할 때가 있어.
좋은 것은 반복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진부해지는 것이 아닐까?
현실에서 보기 힘든 인물형이기에 오히려 관념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석공의 저 삶을 향한 절규가 굉장히 와닿더라고.
그저 소같이 묵묵한 인물형을 그리고 말았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이긴 했겠지,
그러나 저 절규 때문에 이 인물은 현실감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고,
'나'가 있는 인물이 너나없는 희생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더욱 큰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거지.
개인적으로 관촌수필을 읽으면서 아주 입맛에 맞는 글이라고는 차마 못 느끼겠음에도
공산토월의 후반부는 읽을때마다 가슴이 저릿, 하네.
관산추정 - 관촌수필 6
이 편부터는 관촌과 작가의 현재를 그리는 내용이 나와.
엄밀히 따지면 공산토월부터 작가의 현재의 삶을 그리는 것이긴 하겠지만
이 이야기부터는 현재의 이야기가 도입이나 액자의 테로서보다는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것 같아.
여기서는 작가의 또래 친구였던 대복이와 대복 아버지인 유천만을 주로 그리고 있어.
대복 아버지가 일이라고는 전혀 손에 잡지 않는 한량이지만, 여기서기 쏘다니며
마을의 자질구레한 일은 도맡는 인물이었다는 내용이 나와.
특히 마을에서 여우 우는 소리가 들리면 재수가 없다며 장정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와서 쫓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서 앞장서는 인물이었다고 하네.
재미있었던 장면은 284쪽에 작가가 쇳도막이나 양철조각을 훔치곤 했다는 대목이야.
양반집 자제로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하던 할아버지라던가,
미군이 던져주는 음식따위 절대 먹지 말라고 하던 옹점이의 역정을
기껍게 받아들였다고 서술하던 작가 이문구의 모습이건만
여기서는 여느 마을 개구장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문득 나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인데
무심코 이런 서술을 했던 거라면 작가가 직조한 그의 어릴 적 삶은 어떤 잣대에 맞춰서
재구성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따라서 슬그머니 드는 거지.
이 한 줄에서 그만 아차, 하고 본심이 나왔던 건 아닐까 하게 되는 거야 ㅋㅋㅋ
그런가 하면 이런 장면도 있어. 눈병이 났던 작가를 보고 작가의 할아버지는
살 없는 방향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집에 못을 박은 일이 있으니 아이의 눈이 상했다고 하거나
팥을 쥐고 주문을 외면서 눈을 비벼주기도 하는데
이어 작가는 복산이네 가서 그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짧은 동물 뼈를 매달아줬다고도 해.
작가가 그리는 관촌은 이런 주술이 통하던 세계인 거야.
또한 작가가 붓글씨를 대단히 귀찮아 했다는 서술이 나오기도 하는데
당장 일락서산에서는 아버지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고는 홀로 열심히 붓글씨 연습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거든.
이건 모순적이라고까지는 못하지. 싫지만 열심히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작가가 연작의 초반부 단편들에서 말한 내용과 조금 부딪친다는 느낌을 받는
서술들이 이 단편에서 엿보이게 되니 어떤 일이었을까? 갸웃 하게 되기는 하지.
단편의 마무리는 현재로 돌아와 장성하여 처자식까지 둔 복산과 만나 그의 집에서 하루 묵는 이야기로 맺어져.
나들이객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이야기나,
반가웠던 도깨비불들이 사실 낚시꾼들이 켜놓은 불이었다는 이야기,
관광객이 들판에 버리고 간 콘돔을 먹고 속이 꼬여 돼지들이 죽어버렸다는 이야기,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나버려서 잠복 형사가 근무하는 데 복산이가 라면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러 가야 한다는 이야기 등
관촌의 옛날과 지금의 대비를 선명하게 그리고 있어.
여요주서 - 관촌수필 7
이 단편도 작가의 고향 친우 신용모가 겪은 조금 안타까운 사연을 그린 이야기인데
동네 아이가 꿩을 잡아다 팔려고 하길래 본인이 나서서 좀 흥정이라도 잘 해 주려다가
보호동물을 팔려 했다며 연행돼서 결국 재판정에까지 서게 된 그의 사정을 작가가 관찰한 거야.
여기서는 아예 '옛날'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지.
꿩 따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았던 옛날과는 달리 삭막해진 지금의 인정을 그리려던 걸까?
월곡후야 - 관촌수필 8
김희찬이라는 친우가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그 아들 수찬이가 조금 수상쩍인 일을 벌이는 듯 하여 작가가 함께 지켜보는 게 주요한 골자야.
열네살 먹은 순이라는 아이가 사나운 개한테 놀라 자빠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 통에 낙태를 하게 돼서 마을 사람들이 대경실색한 거지.
범인이 누구냐 하던 끝에 결국 두 해 전에 귀농했다던 김선영이란 인물이었던 거고
그가 나름 수를 써서 당국의 처벌을 피하는 눈치가 되다 보니 마을 청년들이 그를 잡아와서
린치를 하려고 했던 거야.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렇게 잡아온 김선영을 가운데 두고 청년들이 놓는 으름장인데
그 중에 국민교육헌장도 모르니까 그런 못된 짓을 했다는 말이 있거든.
혹은 우리가 지역 사회 발전과 근대화를 위해서 발벗고 나섰다고 말하는 대목이라던가.
박정희 시대는 혹시 당시를 살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시해주고,
그걸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의식을 함양해 줬던 시대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이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
이 장면에서 몽둥이를 들고선 코 큰 척 하는 청년들이 바로 지금
50,60대들인 셈이고 그들의 소위 '꼰대질'이나 좀 더 심하면 '박사모'짓들이 저런 경험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으니까.
그런 일면을 엿보게 하는 장면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자부심일 수 있었겠구나,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가 상명하달식이기는 했으되 민중의 차원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기도 했구나, 하는.
이로써 관촌수필 독서 후기는 대강 마무리인데,
마지막에 하고 싶어서 남겨 놓은 이야기가 하나 있지.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서는 여러 대비가 나오거든.
이는 전통과 근대, 시골과 도시 정도의 대비로 추려보면 되겠지.
그 중에서도 작가는 푸근한 정이 남아 있던 시골과, 그곳에서 지켜지던 전통을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것 같아.
하여 이 소설에서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야.
당장 내가 읽은 책 말미의 해설들이 그렇고 이 책을 추천한 박찬욱도 한국의 전통적 공동체상을 그렸다는 식으로 말했지.
그런 방식의 작법과 독법은 사실 이 텍스트가 작가의 직조물이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거든.
너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쓴 것이지? 라는 질문을 던지니 그런 대답이 나오는 거야.
그런데 동시에 이 소설은 작가가 자신의 유년기를 회상하며 쓴 자전적 기록이기도 해. 제목의 '수필'은 거기서 연유하겠지.
이 텍스트는 적어도 이중의 지위를 가진 바, 한쪽 면만 보는 독법이 온당할까? 싶어지기도 하는 거지.
만일 이 소설이 개인적인 체험의 기록일 따름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
작가가 그리워하는 인물들과 풍경들이 사실은 이 책을 읽고 있던 나에게는 그렇게 푸근한 것만은 사실 아니거든.
조명도 어두컴컴하고 땟국물이 질대로 진 부엌의 풍경이나
쉰 막걸리에 똑같이 쉬어 빠진 열무김치나 우적우적 씹는 술자리의 모습,
갯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즐겁다고 깔깔대는 아이들이 모습,
아마 할아버지를 찾아온 나이든 사람들 군내를 견디기 힘들었다던 작가의 어머니의 한마디도 있지만
얼마나 쉰내 풀풀나는 사람들이었겠어?
거기에 이름도 모르는, 이미자보다도 더 윗세대의 가수들이 불렀다던 창이라던가 등등.
단적으로 말하면 내겐 불편하고, 더럽고, 심지어 흉한 것들이지.
내게 그리운 풍경은 오히려 80,90년대의 풍경들이야.
치토스 먹으면 따조 나오고 그런 거 있잖아. 문방구에서 꾀돌이 사먹고.
읽다보면 심지어 작중에도 드럼통이니 전봇대니 전깃줄이니 철로니가 등장해.
사실 이문구가 그려낸 관촌의 풍경은 의외로 이미 근대문물이 침입해있는 공간이야.
오히려 40년대에는 너무도 당연해 그릴 수 없었던 풍경들이 문득 30년 가량의 시간이 지나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그려진 풍경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지는 거지, 나는.
요컨대 이건 70년대를 살던 작가가 문득 사무치게 그려낸 응답하라 1940같은 거야.
40년대라고 특정해버리니 뭔가 묘해지지? 전통적 이상향을 그리기에는 그렇게 옛날도 아니라는 느낌이잖아?
아마 그 30년 정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립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그러니 오히려 작가가 비판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들조차 오히려 내게는 낡은 것으로 다가올 때,
또한 예를 들어 8,90년대에는 작가가 그린 '현재'가 누군가에겐 추억으로 회상하는 '과거'가 되어
그것을 누군가가 또한 윤색해서 그리기도 했다면, 결국 내가 읽는 건 작가의 '그리워한다'는 행위와 그 정서인 거지.
소설을 논하면서 가장 중요한 점을 아직도 이야기하지 않았지.
이 소설의 문체는 다채로운 어휘의 구사로 요약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위에서 내 입맛에 썩 맞지 않는다고 했던 것도 이것이 큰 연관이 있어.
어찌나 읽으면서 심상에 브레이크가 걸리는지; 외국어 원서를 읽는 기분이 다 드니까.
나는 그런 생각도 들었어. 이 까끌거리는 문체야말로 소설이 그리고자 하는 전통에의 동경을 곧바로 체화한 것들이거든.
이를 못내 편하게 읽을 수 없음이 곧바로 그 전통적 풍경이 와닿지 않는 나의 모습과 연결된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러니 온전히 개인적인 텍스트라고만 하면 내게는 사실 전혀 감동적일 게 없는 소설인 셈이야.
암만 전통이니 농촌이니 해봐야 무슨 소용이람? 내게 와닿지 않는걸.
그러니 이 텍스트를 그저 작가 개인의 체험을 그린 것이라고만 봐서는 안 될거야.
이 개인적이고도 개인적인 내용들을 우리는 왜 읽을까? 거기서 어떤 보편성을 끄집어내려는 생각이 있어서 아니겠어?
그렇다면 거기서 어떤 의도를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든.
바로 위에서 적었지만 소설을 나는 하나의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은
나는 맛도 모르는 가재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가재를 잡느라 친우들과 뛰놀던 기억을 회상하며 마음 한켠이 저리는 경험이거든.
이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거야.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소설이 이렇게 자전적 기록과 허구적 구성물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었어.
지나간 것 그리워지기 마련일 따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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