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은 네개의 에세이가 실려 있고, 심슨 가족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도출해볼 수 있는
주제의식이나 텍스트의 구성 방식을 분석하는 식의 글들이라고 정리하면 될 것 같아.
6. The Simpsons and Allusion 심슨 가족과 인용법
여기서 allusion은 우리가 익히 아는 '암시'보다는 일종의 문학기법을 말하는 것 같아서
인용법이나 인유引喩라는 말을 쓰는 게 맞는 것 같아.
번역어라는 게 얼마나 귀찮아 이럴 때 보면? 원어는 같은데 맥락에 따라 단어가 달라지니...
작가는 William Irwin과 J. R. Lombardo야.
전자는 이미 위에서 이 책의 편집자로 설명을 했고,
후자는 찾아보니 딱히 나오는 내용이 없네. 책에는 뉴욕의 시티 대학에서 재직중이라고 되어있음.
저자들은 일단 인용법이란 무엇인지 정의하려고 해.
인용법은 패러디, 오마주, 풍자나 조롱 등의 목적을 위해 쓰일 수 있는 방법인데,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요소를 가져다가 단순하게 붙여넣는 일은 인용법이라고 할 수 없어.
저자들이 예시로 든 건 "Lisa The Simpson"에피소드에서 심슨가의 친척 중 한명이
"나는 잘 못 나가는 새우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라고 했던 대사야.
이건 <포레스트 검프>를 인용하는 것인데 백치인 포레스트 검프조차 성공적으로 운영했던
새우 회사조차 실패하고 있는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얼마나 심슨 유전자가 열등한지를 말해준다는 거지.
또한 인용법은 반드시 인용하는 주체가 그것을 의도했다는 티가 나야만 하는데
(그래야 그 인용이 기발하다면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셈이겠지...)
그런 경우의 특수한 예로 시대착오적인 인용 읽기가 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해.
"Realty Bites" 에피소드에서 마지가 공인중개사로 활동하는 내용은
<아메리칸 뷰티>를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 저 에피소드가 시간상 먼저 나왔으므로
그건 인용법의 잘못된 도출이 되는 셈이지.
이런 인용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장면을 보고 단순한 정보만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화면의 요소들을 해석하는 과정을 겪게 만들어.
이런 과정들은 더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재미있기까지 한 거지.
무엇보다도 작가들과 관객 사이의 미묘한 연대감이 형성된다는 게 중요해.
아, 저거 그 영화에서 따온 대사 아니야? 라고 관객이 느끼는 순간 제작진이 윙크를 깜빡, 한 셈이지.
다만 지적해야 할 것은 인용은 반대로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누군가를 배제한다는 사실이야.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가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나 심슨 가족이 훌륭한 점은 그런 상황에서도
인용이 그 이해를 강요하는 형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원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즐겁게 시청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저자들은 설명해.
이런 인용의 전거는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 문학, 음악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아.
심지어 심슨 가족의 세계에서 이전 에피소드들을 인용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저자들은 인용된 작품들을 두 페이지에 걸쳐서 열거하는데 음...
이건 개인적으로는 좀 지리멸렬했다는 생각이 드네. 정말 나열에 불과한 글뭉치를 게재해 놨거든.
심슨위키만 가도 훨씬 자세하고 유의미한 형태로 올라와 있을 정보들이 단순히
인용된 영화들 : 보디가드, 케이프 피어, 불의 전차, 시민 케인,.... 이런 식으로 몇십개가 나열되어 있으니 무슨;
아무리 이 때는 위키같은게 없었다지만 이건 무성의인지 오히려 쓸데없는 과성의인지 참.
나는 저자인 윌리엄 어윈을 그래도 시리즈의 책임자 역할 비슷한 걸로 알고 있어서
이 에세이가 제법 흥미로운 내용을 풀어낼 줄 알았어.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갤주 완장 찬 애가 글을 쓰면 좀 더 주목을 받기 마련인 것 아니겠어?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별로인 글이라는 인상을 받았네.
7. Popular Parody: The Simpsons Meets the Crime Film 대중 문화의 패러디 - 심슨 가족이 범죄 영화를 만나다
원래는 부제격인 제목은 굳이 안적었는데 이 에세이는 부재가 더 유의미해 보여서 별 수가 없네 ㅋㅋ;
저자는 Deborah Knight란 사람인데, 캐나다 킹스턴에 있는 퀸스 대학 철학과에서 조교수직을 맡고 있는듯 하네.
이 에세이는 "Bart the Murderer" 에피소드에서 어떻게 범죄 장르 영화들의 공식과 관습,
장르의 유명한 작품들이 패러디되지를 분석해서 심슨 가족이 패러디라는 방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려고 해.
저자는 토마스 J. 로버츠의 [3류 소설의 미학An Aesthetics of Junk Fiction]이라는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대중 소설은 시간의 물결 속에서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하는 당대적 요소들을 끊임없이 참조하고 인용한다는
점을 환기시켜. 간단한 예로 호머 심슨은 자기 아이들이 Happy Days의 폰지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저자는 외재적 참조extrinsic references와 내재적 참조intrinsic references를 구분해 보자고 제안해.
전자는 아푸가 인도 영화 '탑 400'을 소개하는 장면이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를 참조하는 Jackie-O시리얼처럼
에피소드의 서사와는 큰 관련 없이 그 외부에 참조점이 존재하는 인용들을 일컬음이고,
후자는 "Bart the Murderer"에서처럼 범죄 영화 장르의 문법이 에피소드 내부의 서사와 맞물려 있는 형태를 의미해.
저자는 범죄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가족Family(장르적으론 뭐 조직 정도겠지?)이라고 제시하면서,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는 인물의 흥망성쇠의 흐름이 기본적인 서사의 뼈대가 된다고 설명해.
아 너무 지리멸렬한 내용이라 더 정리하기가 너무 귀찮다.
뭔 외재적이니 내재적이니... 이딴 구분을 고안해내는 게 어떤 식으로 의미가 있는지 솔직히 난 모르겠어.
문득 그런 생각은 들지. 철학이란 게 개념을 창안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이라면
이런 식으로 텍스트 분석을 해보려는 노력을 내가 단순하게 기각해선 안 될지도 모르지.
롤랑 바르트가 희한한 개념들을 가지고 [사라진느]을 분석하면 그건 고전이 되고 이 글은 쓸모없는 글이 되는건가?
그건 아닐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치만...;
이어서 린다 허친슨이란 사람의 [패러디의 이론 A Theory of Parody: The Teachings of Twentieth-Century Artforms]같은
책을 인용하면서 패러디란 무엇이고, 그게 저자 생각에는 뭐 소위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의 구분을 나누고 있는데
자기는 그런 구분을 좀 폐기하고 싶고 대충 그런 얘기를 하는데...
여하간 문제의 심슨 에피소드는 기본적으로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을 뼈대로 하고
바트가 팻 토니의 갱에 입단하면서 벌어지는 상승과 하강을 다룬다고 하는데,
바트는 여느 장르의 주인공들처럼 완전한 파국을 맞게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패러디는 철저하지는 않대.
그러나 '평범한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결말이 오히려 그 평범성에 대한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한다고...
문득 느낀 건데, 내가 느끼는 이 지리함은 얘들 글이 두괄식이라는 데서 오는 것 같기도 해.
왜 서론과 심지어 제목에서 이미 다 대충 예측 가능한 내용들이 몇 문단에 걸쳐서 계속 되풀이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니까.
8. The Simpsons, Hyper-Irony, and the Meaning of LIfe 심슨 가족, 초 아이러니, 그리고 인생의 의미
Hyper-Irony를 옮길만한 말은 초,과,고 정도가 생각나는데 고는 아닌 것 같고, 과를 쓰기엔 부정적 어감은 없는듯 해서
그냥 초 아이러니라고 써봤어. 얼마나 거창한 내용을 말하고 싶길래 저런 거창한 단어를 쓰고 있는 걸까?
저자는 Carl Matheson이고 매니토바 대학의 철학과 교수래.
코미디 프로그램이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는 건 당연하겠는데, 저자의 생각에는 근자에 들어
<심슨 가족>이나 <사인펠드>와 같은 시리즈는 뭔가 근본적으로 50-60년대 소위 황금기의 시트콤 등과는 다른 점이 있대.
그것은 첫째로는 근래의 작품들이 굉장히 인용적quotational이라는 것이고(이걸 인용주의quotationalism이라고 명명하는데...)
둘째로는 초 아이러니hyper-irony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고 해. 저자는 심슨 가족에서 엿볼 수 있는 이 두 개의 특성을
논구해 보겠다고 하고 있어.
좀 어이없는 게 뭔지 알아? 구글에 quotationalism이랑 hyper-irony를 치면 유의미해 보이는 페이지는 '이 글'밖에 없어.
학자들 사이에서 나름 공유되는 학술용어가 아니라는 말이잖아. 뭐지? 자기과시?
여하간... 인용주의는 미국의 텔레비전 역사에서 70년대 정도부터 뚜렷한 부각을 드러낸다고 저자는 설명해.
주요한 예시로는 Saturday Night LIve라던지, Late Night with David Letterman이나 Second City TV 등이 있다고 하네.
심슨 가족은 이러한 인용주의가 성숙기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야.
흥미로운 것은 심슨 가족의 기본적인 구성이 이전의 스케치식 코미디와는 달리 가족물로서의 정체성을 지녔다는 점이야.
즉 본질적으로 인용적quotational이지 않은 구성임에도 대단히 인용적인 프로그램이 나왔다는 사실이지.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심슨 가족에서 쓰인 인용의 방식은 그저 패러디의 대상을 말하자면... '읊어내는' 방식의 1차원적인 것이 아냐.
"Streetcar Named Marge"에피소드를 살펴보자면, 주요 소재와 제목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명한 희곡에서 따왔고,
중간에는 아인 랜드와, <대탈주>, 히치콕의 <새> 등의 작품들이 다종다양하게 '인용Allusion'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저자는 여기서 6번째 에세이를 참고해볼 것을 제안해. 그러고 보면 저자가 많으니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생기는 셈이겠지)
저자는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어떤 대상을 조롱하는 것을 깔고 들어간다고 주장해. 코미디는 본질적으로 잔인한 장르야.
그럼에도 이런 무감각은 도덕적 목적을 지닌 경우도 많았다고 저자는 설명해.
예를 들어 <야전병원 매쉬>의 등장인물들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고통을 덜어보고자 농지거리를 주고받는다는 거야.
그런데 근자에 들어서 <사인펠드>와 같이 그런 도덕적 태도를 완전히 저버린 프로그램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문제는 이거지. 심슨 가족은 일정한 도덕적 의도를 겨냥할까, 회피할까, 아니면 그런 문제설정 자체에 무관심할까?
이런 질문은 에피소드와 캐릭터의 수가 다양한 만큼 다르게 대답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이는 하나마나한 질문이지 않나?
저자는 현재 지성계의 동향을 잠시만 살펴보자고 제안해.
저명한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미술사를 평면성flatness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평면성은 본디 화가들이 단순히 대처하고 처리해야 했던 매체medium의 특성이었지만,
즉 평면 위에 3차원처럼 보이는 상을 묘사하려는 것이 화가들이 달성하려 노력했던 목적이었지만,
20세기가 되면 회화의 3차원을 모사하려는 목적이 폐기되고 화가들은 그 평면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거야.
뭐 피카소라던가, 칸딘스키라던가 같은 거겠지 예컨대?
그런데 이런 시각으로 보았을 때 미술사가 마치 과학이론이 그러하듯 '발전progress'해 나간다는 관념이 막다른 길에 처해.
평면성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나서 보니 이후 미술이 추구해야 할 목적이 희미해진 거지.
아서 단토를 이를 "예술의 종말"이라고 일컬었대. 1970년대경이 되면, 화가들은 다시금 재현적인 회화스타일로 회귀하기 시작하고,
많은 작품들이 과거의 예술운동과, 동시에 현재 추구할 목적이 없어진 공허에 대한 일종의 논평이 되어갔대.
"아 왕년엔 나도 말이지..."같은 것일까? 저자는 비단 미술계뿐이 아닌 건축이나 영화같은 예술 영역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지적해.
이런 흐름은 예술계만의 일도 아니었는데, 심지어 과학계의 파이어아벤트나, 철학계의 데리다, 로티 같은 인물들을 보면 그러하대.
지성계에서 일정한 권위가 파국에 처한 것을 우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거야.
이런 파국 앞에서, 그 분야의 사상가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영역의 역사를 재고찰하는 방식으로 침잠해 들어가.
발전의 관념이 파기되었다면, 과거의 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것이 딛고 선, '덜한 것'이 아니게 되고,
자연스럽게 동등한 것으로 고려해도 될만한 자격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지.
더하여 이는 발전의 관념이 부재하게 되었으므로 그 공백을 채우려는 조금은 필사적인 움직임이기도 해.
그러므로 현대의 인용주의는 이런 파국의 결과일 수 있는 거야.
지혜knowledge를 포기하게 되니, 다식knowingness에의 집착이 이루어지게 돼.
이제 절대적 진리같은 건 존재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너보다 '아는 것'은 하나라도 더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거지.
물론 인용주의는 반드시 권위의 부재로 인한 혼란으로만 설명할 일은 아닌데, 예를 들어 건축계에서의 신도시주의new urbanism은
더 나은 공동체를 재구축하기 위하여 이전의 역사를 참조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어.
자, 그럼 심슨 가족은 어떤 도덕적 의도를 지녔을까?
저자의 대답은 심슨 가족은 도덕은 커녕 아무것도 겨냥하지 않는다는 거야. 심슨 가족의 유머는 어떤 대상을 제시하고,
곧바로 그것을 다시 깎아내리기 위해서만 무언가를 배치해. 저자에 따르면 이건 심지어 냉소조차도 아냐.
심슨 가족은 자신의 냉소조차도 다시 깎아내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저자는 이런 태도를 초 아이러니hyper-irony라고 부르겠다고 해.
이게 대관절 무슨 소리인가?
저자는 "Scenes from the Class Struggle in Springfield"에피소드를 참조하자고 해.
여기서 마지는 우연히 싸게 얻은 샤넬 정장을 입고 외출을 했다가 상류층 클럽에 회원인 고교 동창을 우연히 마주쳐.
옷차림 때문에 자신과 같은 계급의 사람이라고 착각한 그 동창은 마지를 클럽으로 초대하고, 상류 사회의 휘황찬란함에
매료된 마지는 클럽에 녹아들기 위해 자기 가족들에게 윽박을 지르고, 목돈을 들여 새 옷까지 무리해서 마련하게 되다가,
가족이 더 소중함을 깨닫고 나서, 어차피 그 잘난 사람들은 우리를 원하지도 않았을 거라며 집착을 놓게 돼.
재미있는 반전은 클럽 사람들이 전부 심슨 가족이 입단하는 걸 기껍게 생각해서 환영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는 거지.
이 에피소드의 흥미로운 점은 일단 클럽의 회원들이 고정관념과 같은 냉혈한들이 아니었다는 점이야.
더하여 마지가 집착을 놓게 되는 이유도 흥미로운데, 그것은 하나는 가족과 클럽을 둘 다 챙기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은 심슨 가족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클럽 회원들은 계급차별에서 동떨어져 있었는데도
도리어 그런 클럽에 심슨 가족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지의 생각은 계급차별적이라는 점 때문이야.
그러하므로 이 에피소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따뜻한 척을 하면서 사실을 굉장히 냉정한 부분을 숨긴 에피소드인 거지.
초 아이러니는 도덕적 고취, 종교적 계시, 진실의 추구 등의 '더 높은 가치'가 상실된 시기에 나타난 태도야.
권위가 상실된 시대에 코미디는 어떤 긍정적인 목적에 복무할 수 없게 되어 그저 공격 자체의 '재미'만을 위해
문화 전방위에 걸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고, 심슨 가족은 그런 흐름의 훌륭한 예시라는 거지.
그런데 심슨은 가족물로서의 정체성도 지녔다고 했지. 저자는 이것을 카타르시스의 반대 개념이 아닐까 추측해.
한없이 냉소적인 심슨 가족의 에피소드에 일종의 당의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거지. 따뜻한 가족물의 외피가.
여기서 초 아이러니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 나름의 생각을 잠깐 적어볼게.
네이버 따위에 아이러니를 쳐도 나는 사실은 무슨 말인지 아주 와닿지는 않더라고.
내가 이해하는 건 이런 이미지야. 예를 들어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에서 일베충들의 태도에서 가장 근본을 차지하는 건
아이러니라고 했거든. 5.18 희생자들에 대해서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은 후, 그것을 비난하면 간단하게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덤벼드시네? 농담이야~"라고 해버린다는 거야.
혹은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이 실린, 우리나라엔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출간된 책에 보면
(당시의) 요즘 일본 예술계는 죄다 "난짯떼~"라는 게 좀 불만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적혀 있거든.
이것도 우리나라 말로는 "농담이야~"정도인 모양이지?
즉 어떤 발화를 내뱉는 화자가 "나도 이것이 OO임을 알고 있는데, XX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농담이니까~"라는 태도가
나는 아이러니라고 이해했어. 거리를 두고, 그것을 '알면서' 비웃는 태도를 일컫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
아니, 꼭 비웃는 행위가 덧붙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슬프지만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것도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일컬어지는 걸 보면 말이지. 여하간 알면서도 아닌 척, 거리를 두는 태도인 거겠지?
문득 그러고 보니 아이러니란 시공간적인 거리나 틈새를 전제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
더하여 그 아이러니라는 사태와 연관된 주체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데,
그것을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사람 중 하나는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는 말이야.
소위 역설은 단어가 가진 의미의 차원에서 '말이 안 되는' 사태를 의미함이니 언표 자체로서 자족적일 수 있지.
그러나 아이러니는 그걸 아이러니라고 판단해야 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누군가와 표현 사이의 거리가 아이러니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 읽고 있는 영어 회화 책에서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이란 표현이 나오면서
저자가 이걸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표현했는데, 이건 말하자면 '살아 봐야' 아는 거잖아.
좋은 의도로 행한 일이 나쁜 결과로 이어졌다는 건 시간적인 틈과, 그걸 '그 위'에서 지켜보고 판단하는 주체를 전제한 게 아니겠어?
ㅋㅋㅋㅋㅋㅋㅋ 혼자 주절거려 놨구먼. 여튼 아이러니란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어.
만약 이런 내용이 아니라면 뭐... 누군가 교정해 주면 좋은 일이겠고...
여하간, 그렇다면 이 에세이의 저자가 초 아이러니라고 일컫는 것은 생각보다는 별 것 아닌 개념적 유희라고 생각되는데
이런 아이러니의 태도마저 다시 한번 비웃는 태도를 가르키는 거지. 무차별적 냉소, 자기의 냉소조차 비웃는 냉소를 말하는 것일 거야.
어중간한, 혹은 철저한(?) 회의주의인 거지. 회의주의마저도 회의하는. 그러나 이런 행위가 메타적으로 끊임없이 상승하는 게 가능한가?
회의주의적 태도는 말하자면 그냥 회의주의적이면 그만인 거거든. 자신에게 그 칼을 들이민다고 단순히 '초 회의주의'따위가 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초 아이러니 씩이나 되는 거창하게 들리는 작업은 "나도 내가 냉소적인 건 알아~"라고 말하는 딱 한 순간에만 반짝 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그 반짝조차 가능은 한 건가? 싶어지기도 해.
나는 아이러니를 위에서 간단히 '거리를 두기'라고 생각해 봤는데, '거리에 두기에 거리를 두기'는 말장난 수준도 못되는 것 같거든.
그렇게 때문에 '초 아이러니'라고 응고시킨 일반화된 개념의 제시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꼴이 차라리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드네.
더하여 요컨대 개념의 고안이 철학적 탐구를 통한 사유의 전달보다, 꼴사나운 잰 체를 하는 수행성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그러다보니 솔직히 말해서. 뭐... 이런 속 빈 강정같은 걸 츄라이 츄라이 하는 게 내가 통속적인 미국 학계에 갖고 있는 인상인 것도 사실이지.
권위의 상실이 무분별한 훈고학으로 귀결되고, 그게 냉소와 인용으로 점철된 활동으로 나타난다는 지적은 그래도 흥미로웠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은 있기 때문이겠지? 나 자신이 이런 식으로 문화적 진단을 내릴 깜냥은 없었지만.
9. Simpsonian Sexual Politics 심슨의 성 정치
Dale E. Snow와 James J. Snow의 공저네. 성이 같은 걸 보니 아마 부부려나?
전자는 메릴랜드의 로욜라 대학의 철학과 부교수고, 후자는 볼티모어의 중학 수학 선생이라고 하네.
부부가 맞는가보다.
이 에세이가 말하려는 바는 꽤 간단해.
심슨 가족의 세계인 스프링필드는 성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거지.
스프링필드가 현대의 미국을 상징하는 장소라면, 그곳에서 틈틈히 얼굴을 비치는 캐릭터들의 성비는
현실의 그것과 다르게 좀 더 남성이 나타나는 비율로 되어 있어.
그나마도 여성들은 항상 아름답고 상냥한 모습으로만 나오고, 좀 더 현실적인 여성의 묘사는 극소수라는 거지.
심슨 가족 가이드 북에 명시된 고정 캐릭터 63명 중 여성은 고작 16명밖에 되지 않고,
그 16명도 살펴보면 스키너 부인, 러브조이 여사, 밴 하우튼 여사, 만줄라 등 좀 더 주요한 남성 캐릭터의
부인이나 어머니... 요컨대 부속물 정도로만 등장하고 있어.
또한 이 에세이가 쓰여졌던 당시로서 248개가 나온 에피소드 중에서
리사에게 집중한 에피소드는 고작 28개이고, 마지에게 집중한 에피소드는 호머와 마지의 연애사 에피소드까지
포함하는 나름의 편법을 사용하고서도 21개밖에 안되는 거야.
혹은 게스트 스타 비율도 160명의 남성 스타와 40명의 여성 스타로 여성의 수가 현격히 적은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스프링필드는 남성 지배적인 사회야.
이어 저자들은 버지니아 울프를 인용하면서 그녀가 말한 "가정의 천사" 타입에 마지 심슨이 정확하게 부합한다고 주장해.
진짜 파격적인 어머니 상이 <사우스 파크>의 카트먼 부인으로 등장했다고 치자면,
푸른 머리를 자기 키만큼 틀어올리고, 쉰 목소리로 말을 하더라도 마지 심슨은 전통적인 어머니 편에 선 캐릭터지.
마지 심슨은 스프링필드의 요지경 속에서 안식처를 제공하는 가정의 수호자로서 기능해야 해.
호머에게 반한 바로 그 순간, 마지 부비에는 그가 제공하게 될 모든 불쾌와 고난을 기꺼히 감내하는 성녀로 거듭나게 되는 거야.
호머 심슨이 파격적인 캐릭터가 되고, 그럼으로써 <심슨 가족>이 파격적인 프로그램이 될 수록,
역설적으로 마지 심슨은 그런 풍파를 거의 초인적인 노력과 힘, 그리고 참을성으로 버텨내는 인물이 되는 거지.
심지어 마지 심슨은 중년의 나이에 아이를 셋이나 두고도 남편과 성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되기까지 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아니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심슨 가족이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핵가족의 모습을 띠는 것은 풍자를 위함이 아닌가?"
그러나 저자들은 이에 반대해. 그런 설명이 가능한 캐릭터는 예를 들자면 번즈 사장이야.
번즈 사장은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그대로 육화시킨 캐릭터야. 그리고 그의 밑간데 없는 언행들은
그 과잉 때문에 곧바로 시청자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욕망의 우스꽝스러운 측면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거지.
그런데 심슨 가족이나, 거기서 마지 심슨이 '가정의 천사' 역할을 맡고 있는 모습에는 그런 조롱조가 섞여 있지 않아.
마지 심슨이 현모양처 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런 역할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은 전혀 없거든.
저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리사 심슨에게 주목해. 리사 심슨은 자주적이고, 진취적이며, 도덕적인 인물이니까.
다만 이런 똑똑이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인기가 없기 마련이니, 그녀가 주목을 덜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닐 지도 모르지.
리사 심슨의 도덕적인 성격은 몇몇 에피소드에서 바트 심슨을 조금이나마, 일시적으로나마 교화(?)시키기도 하고,
호머 심슨에게까지 종종 영향을 끼치지. "Lisa's Wedding"에서는 호머 심슨의 입을 빌려서 "네 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고백까지 듣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리사 심슨이라는 캐릭터의 존재는 저자들에게 일종의 위안이 된다는 식인 것 같아.
음... 이 에세이는 전반적인 논조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불만이 없었어.
특히 마지 심슨이라는 캐릭터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부분이 꽤 와닿았지.
평소에도 많이 느끼고 있던 부분이니까.
다만 오히려 나는 또한 남자로서 그런 성녀 이미지에 끌림을 느끼던 적도 제법 되었던 게 사실이지만.
3장은 '윤리학과 심슨 가족'이라는 표제 아래에서
이번에는 아예 윤리학을 걸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겠다는 선포를 해버려.
1장에서 했던 걸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지?
물론 여기서는 심슨가 밖에 다른 캐릭터들에 시선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10. The Moral World of the Simpson Family: A Kantian Perspective 심슨 가족의 도덕 세계 - 칸트적 관점에서 본
저자는 James Lawler야. 뉴욕 주립대학 버팔로 캠퍼스의 철학과 조교수네.
칸트의 도덕철학은 의무에 중심을 맞추고 있어.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욕망 따위와는 반대되는 개념이지.
저자는 호머, 바트, 마지 순으로 그들의 행위를 평가하는데, 그들은 아주 가끔씩 (특히 앞의 둘)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자신의 욕망에 더 충실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나 리사 심슨은 달라. 그녀가 주목을 받는 에피소드들은 항상 일정한 도덕적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지기 때문이야.
온 마을 사람들에게 고립당하더라도 진실을 밝혀내거나("Lisa the Iconoclast"),
국회의원의 부패를 고발하거나("Mr. Lisa Goes to Washington"), 동물을 해치는 것이 옳은지 질문하거나("Lisa the Vegetarian") 등등.
저자는 이런 리사의 행동을 칸트의 정언명령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해보려고 해.
왜 있잖아, 보편적 준칙이 될 수 있는 원칙 하에서만 행위하라는 거.
그 후엔 "Moaning Lisa"를 참조하면서 뭐 도덕적 의무를 다할 때 진정 행복도 찾을 수 있다 비슷한 얘기를 하는 듯 하네.
정리를 하면서 느낀 건데 저자의 약력은 그럭저럭이어 보이는 것에 비해
끔찍할 정도로 영양가가 없는 에세이네. 그럼에도 내가 이 에세이에 크게 불만을 갖지 않았던 건
적어도 각 에피소드들에 대한 참조는 풍부했기 때문이었던듯 해.
각 캐릭터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에서의 행동에 관한 서술이 제법 되거든.
11. The Simpsons: Atomistic Politics and the Nuclear Family 심슨 가족 - 원자론적 정치와 핵가족
저자는 Paul A. Cantor야. 버지니아 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듯 하고 다른 저자들에 비해 제법 저명한 사람인 듯 하네.
심슨 가족이 핵가족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많은 평론가들이 이것을 현재 미국에서의 가족 가치의 상실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저자는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해. 오히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역사에서 심슨 가족의 직속 선배격인 드라마나 시트콤들은
제법 급진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거든. 편부모 가족의 구성이나, 아빠가 둘이라거나 등등.
특히 Party of Five(1994-2000)정도까지 오면 파격은 정점을 찍는데 이 프로그램에선 아이 다섯 명의 부모가 차사고로 목숨을 잃어.
이건 핵가족이라는 관념을 굉장히 훼손하는 건데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아이들은 부모 없이도 (그건 자유를 의미하겠지) 잘 살 수 있고,
부모들은 자기들 없이도 아이들이 잘 클 수 있으니 자기들은 본인들 인생만 즐기면 된다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런 흐름 속에서 심슨 가족이 등장했던 거지. 심슨 가족은 핵가족의 관념을 풍자하고 있지만 그렇게 풍자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체는 항상 유지되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어.
"이 가족은 가능한 최악의 형태이다. 그럼에도 가족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는 거야.
바트는 청소년들에게 나쁜 본이 된다는 숱한 비판을 받았지는 그는 일정한 선은 절대 넘지 않는 인물이고,
결정적으로 미국의 반항아의 계보를 잇는 캐릭터이기도 해. 그런 의미에서 전통을 따르는 인물상인 거야.
문득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Simpson Tide" 에피소드에서 바트가 한쪽 귀에만 귀걸이를 하거든.
그걸 보고 리사가 말하지. "굉장히 반항아스럽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대단히 순응자스럽고."
마지와 리사는 두말할 것도 없지.
호머는 대단히 나쁜 가장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적어도 가장 노릇을 저버리려고는 하지 않아.
"Home Sweet Homediddly-Dum-Doodily"에서 볼 수 있듯이, 심슨 가족은 삐걱거리는 가정의 문제에 대하여
전통적인 대처(플랜더스 가의 독실함)와 현대적인 대처(아동센터의 조치) 모두를 기각해.
여기서 또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첫째로는 힘있는 종교 지도자들(특히 근본주의적인)의
불만을 살까봐 두려워서, 둘째로는 본인들이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기 때문에 종교를 아예 무시하는 방식으로 제작을 하는데
심슨 가족은 현대 미국인들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인 종교를 도외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
심슨 가족이 일요일마다 교회에 참석하는 모습은 다양한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고, 교회와 관련한 이야기를 다루는
에피소드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야. 나도 생각해보면 심슨 가족을 보면서 아 미국인들이 저렇게 교회를 중시하나 보다 했었지.
심슨 가족은 물론 종교를 풍자하고 있지. 그럼에도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인의 삶에서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긍정하고 있는 거야.
그뿐 아니라 가족이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정부, 기관, 학교 등을 풍자하면서 심슨 가족은 그것들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해준대.
그러므로 이 스프링필드라는 소도시의 세계가 묘사되는 것은 현대의 파편화된 도시생활에 찌든 미국인들에게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자족적 공동체를 지켜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거야. 스프링필드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같은 장소인 거지.
저자는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고 있어.
니체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식자층만 이해하도록 썼지만 보통 사람들의 편견을 옹호하는 내용을 썼다고 했대. 그게 우스운 점이라고.
심슨 가족은 지식인들에게 지식인의 방식으로 보통인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 니체의 칸트에 대한 평과 닮았다는 거야.
그러나 심슨 가족은 식자층이건 보통 사람들이건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더 나은 점일지도 모르겠다고.
비판하고 풍자함으로써 오히려 그 실체를 긍정하게 된다는 시각은 꽤 재미있는 지점이 있는 에세이였던 듯 하네.
그리고 각 에피소드들의 묘사나, 무엇보다 여타 텔레비전 시리즈들의 간략한 역사들이 흥미로웠어.
아 쓰기 진짜 쉽지 않네;
드럽게 귀찮다 정말... 앞으로도 리뷰 남길 때 좀 생각해봐야 될 경험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고생시킬줄 몰랐어 더군다나 좀 별로였던 독서경험이었던 걸 쓰려니까 더 고생스럽네.
영어로 된 글을 요약하는 것도 고역이고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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