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0일 수요일

자주 가던 헌책방 이야기

소위 신림동 고시촌이라고 불리는 대학동/서림동에 꽤 오래 전부터 살았어.
사실 내게는 신림9동/2동이라는 구분이 더 친숙하지만 ㅋㅋ
여튼 도림천을 사이에 두고 대로 하나로 양분되는 이 두 동네에서
대학동 사이드로 주욱 이렁저렁 가게들이 있거든.
80년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가 사라졌다는 사회과학서점 중 아직도 근근히 명맥을 잇고 있다는
'그날이 오면'이 여기에 있고, 그 같은 건물, 바로 옆에 지하로 헌책방이 하나 있어.
지금은 상호가 대교고서인가 그럴거야. 원래는 도동고서였는데, 왜 바뀌었는지는 조금 뒤에 얘기함...

원래 이 건물의 마주보는 오른쪽에 헌책방이 하나 있었거든. 상호가 기억 안나네;
여기를 정말 자주 갔었지. 뭐 뜸해도 하루 걸러 하루는 가다시피 했었으니까.
원래는 여기 주인이 웬 대머리 아저씨(ㅠㅠ)였고 조금 꾀죄죄한 아저씨가 가끔 가게를 보길래
아 뭐... 직원?이구나 했었는데...

여기서 [소돔의 120]일 고도판을 발견하고 계속 눈독만 들이다가
대머리 아저씨가 나한테 단골이고 계속 관심있어 보이는데 40000원에 주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원래는 얼마였더라; 여튼 나는 이게 괘 괜찮은 딜같아서 냉큼 거금을 들여 샀었는데
나중에 알라딘 중고서점 신촌점인가에서 비닐포장까지 되어있는 쌔삥을 발견하고 (심지어 가격도 쌌음)
땅을 치며 또 구매했던 기억이.... 지금보다 책 모으는 걸 더 재밌어했던 젊은 날의 과오라 하겠다.
심지어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이게 혹자들이 혀를 끌끌 차는 매서 취미라는 거겠지. 어쩌겠어?
여튼 그랬는데 어느날인가 갑자기 건물 지하에 웬 헌책방이 하나 더생기더라고? 그게 도동고서인데,
지금와서 보면 꾀죄죄한 아저씨가 대머리 아저씨한테 헌책방 운영 노하우를 좀 전수받은 모양새인듯 하더라고.
얼마 안있어 대머리 아저씨 헌책방은 없어졌는데, 이게 합의가 되어있던 상황인지 아니면
대머리 아저씨가 뒤통수를 맞고 배신감에 부들거리면서 폐업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왠지 후자같긴 한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eriabox&logNo=20107947129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96551.html

여튼 이 도동고서 아저씨가 한겨레에 자기 기사가 난 걸 스크랩해서 액자에 걸어놓은 것도 본 기억이 있어서
구글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 있네. 내가 봤던 건 두번째 링크의 내용이었는데,
여하간 여느 헌책방과는 다르게 꽤 산뜻한 곳이었어. 나는 진짜배기 고서를 찾아다닐 생각도 깜냥도 없는 처지라
뭐 눈독들이던 책이 싸게 나온 걸 보고 냉큼 주어오는 식의 손님이었지만. 여하간 여기를 자주 갔었지.

내가 하고싶었던 얘기는 사실 아주 대단한 건 아닌데,
내가 꾀죄죄하다고 얘기했던 이 사장님, 김종건씨가 조금 희한한 사람이었다는 거야.
굳이 말하면 열화판 도올같은 사람이었는데 왜 있잖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모를 이상한 썰 푸는 아저씨들.
자기 나름대로는 근거 확실하고 대단한 걸 (이상하게도 한학 비스무리한 것이 많음) 얘기해 준다는 데 막상 듣자면 좀 지리멸렬한...

한번은 내가 책구경을 하는데 나한테 뭐 허리 건강이 어떻다느니 얘기를 하시더니
요상한 런지 자세를 막막 취하면서 이게 고구려 무사들이 건강을 지키던 체조라고?
나한테도 해보라고 하고 뭐 심지어 자기 허리쪽을 만져보라고 하고...
대충 이미지가 잡히지?

맨날 가면 사극에 나올 것 같은 요상한 한자 책을 펴놓고 소위 공자왈맹자왈하듯 읊고 계시거나
뭐 어떤 날은 가면 불경이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고
어느 날은 일본어 방송을 틀어놓고 신문지에다 서예공부라도 하시는지 붓글씨를 쓱쓱 쓰기도 하시더라고.
약간... (나로서는 조금 허무해 보이는) 현학자 스타일이었던 셈이지.

그랬는데 어느 날은 또 가보니 나한테 말을 거시더라고?
뭐 이름이 어떻게 되냐는 거야. 그랬더니 대뜸 사람의 이름에 그 사람의 운명이 담겨 있다고?
이것이 '음성학'적으로 어떻고 저떻다고?
???????
어차피 자기만족이지 싶은데 내가 대뜸 개소리 집어치우쇼 할 수 없으니
네 네 하고 들어는 드렸는데 이게 참으로 당황스럽고 황당한 거라.
심지어 저 '음성학'이라는 용어가 나는 너무 우스꽝스러웠던 것인데
Philosophy : 철학관의 철학 = Phonetics : 이 아저씨의 '음성학' 이었던 게 아닌가 싶어져서 그랬지.
띠용 소리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났는지 모르겠다; 거의 불꽃놀이 수준이었음.

압권은 뭐였냐면 그러고 얼마쯤 뒤에 이번엔 우리 부모님 성함을 물어보시더라고?
가르쳐 드렸더니 두 분이 금슬이 좋다는 거야.
오호 통재라; 이게 더 틀릴 수 없는 말이었거든. 사적인 내용이니 여기서 굳이 더 밝히진 않겠지만.
내가 이 사장님을 면박을 주려면 줄 수 있었지만 속으로만 웃고 말았지.
나중에 보니 다른 손님들 붙잡고도 비슷한 얘기 하고 있더라고.
심지어 그 '음성학'을 들으려고 찾아온 것 같은 사람도 있어 보였고;
보험왕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혀가 그렇게 날름낼름 길쭉하셨던 건지?

아 상호를 바꾼 것도 내가 제대로 알아서 하는 얘긴 아니지만
아마 그 '이름철학' 때문이었을 거야. 도동고서보다는 대교고서가 무언가 낫다는....?
정작 사모님한테 내가 한번 스리슬쩍 여쭤봤을 때는 아니라고는 하셨는데
글쎄 정황이 저런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

최근 다시 가볼까 했는데 갈때마다 문은 닫혀있고
통로에 쌓여있던 책들이 휑하니 없는 것이 폐업을 했거나 옮겼거나 둘 중 하나같아 보이더라.
요전에는 알라딘 때문에 헌책방들이 고생이라고는 하시더니 설마?
거창하게 추억이랄 건 없어도 나름 자주 갔던 곳인데 그래서 조금 씁쓸은 하더라고.

2017.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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