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4일 수요일

The Simpsons and Philosophy (1)

나는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을 정말 좋아해.
10시즌 정도까지는 한 에피소드 당 농담 안섞고 100번도 넘게 본 것 같은데도
그 특유의 독한 풍자나 영리한 상황전개 등은 아직도 배꼽을 잡게 하는 데가 있거든.
지금 생각나는 건 한 등장인물이 "no one who speaks german could be an evil man"라고 하는 장면인데
https://www.youtube.com/watch?v=gaXigSu72A4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건 볼때마다 웃겨죽겠네 진짜.

어릴적 MBC에서 (정말 안어울리게) 배한성 씨가 호머 심슨 역을 맡아서 했을 때부터
아니 이건 뭐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거지? 하면서 봤었고
뭐 EBS판은 거의 레전드지 사실; 그 후로도 심슨 앓이를 하면서 살다가
세상이 참 좋아져서 지금은 편하게 보고싶은 대로 볼 수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팬이라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초반 열 시즌 정도가 정말 대단하거든.
애초에 이 정도 퀄리티를 10년 이상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거지.

각설하고, 펜실베니아 킹스 칼리지의 철학 교수라는 윌리엄 어윈 교수가 주축이 되어서
유명한 영화나 TV 프로그램 등을 소재로 해서 철학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보자는 기획이 있는 모양이지?
'대중문화와 철학'시리즈인데, 찾아보니 80권 정도가 나온 시리즈라고 하네 ㄷㄷ; 그 중 이 책이 가장 잘 팔렸던가봐.

한창 심슨에 빠져있을 때 심슨 관련으로 책을 찾아보면 이게 가장 위에 나왔었거든.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고, 심슨에도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 책을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지.
그러나 오호통재라. 쉽지 않은 건 하나가 더 있었으니 이걸 읽어내는 거였어.
원서를 읽는 사람이란 게 인터넷을 좀만 돌아다녀도 수두룩 빽빽해 보이지만 내가 그 중 한 명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던 차에 이제서야 읽게 된 거지.

책의 구성은 열여덟 편의 에세이로 되어있고, 각 에세이는 뭐 어디서 한자리씩 맡고 있는
사람들이 쓴 건데, 혼자 쓴 것도 있고 둘이 공저한 것도 있고 등등이야.
에세이의 질은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균등하지가 않아.

결론을 말하면 그다지 만족스러운 독서는 사실 아니었어.
이 책은 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도, 심슨에 관심있는 독자도 만족시키기 어려워 보이는데
철학에 방점을 찍자니 수준이 너무 낮고
(눈높이가 낮다는 것 이상으로, 내 깜냥으로 봐도 좀 갸우뚱 하게 되는 지리멸렬한 논의들이라 할까)
심슨에 방점을 찍자니 글쎄... 글들의 논조 자체가 각 에피소드들의 전개나 캐릭터 등등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은연중에 엿보여서 말이지.
책의 기본적인 집필 의도가 심슨을 통해서 철학을 좀 대중화시켜 보자는 쪽이었던 모양이야.
심슨 가족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 따위를 바랐던 나로서는 아무래도 실망에 또 실망일 밖에.

책은 각자 주제별로 네 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간단하게 각 에세이를 소개하고 내가 느낀 점을 덧붙일게.

그럭저럭 여기 실린 에세이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두 개인데
하나는 각 에피소드들마다 설정이 충돌하는 지점이 꽤 많다는 걸 저자들이 인지한다는 점과
(그래서 전 시즌과 에피소드를 아우르는 성찰이 사실상 쉽지 않다는 거지)
또 하나는 저자들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에피소드가 사실상 몇 개로 좁혀진다는 거였어.
우연의 일치인지, 정말 그 에피소드들이 꺼낼 이야기가 많은 훌륭한 에피소드인지는 모르지.
다만 에세이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에피소드 몇 개가 있는데 글쎄, 이 책이 나온 2001년을 기준삼아도
12시즌 정도가 나온 시리즈에서 그렇게 손가락(혹은 발가락까지?)만으로 셀만한 에피소드들만을 다룬다는 건
왜 그랬던 걸지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 구석이 있지.


첫 번째 장은 각 캐릭터를 다루는 주제로 묶여 있는데,
다섯 개의 에세이가 호머,리사,매기,마지,바트 심슨을 다루고 있어.

1. Homer and Aristotle 호머와 아리스토텔레스
저자는 Raja Halwani라는 사람이야.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면 시카고 예술대학 정도인가?
여튼 거기 철학과에서 이 책이 나왔던 2001년 당시에는 조교수였고 지금은 정교수 같네.

이 에세이의 기본적인 구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소개하면서 그 기준에 따라
호머 심슨이라는 캐릭터를 평해보겠다는 거야. 호머 심슨은 존중할만한 바가 있는 캐릭터인가? 가 중심 물음이지.
이 에세이는 시작부터 쉽지 않은 길을 걸으려는 셈인데 호머 심슨이라는 캐릭터는
실제로 존재한다면 뭇매를 맞아도 싼 성격을 가진 인간이거든;
먹는 거 좋아하고 앞뒤 안가리고 자기 하고싶은 것만 하고 책임감도 없고 말도 험하고 하고 등등...
사실 저자도 호머 심슨의 성격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미리부터 못을 박아.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특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참조해서 일단 그의
성격론과 덕이론을 간단히 검토해. 그에게 따르면 덕성이란 행위와 마음가짐 둘 다 중요한데,
무엇이 옳은지 알고 그것을 기꺼이 행하는 것이 덕 있는 인물이라는 거야.
'착하기 때문에 착하다'는 건 의미가 없는 거지. 그래서 진정한 덕에는 이성이 함께해야 해.
그게 소위 실천지인 프로네시스phronesis야. 그럼 무엇이 옳은 행위인가 하면
무엇이 덕스러운지 알고, 그것을 기꺼이 행하며, 더하여 자신의 성정(character)이 그렇기에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이런 기준으로는 호머는 사실 덕이 있는 인물인지 알아볼 만한 후보군에 낄 수조차 없지.
그럼에도 그에게 정상참작을 해줄 여지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야.
스프링필드라는 가상의 도시는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인물들로 가득 차 보이고,
호머라는 인물의 가정사 또한 제법 불우했으며,
(그는 자식을 존중할 의지가 전혀 없는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어)
심슨 유전자가 남성에게는 굉장한 무능력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음에도,
즉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혀 통제할 수 없이 말하자면 나쁜 환경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가정을 꾸리고, 그걸 자기 나름대로는 지켜나가려는 의지를 계속 보여주거든.
그리고... 호머 심슨은, 적어도 악의를 가진 인물은 아니라는 점도 있고.

저자는 "Scenes from the Class Struggle in Springfield"라는 에피소드에서 마지의
"당신의 가식없는 성격을 좋아해"라는 대사를 인용하면서
적어도 호머 심슨은 악의가 없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자기 욕망에 솔직하여
인생을 즐기는 인간이라는 점이 나름대로는 존중할만한 점이 있다고 결론을 내려.
그런 무책임한 성격을 갖고도 자기 가족의 테두리는 지킨다는 것도 유의미하고,
심지어 인생이 암울할 여지가 충분한 환경에 처한 인간이라는 점이 가점을 더 주지.

나로서는 이 에세이가 조금 변죽만 울린다는 인상을 받았던 게,
일단 다루는 주요 소재 둘(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그에 입각한 호머 심슨의 성격 판단)이
매끄럽게 녹아들어 있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야. 서로 겉돈다고 해야하나?
그러면서 말미에는 호머 심슨이 여하간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은 되지 못하는 이유를
굳이 세 가지를 대기까지 하는데 글쎄, 이런 사족을 왜 덧붙이는지도 모르겠고.

"그는 적어도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결론이나 낼 거였으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참조할 이유가 뭐였으며
그렇게 참조를 하고 난 뒤라면 저런 결론을 내는 건 또 무슨 의미냐 이거야.
다른 기준이 갑자기 끼어드는 셈이잖아? 아마도 '당대(현재) 미국의 상식선의 도덕관념'정도의 기준이 말이야.
그러니 썩 길지도 않은 글에서 미묘한 긴장이 느껴지는 거야.
글의 전제와, 전반부와, 후반부가 어그러져서 서로를 밀어내고 있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더 읽고 싶게 만드는 것이 단순한 목적이었다면
소위 대학교 강의실에서 참고자료로 쓸만한 수준은 될지도 모르지. 그치만...

2. Lisa and American Anti-intellectualism 리사와 미국의 반지성주의
저자는 Aeon J. Skoble라는 사람이야. 책에서는 웨스트 포인트 군사학교 철학과 객원교수라고 되어있고,
구글을 쳐보니 지금은 브리지워터 주립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듯 하네.

나는 이 에세이를 읽기 전 기대가 꽤 컸는데, 리사 심슨이라는 캐릭터의 입바른 성격을 내가 좀 좋아하기도 해서지만
그걸 반지성주의와 연결되어 논의한다면 흥미로운 관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어.

저자는 서두에서 지식인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점을 지적해.
소위 전문가들을 자기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할 때는 인용할 가치가 있다는 듯이 대하면서도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내용을 대했을 때는 "그 사람이 대체 뭘 아는데?"라고 돌아선다는 거지.
저자는 이런 태도는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와 "그렇다면 모든 건 의견의 문제로 귀결되고,
내 의견도 결국 한 표인 건 마찬가지네?"라는 의식을 전제로 깔고 있다고 설명해.

저자는 전문가라는 집단이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지적해.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에 더 정통할 수 있고, 하수도가 막혔을 때 우리는 분명 배관공을 부르니까.
그러므로 위에서 설명한 "내 표도 한 표"라는 태도는 정치와 윤리의 영역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야.

심지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진정 객관적인 역사는 없고, 그저 서사의 조직으로 환원된다"거나
소위 자연과학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각 연구자의 가치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라거나
심지어 뭐... 병원이 오히려 병을 키운다는 식의 주장까지 남발되는 현실이
이런 반지성주의를 더욱 부추기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어.

여기서 반지성주의의 대표주자나 다름없는 호머 심슨과, 지식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리사 심슨의 대비가 유용해지지.
또한 리사 심슨이 또래들에게 따돌림당하고, (어리다는 이유로) 어른들에게 무시당하며,
본인의 언행 또한 <이치와 스크래치 쇼> 따위를 즐긴다는 점에서 미국에서 '지식인'이라는 집단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거야.
특히 "Lisa vs. Malibu Stacy"라는 에피소드가 좋은 예시가 되지. 리사가 만들어낸 바람직한 인형은
말리부 스테이시의 새 의상 세트에 밀려서 전혀 빛을 보지 못하게 되거든.

더하여 저자는 "They Saved Lisa's Brain"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철인왕'들의 통치가 전혀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을 보아서도 미국 사회에서 지성인이 처한 상황을 알 수 있다고 해.
소위 "이론적으로는 맞지, 공산주의도 이론적으로는 잘 돌아가!"라는 거지.

저자는 그럼에도 꼭 현실적인 대안이 호머 심슨으로 대표되는 반지성주의나,
큄비 시장으로 대표되는 부패한 모습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해.
리사 심슨으로 대표되는 지식인상이 불완전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지향할만한 바가 있으며 그것이 공익을 가져온다는 거지.

음... 그러니까, 이 에세이는. 전개도, 결론도 결국 좋은 게 좋다는 거야.
현대사회에 반지성주의적인 흐름이 있다는 걸 느끼거나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좋은 귀띔은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어떤 진단과 처방이 가능하며, 그것이 리사 심슨이라는 캐릭터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가 이 글을 읽는 동기였다면
제법 실망스러운 독서경험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드네.
나로서는 이 글을 읽은 후의 나는 읽기 전의 나보다 더 배운 게 없는 것 같거든.

3. Why Maggie Matters 왜 매기가 중요한가?
저자는 Eric bronson이란 사람이야. 책에서는 뉴욕 버클리 대학의 철학/세계사 강사였다고 되어있는데
지금은 아마도 토론토 요크 대학 인문대에 적을 둔 것 같네.

매기라는 캐릭터에 중점을 두면서 어떤 논지를 전개한다는 게 쉬울 수는 없지.
매기 심슨은 장식품같은 캐릭터거든. 역할도 없고.
그러다 보니 "Who Shot Mr. Burns?" 에피소드에 조금은 분량을 할애해야만 했을 거야.
그나마 매기 심슨이 무언가를 했던 에피소드이다 보니...

저자는 제법 재미있는 주장을 하는데
"Brother, Can You Spare Two Dimes?" 에피소드를 근거로 해서 매기 심슨이 자기 안에
제법 명료하게 표현될 수 있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일리가 있지.
이 에피소드의 말미에 '아기 말 번역기'가 나와서 매기의 옹알이를 번역해 주는 모습이 나오거든.
그리고 그 후로 몇십, 몇백 개나 되는 에피소드들을 거치면서 (정말 드문 예외를 제하고) 매기 심슨은 단 한 마디도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거나, 못 하거든. 이게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겠다는 거야.
침묵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인 거지.

저자는 사르트르의 자서전 격인 [말]과 플로베르 연구서? 평전?인 [가문의 백치]를 인용해.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타인들과 언어를 통해 소통하면서 발달한다는 거야.
[마담 보바리]와 같은 작품들은 플로베르가 겪은 유년기의 소통 부재를 만회하려는 치열한 행위였다는 거지.
매기 심슨이 이런 처지에 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저자는 추측해.
매 에피소드에 덧붙은 오프닝 씬만 보아도 마지 심슨은 자기 막내딸을 계산대 위에 올려두고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찾다가 장바구니 안에서 매기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하거든.
호머 심슨의 부모 역할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겠고;
상황이 그러하니 "Home Sweet Homediddly-Dum-Doodily" 에피소드에서 다른 두 아이들과는 달리
매기 심슨이 플랜더스 가정에 그렇게 쉽게 적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거지. 부모의 사랑이 고팠던 유아였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여기까지는 꽤 재미있게 읽었어. [심슨 가족]과 관련있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됐거든.

그런데 아, 여기서 노자의 도덕경 얘기가 나오는데...
솔직히 이후로는 그냥 휙휙 넘겼어. 도덕경이니 바가바드 기타니를 인용하며 저자는
서양의 토의 전통에 반대되는 동양의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따위의 말하자면... 도?가 있다는 얘기를 해.
그런 동양의 도를 받아들인 쇼펜하우어나 하이데거 등의 철학 거장들도 있다는 식으로... 주절주절.
아이고;

그러니 결론은 침묵을 무시하면 번즈 사장처럼 따끔한 맛을 본다 이거지;

4. Marge's Moral Motivation 마지의 도덕적 동기
저자는 Gerald J. Erion과 Joseph A. Zeccardi라는 사람들이야.
전자는 뉴욕 주 Medaille College 메달이야 메데유야?; 여튼 여기서 철학교수를 맡은 듯 하고
후자는 캘리포니아 Saint Mary's College에서 철학과 조교인 모양. 아 프로필 찾아서 쓰기 귀찮네 진짜;

캐릭터를 판단하거나 평가하려면 윤리학을 쓰는 게 편리하게 되고
윤리학을 쓰려다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를 인용하게 되나 봐, 아무래도.
이 에세이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입각해서 마지 심슨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평하려는 게 목적이라고 해.

마지는 기본적으로 '중용'을 지키는 인물이야.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사실 두 명이 더 있겠지.
러브조이 목사와 네드 플랜더스가 그들인데, 전자는 사실 세속사회에서 지쳐서 '관심을 꺼버린' 종교인을 상징하고
후자는 오히려 종교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인물형을 상징하거든.
그 사이에서 중용을 지킴으로써 대단히 바람직한 인물상을 보여준다고 저자들은 설명해.

근대 이후의 윤리학은 어떤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은 어떤 인물이 어떤 trait을 가졌는지를 중시했다고 하는데
뭐 특성? 성정? 정도이려나; 여하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9개의 덕성이 제시된다고 하네. 용기, 절제, 관용... 등등.
이러한 특성을 마지가 지녔다는 것이 어떤 에피소드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 저자들은 나열하고 있어.

이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덕 있는 삶을 영위하는 건 에우다이모니아를 준다고 설명하고 있어.
이는 쾌락과는 다른 차원의 뭐 깊은 행복? 같은 것인데,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제대로 사는 형태를 의미하는듯 해.
그러하므로 마지 심슨이 타인과 관계를 맺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녀가 좋은 삶을 영위하려 하고 실제로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자주 관찰할 수 있는 거지. 친지 및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삶을 운영하는 방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덕성들은 자연히 배양되는 것이 아니야. 그것들은 습관으로서 삶에 각인되어야 해.
덕성 있는 행위를 행함으로서 우리는 그런 덕성을 지니게 된다는 거지.
그러므로 덕성 있는 타인을 본으로 삼는 것이 중요해. 나 자신이 따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한 거야.
그런 의미에서 마지 심슨은 자기 자식들에게 모범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기까지 해.
자식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마다 중요한 조언을 주거나 자기 행동으로 말해주는 인물이기 때문이지.

심지어 네드 플랜더스와 비교해보면 마지라는 인물의 훌륭함이 더 부각되는데,
그녀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야. 어떤 때는 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되더라도
그녀는 그녀 자신이 믿는 바로서의 옳은 일을 행하기 때문이지. 그녀에게 윤리는 신이 내려준 명령이 아닌 거야.
마지 심슨이라는 인물은 이로서 상당히 훌륭한 윤리적 상을 보여준다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이 에세이는... 딱히 황당한 구석은 없는 편이지만 좀 심심하지 싶네.
그래, 마지 심슨은 제법 모범적인 인물형으로 기능할 수 있지.
그러나 내 생각에는 거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야. (이런 관점은 뒤의 다른 에세이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그녀가 좋거나 옳은 행동을 하는 건 윤리적 판단보다는 그냥... 훌륭한 엄마상을 보여줘야만 하는
텔레비전 시리즈의 일종의 관습에 의해서라고 나는 좀 생각되거든.
그렇게 그녀의 영웅적(?)인 윤리성은 생각보다 자율적이지 않다는 판단이 아무래도 나는 들다보니...
자연히 논지의 전개도 기능적으로 보이게 되지. 아, 아리스토텔레스가 9개의 덕을 말했어? 싶은 거야.

뭐... 마지 심슨이란 캐릭터를 주제로 에세이를 써야 되는 제약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겠지.
그 부자연스러운 캐릭터 메이킹에 눈을 가리게 되고...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마지 심슨이 좀 튀는 에피소드들을 더 좋아하거든.
경찰이 된 에피소드나, 도박중독에 빠진 에피소드라거나.

5. Thus Spake Bart 바트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는 Mark T. Conarad라는 사람이네. 뉴욕 시의 메리마운트 맨하탄 칼리지에서 철학과 부교수를 맡고 있나봐.
니체 전공이었나 보지?

바트 심슨이 스프링필드의 악동이라면, 철학계에도 악동이 있대. 그게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인 거지.
저자 생각에는 아마도 리사 심슨이 더 모범적인 인물이 아니겠냐고 생각하지만, 니체가 보기에는 그녀는
그저 약자의 도덕을 신봉하는 인간형에 불과한 거야. 그러면 바트 심슨에게서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모습을 건질 수 있는 걸까?

저자는 니체의 철학을 대강이나마 소개하려고 하고 있어.
표상와 의지의 이분법을 견지하던 쇼펜하우어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던 초기의 니체는
그를 따라서 [비극의 탄생]에서 의지를 근원일자(primal unity)라고 부르고, 우리가 접하는 겉모습으로의 세계를
이 근원일자가 만들어낸 일종의 예술활동의 결과? 비슷한 걸로 본다고 해.
인간이 세계를 직시함에 따라 이것이 환영에 불과하고 그 근원에는 소용돌이치는 혼돈만이 존재함을 알게 되는데,
인간은 이를 인식하지만 이를 바로잡을 수는 없는 고통에 처하게 된대.
저자에 의하면 이런 부조리와 혐오를 덜어내기 위한 돌파구로서 예술이 존재한다고 니체는 설명했대.
이런 세계의 근원에 놓인 무의미를 되돌려서 파악하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인데,
니체는 본질적으로 혼돈에 싸인 이 세계를 교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그 진면목에서 눈을 돌리는
나약함과 타락의 징표에 불과하다는 거야

저자는 스프링필드를 이런 혼돈스러운 세계로 받아들일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해.
그건 매 에피소드마다 조금씩 설정이 뒤바뀌는 에피소드식 텔레비전 시리즈라는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예를 들면 번즈 사장은 어떤 때는 70대였다가 어떤 때는 100세가 넘는다고 소개되곤 하거든.
이런 혼돈 속에서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 소크라테스 역은 리사 심슨이 맡게 되는 거지.

니체는 초기작의 이원론을 그 후 바로 폐기하는데, 그에 의하면 세계는 오직 흐름flux에 불과해.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계의 피안에 어떤 세계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염원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는 언어 자체가 존재를 잡아두는 것처럼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야. 주어와 술어가 결합해 있는 언어의 형태가
마치 주어에 해당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가능한 것처럼 착각을 불어넣어 준다는 거지.
말하자면 "번개가 친다"고 하지만 "번개"가 "치"는 게 아니라 그저 번쩍임이 있을 뿐이야.
혹은 "호머가 맥주를 마신다"고 하지만, 그는 맥주를 마시고, 트림을 하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행위들 모두의 합일 따름이라는 거지.

하여 저자는 니체가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꽤 반겼을 거라고 설명해.
애니메이션의 움직이는 그림, 동화에는 이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거든.
움직이는 그림들이 움직이는 그림으로서만 제시되는 것이니까. 그저 '흐름'인 거지.

현상-의지의 이원론을 폐기한 니체에게 예술은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돌파구가 아닌
삶 그 자체가 돼. 예술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이상적인 형태라고 제시되는 거지.
애초에 주체라는 개념 자체도 폐기해버린 니체에게 있어서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러하므로 '나'라는 것은 출발점이 아닌 도달점으로서 설정이 된다는 거야.
삶에 양식style을 부여하는 거지. 그 정점이 소위 초인uebermensch라는 것이고,
이는 자기의 삶을 예술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인간을 칭하는 거야.
그럼 그런 삶을 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야훼의 말씀을 따르면 되나? 물론 아니겠지.

니체는 종래의 철학이나 모든 종교가 무가치한 것이라고 폐기해.
피안의 세계를 상정하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차안에서의 고통이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다는 체계는 말도 안 된다는 거야.
피안을 상상함으로써 차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들이 무시된다는 거지.
더하여 역사적으로 피안의 세계를 숭배하던 인간들은 자신들의 체계를 남들에게 강요해 왔어.
무엇보다 이 강요는 소위 선악의 이분법 하에서 행해졌는데,
니체에 의하면 이 선악의 구분 자체가 오히려 약자가 자신들의 복수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작으로서
자기들을 선이라고 참칭한 것에 불과해.
강자가 강하기 때문에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들의 의지를 표하고 행했던 때에는 그저 구분의 표지로서
"우리 아닌 너희는 나쁘다"는 윤리가 통용되었을 뿐인데, 그 아래서 신음하던 약자들이 원한을 품고
소위 노예의 도덕을 창안해 냈다는 거야. 도리어 악한 건 너희들이다! 라고 했다는 거지.
그래서 소위 겸손 따위가 덕으로서 숭앙받게 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설명해.

자, 그러면 바트 심슨은 니체적인 초인 상에 부합하는 인물일까?
그런데 의외로 분석을 해 보면 그게 그렇게 녹록한 작업은 아니야.
바트 심슨은 새로운 가치,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안해가는 예술가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한 인물이거든.
오히려 그의 정체성은 기존의 권위에 대항하는 반항아 정도로서만 자리잡혀 있어.
스키너 교장이 해고되었다가 복직하는 내용을 다룬 "Sweet Seymour Skinner's Baadasssss Song"을 보면 알 수 있지.
바트는 스키너 교장이 해고되고 학교를 떠나자 그를 적으로서 그러워하게 되거든.
혹은 마을의 모두가 자기처럼 악동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 모습의
"Bart's Inner Child"라던가.

오히려 저자는 바트 심슨을 니체 이후의 도덕적 혼란을 보여주는 인물일 수 있겠다고 결론을 내려.
니체의 주장대로 기존의 선악의 구분을 폐기한 이후 모든 사람들이 예술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기에
오히려 혼란스러운 허무주의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경고를 니체가 했었던가봐.
그러니 바트 심슨처럼 그 무엇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가볍고 얕은 인물형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거지.

이 에세이는 제법 영양가가 있었지. 니체 얘기를 두루두루 하다가
결국 바트 심슨이 초인상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할 때는 조금 김이 샌 것도 사실이지만,
그 나름의 정합성이나 정보의 전달이 수준 미달이라는 느낌을 주는 건 아니었지 싶어.


아 대충 쓸라고 했는데 정리하다보니까 힘드네;;;
나머지는 다음에 쓸게. 일단 쓴 것부터 올림 ㄷㄷㄷ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