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6일 화요일

(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을 느끼기도 하는 법이겠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한테 좋은 거지

나한테도 좋으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


소설의 기본적인 토대는 이렇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에 의하여 여섯 명의 사람들이 지하 벙커에 갇히고

이들이 나름대로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는데,

이를 중학생 정도의 소년인 주인공이 일기의 형식으로 서술해놓은 내용.

독자가 읽는 것은 이 일기의 묶음이다. 파운드 푸티지?

흥미롭다면 흥미로운데 진부하다면 진부한 설정이라 하겠다.


이런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소재를 채택했을 때

독자로서는 뭐...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들이 드러내는 추악한 모습들과

그로 인하여 고조되는 갈등, 파국, 그 (보통은 씁쓸한, 폭력을 수반하는) 해결 과정,

무엇보다도 그들이 어떻게 탈출에 성공하는가 정도를 예상하며 책장을 넘길법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진부하다면 진부한 건데 이 소설이 진부함을 피하는 방식은

그런 기대되는 전개들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본다.

딱히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는 편도 아니고, 인간 본성의 추악함이 날 것 그대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며

갇힌 인물들 대 가둔 인물 사이의 처절한 대결이 펼쳐지는 것도 딱히 아니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을 포함한 인물들은 그냥 지하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알라딘 평을 보니 실망스럽다는 평도 있었던 듯하다.


이는 서술의 주체인 라이너스가 청소년이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학 교수인 러셀과의 대화 내용을 일기에 거의 옮기지 못하는 지적 능력과,

불량배인 프레드와 (소설의 전개를 위해서는 편리하게도) 굳이 대립할 일조차 불가능할 신체 능력 등...


역자의 말에서도 전하고 있듯 특기할만 한 사항으로

소설의 악역이라 불러야 할 인물에 대한 정보가 조금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있는데,

지하에 갇힌 인물들이 끊임없이 소통을 요구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묵살하면서도

그 어떤 탈출시도나 불복종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제재를 가할 만큼 요컨대 전지전능하다는 점이

미스터리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 같다. 요컨대 신의 비유로 설명해도 무방할, 어떤 불가사의함이 있는 인물?

이런 집요한 신비화는 사실은 좀 공허하게 느껴진다. 작가도 이를 모르지 않았을 터라면 어떤 의도하는 바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정도면 대강 작품의 얼개는 설명한 것 같고,

그래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은 이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 소설은 소위 '이해하면 무서운 사진'으로 비유할만 한 어떤 섬뜩함을 담고 있다.

주인공을 포함한 인물들은 전부 지하에서 아무런 희망도 얻지 못하고 죽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일기'는 누가,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


요컨대, 범인은 독자다.

오직 주인공들을 가두고, 괴롭히다가 결국 죽인 바로 그 인물만이 이 일기를 읽을 수 있다.

범인의 자리에 독자를 대입시키는 설정을 작가는 맞춰 놓은 것이다.

저 간수에 대한 어떤 정보도 차단하는 내용들이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아귀가 맞는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고, 작중 여섯 명이 서술하는 그의 외모조차도 서로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면 이 소설을 손에 들 독자가 누군지 정할 수 없기 때문.


주인공은 일기를 쓰면서 계속 '너'라는 2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dear log 운운하는 영미권의 일기 서술의 특징을 답습한 것일 수 있겠고

일기 서술 곳곳에서도 이 글을 읽을 사람은 우리를 가둔 그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을 거라며

애매하게 처리를 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꼭 '그'인 것은 아니라며 연막을 친 것.

소설이 가진 트릭이 있다면 이 지점일 것이다. 범인의 자리에 독자를 대입시키는 구성을 나름대로 교묘하게 가려놓는 작업들.


이것 하나 읽어내자고 책을 잡을만한 가치가 있었느냐고 하면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나름대로는 재미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책이 짧아서 후루룩 읽기에 좋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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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