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브 바커는 사실 한국에서는 소설가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겠는데,
요즘은 그런 커뮤니티를 들락날락거리지 않고 있어서 얼마나 회자되지 잘 모르겠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포영화 필견 리스트에 꼭 들어가던 <헬레이져>시리즈를 만든 사람이다.
뭐... 80년대 중반 이 [피의 책]연작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자기 작품이 영화화된 꼴이 맘에 차지 않아
직접 메가폰을 잡아서 저 <헬레이져>를 만들었다는 건 감초처럼 따라붙는 설명이었고....
글쎄, 그보다 조금 더 뒤 세대라면 아마 [클라이브 바커의 언다잉]이나 [제리코]같은 게임의 세계관을 다듬어준
감수자...이려나? 여튼 그런 역할로서도 나름대로는 유명할지도.
개인적으로는 이 [언다잉]을 너무너무 재미있게 했었긴 해도, 그 재미가 모두 클라이브 바커의 덕은 아닐 거라고는 생각해.
다재다능한 사람이라서 자기 책의 삽화나 표지를 직접 그리기도 하고,
<헬레이져>로 유명해진 특유의 사디즘적 디자인으로 피규어를 발표하기도 하고 (물론 디자인만 본인이 했겠지) 등등
나름 러다이트 신념이 있어서 컴퓨터도 잘 안만지려 하고 커밍아웃한 게이인
하고싶은 건 두루두루 하고 사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여하간 이 양반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이 [피의 책]은 한 권에 대강 5편 정도의 단편이 수록된 구성으로
총 6권이 나온 연작인데, 뭐 연작이라고 해봐야 같은 타이틀로 묶였다는 거지 딱히 뭐 공유되는 지점은 없어.
84년 첫 권이 출간되고 나서 장르 판에서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라는데
가장 두드러진 찬사는 역시 호러소설의 마왕 스티븐 킹이 "나는 호러의 미래를 보았다"고 상찬했던 거겠지.
내가 가진 책의 앞장을 보니 "그는 심지어 나까지 겁먹게 한다... 나는 밤에 혼자 이 책을 읽지 못 하겠다..." 등등
거장 소설가다운 구라로 칭찬을 늘어놓는 스티븐 킹의 몇 마디가 적혀 있기도 하네.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진 건 이 책이 우리나라에 출간된 적이 있기 때문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한창 들락날락거리던 호러 커뮤니티.... 아마 호러존이었던가? 아는 사람은 알겠지.
여튼 거기서 드디어 클라이브 바커의 이 대작이 우리나라에도 출간된다며
누군가 글을 올렸었거든. 그 반짝거리던 미사여구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문구는 클라이브 바커의 날고기와 같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문체를 잘 살리지는 못했다는 평이었는데,
거기서 감탄 또 감탄을 한거지 나는. 아니 그런 문체가 뭔데? 그리고 그런 문체를 어떻게 감지하는데? 저 사람은 원서를 읽어?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2305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5420
여하간 그닥 재미가 좋지는 않았는지 두 권만 출간되고 말았긴 하지만,
그래도 용돈 받아쓰는 학생 주제에 용돈 모아서 두 권 모두 사놓을 만큼의 뭐... 수집욕이겠지, 는 있었거든.
나로서는 그런 개인적 경험 때문에 조금의 애착이 있는 책인 셈이야.
결국 국내 출간은 요원하다 싶어진 상황에서 원서라도 사보자 했던게 이미 몇 년 전이고.
이제야 읽어보기 시작한 셈이지 사실.
위에 사진을 올린 책은 1,2,3권을 묶은 합본인데,
희한하게도 내가 찾아볼만한 데서는 4,5,6권 합본은 없더라고?
글쎄, 이 시리즈는 영미권에서도 생각보다 지지를 오래 받은 책은 아니었던 셈인 걸까?
본론만큼 길어진 듯한 서론은 여기서 그만 두고.
1권
사실 1권은 접한 사람이 제법 될 것 같아.
이미 출간이 되기도 했고, 심지어 다른 출판사에서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개봉에 즈음해서
한몫 땡겨보려 했는지 다시 출간하기도 했었거든.
[The Books of Blood]
이 이야기는 연작의 그야말로 도입부를 이루는 내용이야.
귀신들린 집에서, 심령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원과 귀신들린 척 하는 청년 사이의 아슬아슬한 거짓말 대결?
같은 내용인데, 뭐 그 사이에는 남녀 사이의 성적인 긴장도 있고... 대충 그런 식이지.
그런데 뻔한 반전은 이 집이 사실 진짜로 귀신들린 집이었다는 거지 ㅋㅋㅋㅋ 뭐, 영혼들이 지나는 일종의 정류소?
이 청년이 재수없이 영혼들에게 붙들리고는, 오랜만에 피와 살을 접한 이 영혼들이 자신들의 갈망을 담아서
이 청년의 살 속에 자기 이야기를 손톱으로 파서 긁적여놓는 거지.
이 연작은 그 이야기야. 살 위에 피로 각인된 책. 당신들은 피의 책을 읽는다는 거지.
[The Midnight Meat Train]
한밤의 식육열차? 로 번역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꽤 인상에 남는 단편이야. 실제로 지지도가 높은 편으로 알고 있고, 심지어 꽤 최근에 영화화도 됐었지.
뉴욕에 거주하는 유태인 카우프만이 주인공이고,
극중에서는 정육점의 고기가 그렇듯 미끈하게 '도축'된 시체가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지지. 연쇄살인.
이 살인마의 이름은 마호가니인데, 나름의 사명을 띄고 있는 걸로 묘사돼. 점점 늙어가는 자기 몸뚱이가
작업을 지연시킨다고 생각하지. 여느 날과 같이 사냥에 나선 그는 심야 지하철 칸에서 먹잇감을 찾아서 작업을 시작하고,
재수없게도(?) 카우프만이 야근 끝에 그 열차에서 졸고 있었던 거지.
이 이야기는 개인적으로는 80년대 유행했던 슬래셔 장르를 비틀은 내용이라고 생각해.
왜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같은거 말이야.
장소의 배경은 시골이 아닌 도시이고, 주인공은 처녀가 아닌 아저씨고,
살인마는 괴력의 거한이 아닌 왠 배나온 아저씨고(심지어 뭐... 여자의 입술을 가졌다?는 묘사도 있음)
살인의 이유는 정신이상을 가장한 젊은이들의 방탕의 단죄(?)가 아닌 나름의 이유가 따로 있고
살인의 방식 또한 무차별적인 난도질이 아니고 (이 또한 목적이 있어서지만) 전문적인 백정의 손길이었거든.
심지어 마호가니가 자신이 점점 늙어가기 때문에 후계자가 필요하고, 자기 노하우를 전수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어.
개인적으로는 몇 번 읽어봤지만 결말부는 이해가 조금 안 되는 편인데,
어딘가에서는 이걸 사회의 은유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역시 이해는 잘 안 가.
카우프만이 대체 뭔 본 건지?;
이제와서 내 생각에는 위에 말했던 날고기에서 피가 떨어진다느니 하는 문체가 이 단편을 보고 하는 말이었지 싶기도 해.
시체가 난무하고 살을 찢고 베어내는 묘사가 꽤 선연하게 이루어지고 있거든.
지금도 기억에 남는 묘사 중 하나는 카우프만이 도축된 시체를 처음 보았던 장면인데
그의 눈보다도 내장이 먼저 참극을 보고는 내용물을 게워내려고 했다는 식의 서술이 있거든.
속속들이 한겹한겹 모두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고 그 울렁거리는 한겹마다
고통이 새겨져 있는 그런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리고 싶어하는 것 같아, 작가는.
인간의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속성을 상기시켜주고 싶어한다는 느낌?
세상에 누가 불닭볶음면같은거 먹고 나서 같은 때가 아니고서야 자기 내장을 의식하면서 살겠어.
[The Yattering and Jack]
여기서 야터링은 하급 악마의 이름이고, 잭은 비범한 수준으로 평범한 인간의 이름이야.
둘은 다른 누구도 모르는 대결을 펼치는데,
야터링은 잭을 광기로 몰아넣어야 하고, 잭은 그걸 참고 또 참아서 야터링을 안달나게 만들어서
뭐, 악마의 법칙 따위가 있는 모양이지? 절대 대상에게 직접 손을 대서는 안 되고, 배정받은 '집'의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걸 어기게 해서 자기 종으로 삼아야 되는거지.
물론 그게 목적이라기 보다는 재수없이 자기한테 달라붙은 악마를 쫓아내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거지만.
근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이 잭이 어마어마하게 둔감한 인간이라는 거지.
자기 부인이 바람피우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도 그저 "케 세라 세라" 한마디 하고는
그런가보다~ 하는 통에 오히려 부인이 제발 차라리 나한테 화라도 내라면서,
당신한테는 내가 그것밖에 안되냐면서 울부짖다가 결국 자살해도 무덤덤한 그런 인간이니까.
야터링이 미쳐 나가는 거야. 지옥에 가서 벨제붑한테 제발 이놈 담당에서 빼달라고 애걸복걸을 하는데
뭐 높으신 분들 생각은 따로 있는 거지. 까라면 까야 되니까.
그래서 머리를 쥐어 짜내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켜도
잭은 그냥 옆집놈들이 시끄럽네, 이러고
건물이 좀 기울었나보네, 이러고.
고양이를 세 마리나 갈아치울 때까지
변기물에 빠뜨리고, 불에 태워서 죽이고, 아예 그냥 터뜨려서 온 내장을 방 안에 흩뿌려 놓아도
망할놈의 개들이 집에 들어왔나, 하는 놈인 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따로 살던 잭의 두 딸이 명절을 맞아서 집에 찾아온다고 해.
여기서 이야기가 재밌어지는 거지.
이 이야기는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파우스트]를 참조하는 것일까?
악마와의 계약이나 대결에 관한 내용은 꼭 원전이 파우스트 박사의 전설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여하튼 저렇네.
그런데 야터링도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니고, 잭도 파우스트가 아니지.
굉장히 질 낮은 버전의 파우스트인 셈이고, 그래서 소극이 되는 거겠지.
가볍게 읽기 좋은 단편이야.
[Pig Blood Blues]
소년원에 새로 부임한 전임 경찰 레드먼이 주인공이야. 새로 부임은 했는데,
기존에 있던 직원들은 묘하게 불친절하고, 소년원이니 만큼 껄렁거리는 애새끼들 틈바구니에서,
유약한 녀석을 발견하고, 이 녀석을 도와야겠다고 맘을 먹는데, 뭐.... 기묘한 분위기, 음모가 있었던 거지.
이 소년원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
상황의 설정이나 내용의 전개가 너무 전형적이어서 80-90년대의 평범한 스릴러/공포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어.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도 결말부가 조금 아리송한데,
대체 왜 그런 전개가 되는 건지 나로서는 파악이 안되더라고;
분위기는 나름 괜찮고, 내용의 전개도 속도감 있어서 나름 재밌게는 읽었지만.
할 말이 많지 않네.
[Sex, Death, and Starshine]
아... 이 단편은 정말 좋았어.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공연하려는 소도시의 극장 이야기야,
특히 그 극의 감독이 주인공인데. 성이 캘로웨이 같은데 이름이 기억 안나네.
굳이 따지면 이 이야기는 반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나름대로 예술을 하려는 사람이 현실 앞에서 겪는 지지부진한 엿같음? 비슷한 거야.
이 감독은 나름대로 뭔가 해보고 싶은데
극장주는 돈만 밝히는 놈이고 연기자들은 형편없고, 자기 잘난 맛만 알고,
결정적으로 여주인공 비올라를 맡게 된 여배우는 그야말로 형편없다는 말도 부족한데
왕년의 드라마 스타인 것 플러스 자기 좆을 빨아주는 여자라 이게 진퇴양난인 거지.
예술적으로 완성도있는 작품을 상연하고 싶은 마음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거야.
여기서 리치필드라는 인물이 등장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 인물은 대뜸 '오직 예술'을 설파하는 거지.
본인은 예전 이 극장에 관계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번 상연이 이 극장의 마지막이 될 거란
정보를 접수했다는 거지. 그래서, 자기가 아끼던 극장의 마지막 공연이 그런 여배우로 엉망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자기 부인인 콘스탄치아가 그야말로 완벽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해.
이게 중반부까지는 무미건조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다가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제법 환상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소설이거든.
결론적으로는 이 이야기는 유령 극단의 이야기가 되는데,
걸어다니는 시체가 되어버린 인물들이 그럼에도 '우리는 삶을 연기하지!'라며 끝을 맺는 장면이
꽤 재미있더라고. '연극'이라는 단편의 주 소재와 맞물려서.
인간이 아닌데 인간인 척 하는 존재들을 그림으로써 도리어 '인간'이 무엇인지를 좀 보여주는 느낌?
[In the Hills, the Cities]
이 단편은 유고슬라비아 지방을 여행하던 한 커플이 겪는 이야기야.
이 둘은 남자, 게이 커플인데, 뭐 그게 엄청 이야기에 중요한 건 아니고.
지도에도 없는 희한한 곳으로 잘못 들어온 이들이 맞닥뜨리게 된 건....
어마어마한 참극이었던 거지.
이게 스포일러를 안치고서는 내용을 설명하기가 어렵네;
여하간 이 이야기에서 정말 흥미로운 건
내용의 주 소재가 되는 어떤 존재(?)인데
방금도 위에서 썼듯이 인간 아닌 것이 인간으로 화하는 과정...이겠지, 이것도.
그 상상력 자체가 놀랄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
그리고 그게 잘못되면서 벌어진 아수라장 또한... 그정도로 대규모 인명피해가
악의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전개는 묘한 비틀어짐이 있는 거지.
보통은 그런 참극의 묘사는 어떤 악마성을 전제하거든. 뭐, 히틀러라던가.
혹자는 말도 안된다고 하겠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여하간 그 상상력의 크기라는 점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단편이네.
이 단편 초반부에는 질펀한 게이 섹스의 묘사가 아주 쬐끔 등장하는데
으....; 서로 키스를 나누며 잡잘한 정액의 맛을 느꼈다느니 하는 글귀를 읽고 있노라면
작가는 자기가 쓰는 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거거든.
클라이브 바커는 게이란 말이야. 본인의 체험이 반영되지 않았을 것 같지 않단 말이지.
으....;
사실 2권까지는 읽어서 쓰는 김에 2권도 쓰려했는데 지친다;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도 많았는데 어째 쓰면서 지치니 그게 다 나오지도 않네
여튼 2권은 다음에 다른 글을 쓰기로 하고....
스압글인데 혹시 읽어준 형들 있으면 감사감사
20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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