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Springfield Hypocrisy 스프링필드의 가식
저자는 Jason Holt야. 이름 멋있는데? 매니토바 대학의 강사래.
hypocrisy는 사전엔 위선이라고 돼있지만 그냥 저렇게 옮겨봤어.
거짓된 외관이라는 의미는 통하고 꼭 '선'을 가장하지만은 않는다는 느낌이라.
저자는 위검 서장을 통해 가식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논해보고 싶다고 말해.
그렇게 함으로써 가식에도 나름대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만한 구석이 있다는 걸 밝혀보겠대.
여기서 좀 웃기는 (그리고 짜증나는) 건 종래의 철학자들은 이 '가식'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저자의 주장이야. 지린내나는 양념 칠 시간에 그냥 자기 논의나 제대로 풀어낼 것이지...
여하간 저자는 가식을 "어떤이가 자기 말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해. 언행불일치지.
가식은 거짓이나 오류와는 다른 개념인데 그것은 사실과 관계하지 않고 당위와 관계하기 때문이야.
"저기에 고양이가 있다"고 내가 말하고 거기 고양이가 없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거나 제대로 몰랐던 거지만
"콩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해놓고 내가 콩을 먹는다면 그건 가식인 거지.
그러고는 심슨 가족에서 어떤 에피소드의 어떤 인물의 어떤 행동이 가식이 되는지 하나하나 논해.
얼마나 지리해? 그냥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뿐인 것을... 해석조차도 아냐 이건.
여하간 "Mr. Lisa Goes to Washington"에서의 국회의원을 거론하고...
"Homer Alone"에서 큄비 시장의 이중 가식을 폭로해. 마지 심슨이 저지른 범죄를 기소하게 되면
여성 표가 줄게 될 거라며 그녀를 사면해 주겠다는 결정에서 그는
법을 어기는 셈이면서 동시에 여성 인권을 지키는 척을 한다는 의미에서 두 번 가식적인 거지.
비록 법이나 여성 인권을 지킨다고 그가 명시적으로 선언한 적은 없지만,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은연중에 그런 동의를 내포했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는 스키너 교장이나 교사 크래바플 여사도 가식적인 인물들이 되는 거지.
교육자의 자리에 있지만 그것에 걸맞지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으니까...
번즈 사장은 어떨까? 그는 적어도 가식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아. 그는 탐욕적이고, 그 탐욕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그러나 "The Old Man and the Lisa"를 보면 그는 환경주의자로서 수산물들을 '재활용'하고,
"Mother Simpson'에서 카메라 앞에서 쓰레기를 수거하는 척 하다가 카메라가 물러나자 도구들을 집어 던지고,
"Mountain of Madness"에서 팀워크를 강조하는 연설을 해놓고 도보 경주에서 전동차를 꺼내들지.
혹은 종교적인 가식은 어떤가?
러브조이 목사가 그다지 신실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여러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지.
저자는 몰리에르의 [타르튀프]를 인용해. 물론 러브조이 목사가 타르튀프는 아니지만(그렇다면 왜 인용을 하고 앉았는지?).
그렇다면 미겔 데 우나무노의 [착하신 성 마누엘]을 인용해봄직 할 수도 있는 모양이지?
돈 마누엘은 신앙을 잃었지만, 신도들을 위해서 목회자의 역할은 꾸준히 행해 나가는 인물이야.
이건 가식은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해. 신심은 잃었더라도 주위 사람들을 위한다는 마음을 곧대로 행하는 거니까.
저자에 따르면 종래 철학자들이 가식을 이해하는 방식은 항상 어떤 꾸밈 정도였다고 해. 즉 일종의 거짓말이라는 거지.
그렇게 함으로써 악행이 덜 악해보이게 되고, 의심을 부를만한 요소를 제거하는 두 가지의 효과가 있대.
그러나 인간은 항상 어떤 의도를 지닌 것만은 아니야. 소위 무의식적인 요소를 말하고 싶은 건가?
혹은 위의 돈 마누엘의 경우처럼, 꼭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가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해.
이런 잘못된 이해는 어디서 유래할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hypocrisy는 법률용어라기 보다는 드라마의 기법이었대.
그러다가 중세에 들어 단어의 적용이 거짓된 가치를 가장하는 행위에 붙게 되었다는 거지.
허나 현대에 들어서는 가식에 반드시 행위자가 마음 속의 가치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니래(아니 왜 갑자기?;).
그러므로 가식이 반드시 기만적이라는 정의는 시대착오적이라는 거야.
위검 서장은 무능한 경찰이고, 부패한 경찰이기도 해.
봉사하고 보호한다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기만을 위한다는 점은 가식적인 셈이지. 그러나 기만적인 건 아니래.
우리는 문학에서 교묘한 가식들을 접하지만 이런 일상적 맥락에서 보는 가식이 더 의미있을 수 있다느니... 주저리주저리.
내가 왜 이딴 걸 읽고 정리하느라 시간을 버려야 되는 건지 좀 회의가 많이 드는군;
13. Enjoying the So-called "Iced Cream" 소위 "얼은 보숭이"를 즐기기
Daniel Barwick이 저자야. 저자 프로필 작성은 그만 해야겠다. 귀찮고 의미도 없네.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려는 바는 간단해. 번즈 사장이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거머쥘 수 없다는 거지.
스프링필드의 최고 부자에 최고 권력자인 번즈 사장이 왜?
(벌써부터 뻔한 느낌이 막 들지?)
첫째는 그의 욕심의 크기가 너무 크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는 모든 것을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판단함이야. 지금, 여기를 즐길 능력이 없는 것.
셋째는 그의 '상징주의'야. 그런 추상화가 극으로 치달으면 현실이 무마되어 버린다는 거지.
저자는 여기서 사탄의 일화를 소개해.
사탄은 인간세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회의를 주재했대.
별의 별 계획이 나왔지만 그저 하품만 하다 결국 화를 억누르지 못했던 사탄인데,
한 하급 악마가 자기 계획을 소개하자 눈빛을 반짝거리며 기쁨의 신음을 참지 못하지.
인간이 개개의 구체적 사물을 접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신선함을 갈취하지 못하는 것이
현 지옥이 처한 문제라면, 인간의 비인간화는 그 사이를 괴리시키는 데서 가능하리라는 거야.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라고 사탄이 물어. 현대 사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주의적인 사회인 걸. 그 이전까지는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하수인이 씨익 웃지. 물질적으로 물질을 빼앗자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물질을 그 자체로
접하지 못하도록 유리시키는 것이 자기들의 작업이 될 거라고.
저자는 "Team Homer"를 인용해.
번즈 사장은 호머의 볼링 팀에 자진해서 입단하지만,
볼링 팀이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거머쥐자마자 트로피를 빼앗고 팀을 탈퇴하지.
그에게는 볼링의 즐거움도, 동료애도, 경기 끝의 맥주 한 잔도 즐거운 것이 아닌
'승리'를 위한 과정, 추상적인 지나감에 불과했던 거지.
애초에 그가 입단을 하면서 했던 말도 "젊은이들이 쓰러진 적을 모욕하는 것을 보니 활기가 솟는구만"이었지.
그에게는 1번 에세이에서 논의되었던 것과 같은 호머 심슨의 삶을 즐기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어.
번즈 사장에게는 삶이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것이 되는 과정일 뿐이고,
그 과정은 즐겨야 될 필요가 없는 것이 되는 거야.
뭐 뒤로도 논의가 대충은 이어지는데, 내재적 좋음과 도구적 좋음이니 뭐니 하면서.
별로 큰 의미는 없는 듯 하네.
요는 인생을 진짜 즐기려면 한 번은 멈춰 서서, 삶을 음미 해봐라 정도인 듯.
시작부터 대충 감은 왔지만 정말 하품 나오는 에세이지?
그래도 인간의 불행이 어떤 상징체계에서 기인한다는 고찰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언어를 쓴다는 점에서 인간은 상징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14. Hey-diddily-ho Neighboreenos 안녕하신가, 이웃사촌
David Vessey가 저자네.
마태복음 19:19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있는데,
네드 플랜더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이 문구를 금과옥조로 여길 거야.
"Home Sweet Homediddly-Dum-Doodily" 에피소드에서 네드는 심슨가 아이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단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에 충격을 받아. 그래서 자기가 직접 세례를 시행하기로 해. 결국 호머가 그것을 막고 자기가 대신 세례를 받게 되지만;
저자가 여기서 끄집어 내려는 논의점은 네드 플랜더스가 정말 독실한 기독교도이고,
저 금언을 그래서 지켜야 된다면, 왜 이후 에피소드에서는 심슨가에 전도나 세례를 시도하지 않냐는 거야.
제법 흥미로운 관점이지만, 조금 지리멸렬한 것도 사실이지. 대답은 꽤 뻔하니까. 심슨이 에피소드식 시트콤이라는 것.
그러나 그런 간단한 대답을 기각하고 나서라면 대체 어떤 대답이 가능한 것일까?
이 에세이가 흥미로웠던 점은 물음 자체도 있지만 그걸 풀어나가는 과정이 제법 정치해 보였다는 거였어.
가능한 대답들을 열거하면서 하나하나 따져나가는 전개를 보여주거든.
그러다보니 이건 읽기에 재미없지는 않은데 결과적으로 사실 심슨 가족에 연관한 에세이는 좀 못 되었지.
그냥... 심슨 가족의 한 장면을 가지고 지적인 유희를 풀어놓은 결과물이라는 인상이라고 할까.
논의 과정을 전부 옮기려면 나도 귀찮으니 결론부터 대충 말해 볼게.
저자는 칸트의 윤리학을 인용해서 네드의 윤리적 입장이 심슨 가족에게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에도
만일 심슨 가족의 삶이 자율성을 띠고 있다면 네드가 그것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검토해.
심슨 가족이 자율적이기 힘들고, 네드 플랜더스가 근본주의적 기독교도를 풍자하는 캐릭터임을 감안하면 이런
결론조차 사실은 그렇게 심슨 가족에 제대로 기반한 에세이는 아닌 셈이지...
별로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은 많지 않지만 읽기엔 나쁘지는 않았던 듯.
15. The Function of Fiction 이야기의 기능
저자는 Jennifer L. McMahon이야. 맥마흔? ㄷㄷ
소위 문학 무용론은 시인의 추방을 말했던 플라톤부터 연원하는 오래 된 관념인데,
저자는 심슨 가족이 교육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해.
문학의 가치를 주장하는 철학적 논의들이 근자에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데, 저자는
마사 너스바움의 작업을 참조하려고 해. 특히 [Love's Knowledge]를 참조한다는데, 사랑의 지식인가?
문학이 무용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야.
하나는 문학이 현실을 그다지 제대로 반영하지 못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으로써 인간이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야.
너스바움은 위의 저서에서 이 둘을 모두 반박하려고 해.
너스바움에 따르면 "서사 예술가의 언어와 형식으로써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인생의 진리가 있"대.
왜냐하면 "세계의 놀라운 다양성과 복잡성, 신비함, 그 불완전한 아름다움은 오직 그 자신 더 복잡하고 미묘하며
구체성에 주의를 집중하는 언어와 형식으로써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야.
더하여 그녀는 감정이 이성을 해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감정은 맹목적인 반응들의 날뜀이 아니고 사물들이 어떠하며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신념과 밀접히 관련하는 분별 있는 응답"이라는 대답을 하였대.
너스바움의 문학을 위한 변론은 종래의 철학적 산문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
철학자들은 문학의 언어는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부적합하다고 보았던 반면
동시에 자신들이 쓰는 표현은 사물의 본질을 전달하기 적당한 이상적 형태로 보았다는 거야.
그러나 너스바움은 이 부분을 공박하는데 그녀에 따르면 철학적 산문은 추상성으로 나아가려는 경향과
감정을 희생하고 이성을 특권적인 위치에 놓았기 때문에 그 한계가 뚜렷하다는 거지.
우리가 사는 현실은 구체적이고, 복잡하며, 감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을 추상적이고 감정이 결여된 언어를 가지고 기술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어.
특히 철학적 산문은 우리가 맞닥뜨리는 도덕적 상황을 기술하는 데 특히 부적합한데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못 묘사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잘못된 이해를 부추긴다는 거야.
그리하여 도덕철학과 도덕 교육에 있어 문학은 근본적인 보조재가 된다고 했대.
우리가 처한 도덕적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모호하기 때문에,
이것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자잘한 세부사항에 집중하고, 복잡성을 뭉개지 않으며,
사실뿐 아니라 우리의 느낌까지 모두 표현하는 양식을 이용해야만 해. 그게 문학인 거지.
더하여 개개인이 도덕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습관과 감수성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문학을 읽음으로서 그러한 도덕적 습관과 감수성을 습득하게 된다는 거야.
독자는 감정의 다양한 종류와 그 영향들을 보면서 우리의 삶에서 감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고
어떤 특정한 감정이 존재하거나 부재할 때 어떤 지적, 윤리적 결과가 초래되는지 볼 수 있게 된대.
더하여 문학은 너스바움이 "공감의 형성shaping of sympathy"이라고 부른 것을 일깨우는데
그녀는 우리가 허구적 인물을 보면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고 주장했대.
그런데 저자는 몇 가지 이유로 너스바움의 입장에 모두 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데
하나는 너스바움의 논의가 말하는 '문학'은 서구의 소설 및 희곡 등의 소위 '정전'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는 점이야.
어쨌든 심슨 가족같은 프로그램의 교육적 가치를 말하려는 저자로서는 은연중에 드러나는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런 류의 엘리트주의적 태도는 기각할 필요가 있겠지.
더하여 문학을 옹호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문학이 우리의 지성과 감정을 왜곡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걸 이상하게도 외면해.
어떤 문학 텍스트들은 우리에게 무지와 도덕적 타락을 배양하기도 하거든.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긍정적이기로 되어있는) '문학' 일반을 독자 개개인이 접하는 게 아니고,
각각의 문학 작품을 개개인이 접하게 되기 때문이야. 그 개개의 작품들은 말하자면 이 세계에 관한 오류를 전달할 수도 있지.
바로 이 점이 플라톤부터 이어지던 문학 무용론의 근거였겠고.
마지막으로 너스바움은 문학을 적확한 현실표현과 공감의 배양으로 상찬하려 하지만,
우리가 문학을 접하고 즐기는 것에는 다른 이유와 근거도 있어. 저자는 그걸 동일시라고 제시해.
문학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면 그건 이러한 동일시에서 오는 효과도 작지 않으리라는 거지.
오히려 이러한 동일시의 힘으로 인하여 우리는 몰입되고, 그 세계에 우리 자신을 투영시키게 돼.
문학의 긍정적인 효과들은 한낱 관찰이 아닌 동일시의 상상력을 통해 가능한 거야.
더하여 허구의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우리는 소위 간접 경험을 하게 돼.
남의 입장이 되어 보는 거지. 역지사지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거야.
결정적으로 감정적인 교육에 있어서도 이 동일시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해.
음... 개인적으로는 너스바움의 입장을 일종의 관찰자적인 것으로 두고 자신은 동일시가 더 적확하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태도는 조금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해. 내가 너스바움의 저서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왠지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거기에 '너스바움'이라고 쓴 뒤 툭툭 때리면서 "하하 너스바움을 공박한다!"하는 느낌?
저자는 허구적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하는 독자의 입장에 하나의 역설이 있음을 인정해.
그것은 허구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기껍게 자신을 대입하고, 상상적인 동일시를 할 수 있지만,
우리가 몰입 하면 할수록 태생적인 한계를 느끼게 되거든.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독자는 독자대로,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그 분리를 깨뜨릴 수는 없거든.
우리는 이야기와 인물에 몰입하고, 공감하지만, 그 상황을 바꿀 수가 없어.
그런데 이러한 전능을 결여한 전지가 주는 좌절감이 오히려 긍정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해.
허구적 세계와 인물에 대한, 나아가 우리의 현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나?
심슨 가족을 걸어놓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꽤 길게도 하지?
에세이의 말미에 드디어 어쨌든 구색은 맞춰야 된다는 의무감에 의함인지
저자는 그래서 이런 논의가 심슨 가족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일지 논해.
그래서 심슨 가족이 교육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냐 이거야.
하나는 심슨이 대단히 평범한 풍경을 묘사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거야.
그 평범성이 우리에게 동일시를 용이하게 해 준다는 거지. 공감하기 쉽다는 거야.
더하여 심슨 가족이 유머가 넘치는 프로그램이라는 점도 중요하대.
우리가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결점들이나 혹은 무겁거나 불편한 주제를 더 쉽게 직시하게 해 주기 때문이야.
또한 애니메이션의 형식이 우리에게 심슨 가족을 좀 더 가볍게 접하게 만들어주고,
마지막으로 심슨 가족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라는 점도 중요하다고 해.
이 에세이는 요즘 알음알음 소개되고 있는 너스바움을 인용한다는 점이 조금 구미를 자극했지.
내용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오히려 조금 실망스럽다면 실망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심슨 가족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게 자꾸 엿보여서 그닥 즐거운 독서는 못 되었던 셈이지 싶네.
이제 4장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엔 세 에세이가 실려 있어.
장의 제목은 The Simpsons and the Philosophers야.
심슨 가족과 철학자의 작업을 곧바로 연결시켜 보겠다는 기획인 거지.
16. A (Karl, not Groucho) Marxist in Springfield 스프링필드의 (그루초 말고 칼) 마르크시스트
저자는 James M. Wallace야.
그루초 맑스는 30년대 유명했던 코미디 작가/배우들인 맑스 형제의 맏이인데,
뭐 악명높은(?) 인물과 같은 성씨를 갖고 있는 유명인들이다 보니 저런 제목을 써서 익살을 부려 본 거겠지.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심슨 가족을 살펴보겠다는 기획인데,
조금 우려될 수는 있지. 심슨 가족은 기본적으로 미국적 토양 위에서 가장 좌측으로 봐줘도 리버럴한 프로그램이니까,
이걸 마르크스주의 정도 되는 좌측에서 보려는 시도는 결국 이죽거리는 비판이거나, 아예 기각하는 제스쳐이기 쉬울 것 같거든.
이런 현대 미국 대중문화의 첨병같은 프로그램을 마르크스주의자가 옹호하기는 어려운 것 아니겠어?
그런데 저자의 전략은 좀 화가 날 정도로 단순해.
심슨 가족의 '전복적'인 면에 주목해 보자는 거야.
얼마나 심슨 가족에서 그런 전복적인 장면들이 나왔는지 몇 장 인용이 이어지고,
마르크스주의가 스프링필드에서 그닥 환영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근거가 될만한 장면이 또 몇 인용되지.
음... 이 에세이는 더 정리를 못하겠다.
애초에 기획이 잘못됐어.
내가 시큰둥하게 읽느라 건진 게 없었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이건 속류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도 아닌 걸 가지고
글을 기획하고, 쓰고 있다는 인상밖에는 안 드네.
개인적으로는 "Last Exit to Springfield"에피소드가
스프링필드 핵발전소의 파업투쟁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뭐... 그럭저럭 재미있는 논의거리가 될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17. "And the Rest Writes Itself" "나머지는 저절로 써지는구만"
David L. G. Arnold가 저자야.
이 에세이의 기획은 대강 이래. 롤랑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텔레비전 및 지면의 광고나 쇼 등을 분석한 일이 있지.
그걸 참조해서 심슨 가족에도 비슷한 걸 해보겠다는 거야.
롤랑 바르트 얘기를 하려면 구조주의 얘기를 조금이라도 꺼내야 되는 모양이지
구조주의의 개괄적인 역사에 대한 소개가 이어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얘기라던가, 소쉬르 얘기라던가.
구조주의의 옹호자들은 문학비평에서의 주관성subjectivity나 인상주의 비평 등을 비판했고,
이항대립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정치적, 텍스트적 짜임 등을 살펴보려 했다는 내용이 나오네.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구분도 나오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기표란 언어나 이미지 등을 일컫고
기의는 그런 언어나 이미지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의미해. '사과'라는 단어는 기표이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빨간 사과가 기의겠지.
이 두 개념은 기표/기의, 시니피앙/시니피에, 능기/소기 등으로 일컬어지는데
개인적으로는 처음에는 너무 헷갈리더라고. 닥치고 외우면 될 일이라면 될 일이었지만;
아마도 signify라는 말은 '기호로 표현하다' 정도의 의미인 셈이겠지?
그러니 signifier는 '표현하는 것'이고 signified는 수동태로서 '표현되는 것'인 거고.
개인적으로는 시니피앙/시니피에 쌍이 구분하기 되게 헷갈렸는데 signified의 '-ed'로 '에'를 연결시켜서 외웠던 기억이 난다 ㅋㅋ
소쉬르에 따르면 기표/기의의 개념쌍이 언어에 적용되는데 그 연결이 자의적이라면
(사과는 '사과', 'apple', 'りんご', 'der Apfel', 'la pomme'...로 표현되지. 기표와 기의의 연결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어.)
사진이나 그림 등의 도상은 그것과 소위 기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보인다고 했대.
이를 도상적iconic 혹은 동기유발적motivated이라고 했다고?
바르트는 [이미지의 수사학]라는 글에서 파스타 광고의 사진을 가지고 이미지에
'외연적denotative'측면과 '함축적connotative'측면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대.
이미지를 읽어내는 일은 이미지가 음소의 조합(문자 언어라던가)이 아닌
명백한 유사에 기반을 둔 표현이기 때문에 어려울 수 있다고 했나봐.
우리가 사진을 보면 우리는 그게 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지. 이게 이미지의 외연적 측면이래.
그런데 바르트는 "우리는 결코 (적어도 광고에서는) 자연스러운 상태의 이미지를 보지 않"는다고 주장했대.
이런 맥락에서는 어떤 사진이나 그림도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섞여 있지 않을 수는 없다는 거야.
그 의도가 이미지의 함축적 측면이라고 했대.
예시가 된 장바구니에 담긴 파스타의 사진에서 바르트는
피망, 신선한 토마토, 마늘 등을 보고 '이탈리아 느낌'의 외연을 읽어냈대.
그리고 이는 파스타 브랜드를 선택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일 수 있어.
더하여 고객에게 즐겁고 풍요로운 가정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놓은 물건들의 평범한 상태가 일종의 풍부함을 암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그러하므로 사진 이미지는 어떤 역설적인 성격을 품고 있는데
그 기의? 대상?과의 유사성 때문에 사진은 "코드 없는 메세지"를 구성하는 것 같다는 거야.
언어는 우리가 배워서 알기 때문에 문자 언어를 보고 그것을 해석해내는 것이지만,
사진은 그게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는 거지.
사진으로 전달되는 메세지는 그것이 조직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사진 이미지들이 어떤 조작의 산물이고,
어떤 메세지를 제공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살펴보아야 된다는 결론이야.
심슨 가족과 이러한 논의를 연결시키기 전에, 저자는 바르트의 논의를 한 꼭지 더 인용해.
바르트는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의 영상은 사진과는 또 다를 수 있는데,
어떤 서사를 다루기 위한 양식, 즉 관습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그러하대. 자연스러움이 덜 할 수 있다는 거지.
애니메이션은 심지어 이런 양식성이 더하지. 그럼에도 어떤 그럴싸함verisimilitude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니까.
논의를 이어나가도 무방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해.
저자는 이제 "The Front"에피소드를 참조하면서 여기서 어떤 이항대립을 확인할 수 있는지 보려고 해.
갑자기 단순한 논의가 되어버리네; 구조주의 얘기를 한 김이니 이렇게 편하게 페이지를 채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일가?
이런 저런 내용들을 나열하는데 입맛을 돋우는 건 그닥 아니었고
그나마 현명한 연장자와 어리석은 젊은이의 대립이 아이러니하게 어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이게 나름 흥미로운 지적이기는 한 것 같네.
저자는 심슨 가족을 포함한 애니메이션들의 '기표'가 관습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풍자에 무게를 더한다고 설명해. 위에 인용된 에피소드에서 할아버지 심슨은 바지도 안 벗고
자기 팬티를 꺼내 보여주는데, 이런 장면이나, 마지 심슨의 머리스타일, 캐릭터들의 노란 피부 등이
이것이 '기표'임을 시청자들에게 계속 재확인 시켜준다는 거야.
여기서 [S/Z]를 인용하네. 소위 '정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독자적readerly' 텍스트이지만
이에 반대되는 '저자적writerly' 텍스트도 있다고.
심슨 가족은 그 중구난방의 구성이 이러한 읽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텍스트다... 뭐 그런 결론인 듯하네.
나름대로 논의들이 있는데 정리하기가 조금 귀찮다;
다만 여기서 내가 조금 의아한 건 저러한 구분이 정말 그런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일종의 방법론적인 구분을 이야기했던 거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는 거야. 애초에 [사라진느]도 일종의 정전 아닌가?
그러면 저렇게 바르트를 인용하고 나서 심슨 가족을 애써서 상찬하는 게 조금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모르겠네. 내가 바르트를 읽어본 적이 없으니. 아, 있긴 한데 뭐... 깜냥이 안돼서 별로 남는 건 없었으니;
18. What Bart Calls Thinking 바트가 사유라 부르는 것
Kelly Dean Jolley가 저자네. 성이 재밌다. jolly good show!
제목의 번역이 애매한데, 이 에세이가 하이데거를 다루기 때문에, 더하여 철학적 지평이 있다보니 '사유'라는 단어를 썼지만
글쎄, 내가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지만 'thinking'은 그것보다는 좀 더 일상적인 단어일 것 같거든.
어느 맥락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의 폭이 달라질 뿐인? 바트 심슨도 'thinking'정도는 말할 수 있는 건데
굳이 '사유'라고 옮겨버리면 바트 심슨같은 평범한 어린 아이가 말할 단어는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이 에세이는 하이데거의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자답과 바트 심슨을 연결해 보겠다는 기획인데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나 글이 있는 모양이지? 저자는 먼저 거기에 나온 나무를 설명해 보겠대.
다른 사상가들이라면 이 나무를 어떻게 보았을지를 설명하면서 하이데거의 입장을 구체화 보려 하는데
쇼펜하우어나 프레게 등의 사상가들이 다루어지네.
개인적으로는 하이데거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아주 큰 관심이 없어서
이 글은 뭘 말하려는지 아주 와닿지가 않았네. 의인화된 형태가 아닌 현상으로서의 현상을 보려 했다느니
대충 그런 이야기가 실려 있는듯은 한데...
결론도 심지어 바트는 하이데거적 세계관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니 뭐... 김만 팍팍 새지.
그냥 하이데거 얘기좀 풀어보고 싶었던 거지;
그러니 나로서는 유의미한 글은 아니었음.
하이고 읽기는 후루룩 읽었는데 글을 쓴다고
계획에도 없던 2회독을 했네 사실상; 맙소사;
여하간 심슨 가족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사실 구글링만 해도 훨씬 영양가있는 글들을 더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 책의 의미는 출간된 시기에 있고, 책의 형태이다 보니 외국인인 내가 접하기가 조금 더 용이했다는 데 있었겠지.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으니...
여하간 첫 번째 글에서도 밝힌 대로 굳이 남한테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니지 싶네.
혹여 이 책에 관심있었던 사람은 내가 내용 정리까지 대충 한 셈이니 차라리 내 글을 보고 손 털면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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