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5일 목요일

장승진·Paul J. Lee, 나는 더 영어답게 말하고 싶다 일상회화편

지금까지 이 시리즈는 네 권이 나왔는데 사실 이게 첫 번째 권이야.
저번에 읽었던 건 두 번째로 나온 책인데 뭐... 이제 두권째니 다른 것들도 바지런히 읽어야지.
어차피 3-4회독은 기본으로 할 생각들인 책이라, 지금 계획은 4권까지 2회독씩 하고 다시 2회독씩 순회하는 건데...
여튼 이 책도 어제부로 일단 2회독 완료!

비즈니스편과 비교해서 바로 느껴지는 차이는 이 책은 종이 질이 조금 나쁘다는 거야.
사실 나로선 오히려 이편이 낫기는 해.
비즈니스편은 쓸데없이 종이 질이 좋아서 무겁고 형광펜도 잘 안먹고 해서 별로였거든.

비즈니스편과 비교해서 예문이 조금 빈약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네.
이 부분은 부연이 필요한데, 이 시리즈의 구성은 표제가 되는 표현이 있고
그 표현을 쓴 대화를 하나 제시해 주고
바로 그 아래에 한번 더 한국인이 쓸법한 표현 하나와 표제어로 표현한 표현을 대비하는 단락이 하나 더 있거든.
이렇게 표현하고 싶겠지만 이 아래 표현이 더 살아 있는 표현입니다~ 하는 거지.
근데 이 두 번째 예문 상자가 비즈니스편은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서 제시해주는 편이었는데
여기서는 그냥 위의 예문을 다시 써넣었더라고. 이 책이 첫 권이라는 걸 감안하면 일종의 시행착오 과정이겠지만,
눈에 밟히는 건 사실이네. 기왕인데 하나라도 더 다양한 예문을 읽는 게 이득이니까.

더하여 173쪽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어.
You've got to bite the bullet for a couple of years until you get admitted to a prestigious university.
그런데 189쪽에 보면
You've got to buckle down for a couple of years until you get admitted to a prestigious university.
띠용? 이런 식으로 예문이 중심 표현 하나만 차이가 나게 똑같아버리면 글쎄... 이건 저자의 무성의라고 해석하게 되거든.
이런 류의 책을 읽는다는 건 표현을 습득하고, 다양한 예문으로 그걸 익히는 과정이라는 걸 감안하면 말야.

이건 트집잡기 수준이긴 하지만
단어나 표현의 발음 등을 잡아주지 못한 것도 조금은 정성이 아쉽다는 느낌은 있네. 이건 다른 권들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예를 들어 prioritize라는 단어가 나오는 부분이 있었는데
요거는 강세가 o에 있거든. 혹시나 해서 찾아본건데, 그러기 전엔 맨 앞 i에 강세를 두고 읽었었지.
prior에서 파생되었다는 기분이 있다보니까.
'말하기'를 가르치려는 책에서 이런 부분을 놓쳤다는 건 조금은 아쉽긴 해.
다만 그렇게 도탑거나 자세하게 파고드는 타입의 책도 아닌데
일일이 발음까지 명시해줄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만은 하지 사실.

재미있다고 느꼈던 건
ahead of the curve나
chips are down같은 표현이었는데
이거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썼던 표현이거든.
혼자 히죽 웃었지 ㅋㅋㅋㅋ 뭐... 책이 확실히 제목대로 영어다운 표현들을 싣고 있구나, 하는 신뢰도 새삼 갔고.

여하간 영어회화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관심 가져도 괜춘할듯.

2017년 5월 24일 수요일

The Simpsons and Philosophy (3)

12. Springfield Hypocrisy 스프링필드의 가식
저자는 Jason Holt야. 이름 멋있는데? 매니토바 대학의 강사래.
hypocrisy는 사전엔 위선이라고 돼있지만 그냥 저렇게 옮겨봤어.
거짓된 외관이라는 의미는 통하고 꼭 '선'을 가장하지만은 않는다는 느낌이라.

저자는 위검 서장을 통해 가식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논해보고 싶다고 말해.
그렇게 함으로써 가식에도 나름대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만한 구석이 있다는 걸 밝혀보겠대.
여기서 좀 웃기는 (그리고 짜증나는) 건 종래의 철학자들은 이 '가식'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저자의 주장이야. 지린내나는 양념 칠 시간에 그냥 자기 논의나 제대로 풀어낼 것이지...
여하간 저자는 가식을 "어떤이가 자기 말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해. 언행불일치지.
가식은 거짓이나 오류와는 다른 개념인데 그것은 사실과 관계하지 않고 당위와 관계하기 때문이야.
"저기에 고양이가 있다"고 내가 말하고 거기 고양이가 없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거나 제대로 몰랐던 거지만
"콩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해놓고 내가 콩을 먹는다면 그건 가식인 거지.

그러고는 심슨 가족에서 어떤 에피소드의 어떤 인물의 어떤 행동이 가식이 되는지 하나하나 논해.
얼마나 지리해? 그냥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뿐인 것을... 해석조차도 아냐 이건.
여하간 "Mr. Lisa Goes to Washington"에서의 국회의원을 거론하고...
"Homer Alone"에서 큄비 시장의 이중 가식을 폭로해. 마지 심슨이 저지른 범죄를 기소하게 되면
여성 표가 줄게 될 거라며 그녀를 사면해 주겠다는 결정에서 그는
법을 어기는 셈이면서 동시에 여성 인권을 지키는 척을 한다는 의미에서 두 번 가식적인 거지.
비록 법이나 여성 인권을 지킨다고 그가 명시적으로 선언한 적은 없지만,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은연중에 그런 동의를 내포했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는 스키너 교장이나 교사 크래바플 여사도 가식적인 인물들이 되는 거지.
교육자의 자리에 있지만 그것에 걸맞지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으니까...

번즈 사장은 어떨까? 그는 적어도 가식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아. 그는 탐욕적이고, 그 탐욕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그러나 "The Old Man and the Lisa"를 보면 그는 환경주의자로서 수산물들을 '재활용'하고,
"Mother Simpson'에서 카메라 앞에서 쓰레기를 수거하는 척 하다가 카메라가 물러나자 도구들을 집어 던지고,
"Mountain of Madness"에서 팀워크를 강조하는 연설을 해놓고 도보 경주에서 전동차를 꺼내들지.

혹은 종교적인 가식은 어떤가?
러브조이 목사가 그다지 신실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여러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지.
저자는 몰리에르의 [타르튀프]를 인용해. 물론 러브조이 목사가 타르튀프는 아니지만(그렇다면 왜 인용을 하고 앉았는지?).
그렇다면 미겔 데 우나무노의 [착하신 성 마누엘]을 인용해봄직 할 수도 있는 모양이지?
돈 마누엘은 신앙을 잃었지만, 신도들을 위해서 목회자의 역할은 꾸준히 행해 나가는 인물이야.
이건 가식은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해. 신심은 잃었더라도 주위 사람들을 위한다는 마음을 곧대로 행하는 거니까.

저자에 따르면 종래 철학자들이 가식을 이해하는 방식은 항상 어떤 꾸밈 정도였다고 해. 즉 일종의 거짓말이라는 거지.
그렇게 함으로써 악행이 덜 악해보이게 되고, 의심을 부를만한 요소를 제거하는 두 가지의 효과가 있대.
그러나 인간은 항상 어떤 의도를 지닌 것만은 아니야. 소위 무의식적인 요소를 말하고 싶은 건가?
혹은 위의 돈 마누엘의 경우처럼, 꼭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가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해.
이런 잘못된 이해는 어디서 유래할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hypocrisy는 법률용어라기 보다는 드라마의 기법이었대.
그러다가 중세에 들어 단어의 적용이 거짓된 가치를 가장하는 행위에 붙게 되었다는 거지.
허나 현대에 들어서는 가식에 반드시 행위자가 마음 속의 가치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니래(아니 왜 갑자기?;).
그러므로 가식이 반드시 기만적이라는 정의는 시대착오적이라는 거야.

위검 서장은 무능한 경찰이고, 부패한 경찰이기도 해.
봉사하고 보호한다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기만을 위한다는 점은 가식적인 셈이지. 그러나 기만적인 건 아니래.
우리는 문학에서 교묘한 가식들을 접하지만 이런 일상적 맥락에서 보는 가식이 더 의미있을 수 있다느니... 주저리주저리.

내가 왜 이딴 걸 읽고 정리하느라 시간을 버려야 되는 건지 좀 회의가 많이 드는군;

13. Enjoying the So-called "Iced Cream" 소위 "얼은 보숭이"를 즐기기
Daniel Barwick이 저자야. 저자 프로필 작성은 그만 해야겠다. 귀찮고 의미도 없네.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려는 바는 간단해. 번즈 사장이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거머쥘 수 없다는 거지.
스프링필드의 최고 부자에 최고 권력자인 번즈 사장이 왜?
(벌써부터 뻔한 느낌이 막 들지?)

첫째는 그의 욕심의 크기가 너무 크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는 모든 것을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판단함이야. 지금, 여기를 즐길 능력이 없는 것.
셋째는 그의 '상징주의'야. 그런 추상화가 극으로 치달으면 현실이 무마되어 버린다는 거지.

저자는 여기서 사탄의 일화를 소개해.
사탄은 인간세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회의를 주재했대.
별의 별 계획이 나왔지만 그저 하품만 하다 결국 화를 억누르지 못했던 사탄인데,
한 하급 악마가 자기 계획을 소개하자 눈빛을 반짝거리며 기쁨의 신음을 참지 못하지.
인간이 개개의 구체적 사물을 접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신선함을 갈취하지 못하는 것이
현 지옥이 처한 문제라면, 인간의 비인간화는 그 사이를 괴리시키는 데서 가능하리라는 거야.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라고 사탄이 물어. 현대 사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주의적인 사회인 걸. 그 이전까지는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하수인이 씨익 웃지. 물질적으로 물질을 빼앗자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물질을 그 자체로
접하지 못하도록 유리시키는 것이 자기들의 작업이 될 거라고.

저자는 "Team Homer"를 인용해.
번즈 사장은 호머의 볼링 팀에 자진해서 입단하지만,
볼링 팀이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거머쥐자마자 트로피를 빼앗고 팀을 탈퇴하지.
그에게는 볼링의 즐거움도, 동료애도, 경기 끝의 맥주 한 잔도 즐거운 것이 아닌
'승리'를 위한 과정, 추상적인 지나감에 불과했던 거지.
애초에 그가 입단을 하면서 했던 말도 "젊은이들이 쓰러진 적을 모욕하는 것을 보니 활기가 솟는구만"이었지.
그에게는 1번 에세이에서 논의되었던 것과 같은 호머 심슨의 삶을 즐기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어.
번즈 사장에게는 삶이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것이 되는 과정일 뿐이고,
그 과정은 즐겨야 될 필요가 없는 것이 되는 거야.

뭐 뒤로도 논의가 대충은 이어지는데, 내재적 좋음과 도구적 좋음이니 뭐니 하면서.
별로 큰 의미는 없는 듯 하네.
요는 인생을 진짜 즐기려면 한 번은 멈춰 서서, 삶을 음미 해봐라 정도인 듯.
시작부터 대충 감은 왔지만 정말 하품 나오는 에세이지?

그래도 인간의 불행이 어떤 상징체계에서 기인한다는 고찰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언어를 쓴다는 점에서 인간은 상징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14. Hey-diddily-ho Neighboreenos 안녕하신가, 이웃사촌
David Vessey가 저자네.

마태복음 19:19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있는데,
네드 플랜더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이 문구를 금과옥조로 여길 거야.

"Home Sweet Homediddly-Dum-Doodily" 에피소드에서 네드는 심슨가 아이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단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에 충격을 받아. 그래서 자기가 직접 세례를 시행하기로 해. 결국 호머가 그것을 막고 자기가 대신 세례를 받게 되지만;
저자가 여기서 끄집어 내려는 논의점은 네드 플랜더스가 정말 독실한 기독교도이고,
저 금언을 그래서 지켜야 된다면, 왜 이후 에피소드에서는 심슨가에 전도나 세례를 시도하지 않냐는 거야.
제법 흥미로운 관점이지만, 조금 지리멸렬한 것도 사실이지. 대답은 꽤 뻔하니까. 심슨이 에피소드식 시트콤이라는 것.
그러나 그런 간단한 대답을 기각하고 나서라면 대체 어떤 대답이 가능한 것일까?

이 에세이가 흥미로웠던 점은 물음 자체도 있지만 그걸 풀어나가는 과정이 제법 정치해 보였다는 거였어.
가능한 대답들을 열거하면서 하나하나 따져나가는 전개를 보여주거든.
그러다보니 이건 읽기에 재미없지는 않은데 결과적으로 사실 심슨 가족에 연관한 에세이는 좀 못 되었지.
그냥... 심슨 가족의 한 장면을 가지고 지적인 유희를 풀어놓은 결과물이라는 인상이라고 할까.

논의 과정을 전부 옮기려면 나도 귀찮으니 결론부터 대충 말해 볼게.

저자는 칸트의 윤리학을 인용해서 네드의 윤리적 입장이 심슨 가족에게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에도
만일 심슨 가족의 삶이 자율성을 띠고 있다면 네드가 그것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검토해.
심슨 가족이 자율적이기 힘들고, 네드 플랜더스가 근본주의적 기독교도를 풍자하는 캐릭터임을 감안하면 이런
결론조차 사실은 그렇게 심슨 가족에 제대로 기반한 에세이는 아닌 셈이지...

별로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은 많지 않지만 읽기엔 나쁘지는 않았던 듯.

15. The Function of Fiction 이야기의 기능
저자는 Jennifer L. McMahon이야. 맥마흔? ㄷㄷ

소위 문학 무용론은 시인의 추방을 말했던 플라톤부터 연원하는 오래 된 관념인데,
저자는 심슨 가족이 교육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해.
문학의 가치를 주장하는 철학적 논의들이 근자에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데, 저자는
마사 너스바움의 작업을 참조하려고 해. 특히 [Love's Knowledge]를 참조한다는데, 사랑의 지식인가?

문학이 무용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야.
하나는 문학이 현실을 그다지 제대로 반영하지 못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으로써 인간이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야.
너스바움은 위의 저서에서 이 둘을 모두 반박하려고 해.

너스바움에 따르면 "서사 예술가의 언어와 형식으로써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인생의 진리가 있"대.
왜냐하면 "세계의 놀라운 다양성과 복잡성, 신비함, 그 불완전한 아름다움은 오직 그 자신 더 복잡하고 미묘하며
구체성에 주의를 집중하는 언어와 형식으로써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야.
더하여 그녀는 감정이 이성을 해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감정은 맹목적인 반응들의 날뜀이 아니고 사물들이 어떠하며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신념과 밀접히 관련하는 분별 있는 응답"이라는 대답을 하였대.

너스바움의 문학을 위한 변론은 종래의 철학적 산문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
철학자들은 문학의 언어는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부적합하다고 보았던 반면
동시에 자신들이 쓰는 표현은 사물의 본질을 전달하기 적당한 이상적 형태로 보았다는 거야.
그러나 너스바움은 이 부분을 공박하는데 그녀에 따르면 철학적 산문은 추상성으로 나아가려는 경향과
감정을 희생하고 이성을 특권적인 위치에 놓았기 때문에 그 한계가 뚜렷하다는 거지.

우리가 사는 현실은 구체적이고, 복잡하며, 감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을 추상적이고 감정이 결여된 언어를 가지고 기술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어.
특히 철학적 산문은 우리가 맞닥뜨리는 도덕적 상황을 기술하는 데 특히 부적합한데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못 묘사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잘못된 이해를 부추긴다는 거야.
그리하여 도덕철학과 도덕 교육에 있어 문학은 근본적인 보조재가 된다고 했대.
우리가 처한 도덕적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모호하기 때문에,
이것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자잘한 세부사항에 집중하고, 복잡성을 뭉개지 않으며,
사실뿐 아니라 우리의 느낌까지 모두 표현하는 양식을 이용해야만 해. 그게 문학인 거지.

더하여 개개인이 도덕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습관과 감수성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문학을 읽음으로서 그러한 도덕적 습관과 감수성을 습득하게 된다는 거야.
독자는 감정의 다양한 종류와 그 영향들을 보면서 우리의 삶에서 감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고
어떤 특정한 감정이 존재하거나 부재할 때 어떤 지적, 윤리적 결과가 초래되는지 볼 수 있게 된대.
더하여 문학은 너스바움이 "공감의 형성shaping of sympathy"이라고 부른 것을 일깨우는데
그녀는 우리가 허구적 인물을 보면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고 주장했대.

그런데 저자는 몇 가지 이유로 너스바움의 입장에 모두 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데
하나는 너스바움의 논의가 말하는 '문학'은 서구의 소설 및 희곡 등의 소위 '정전'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는 점이야.
어쨌든 심슨 가족같은 프로그램의 교육적 가치를 말하려는 저자로서는 은연중에 드러나는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런 류의 엘리트주의적 태도는 기각할 필요가 있겠지.

더하여 문학을 옹호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문학이 우리의 지성과 감정을 왜곡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걸 이상하게도 외면해.
어떤 문학 텍스트들은 우리에게 무지와 도덕적 타락을 배양하기도 하거든.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긍정적이기로 되어있는) '문학' 일반을 독자 개개인이 접하는 게 아니고,
각각의 문학 작품을 개개인이 접하게 되기 때문이야. 그 개개의 작품들은 말하자면 이 세계에 관한 오류를 전달할 수도 있지.
바로 이 점이 플라톤부터 이어지던 문학 무용론의 근거였겠고.

마지막으로 너스바움은 문학을 적확한 현실표현과 공감의 배양으로 상찬하려 하지만,
우리가 문학을 접하고 즐기는 것에는 다른 이유와 근거도 있어. 저자는 그걸 동일시라고 제시해.
문학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면 그건 이러한 동일시에서 오는 효과도 작지 않으리라는 거지.

오히려 이러한 동일시의 힘으로 인하여 우리는 몰입되고, 그 세계에 우리 자신을 투영시키게 돼.
문학의 긍정적인 효과들은 한낱 관찰이 아닌 동일시의 상상력을 통해 가능한 거야.
더하여 허구의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우리는 소위 간접 경험을 하게 돼.
남의 입장이 되어 보는 거지. 역지사지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거야.
결정적으로 감정적인 교육에 있어서도 이 동일시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해.

음... 개인적으로는 너스바움의 입장을 일종의 관찰자적인 것으로 두고 자신은 동일시가 더 적확하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태도는 조금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해. 내가 너스바움의 저서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왠지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거기에 '너스바움'이라고 쓴 뒤 툭툭 때리면서 "하하 너스바움을 공박한다!"하는 느낌?

저자는 허구적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하는 독자의 입장에 하나의 역설이 있음을 인정해.
그것은 허구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기껍게 자신을 대입하고, 상상적인 동일시를 할 수 있지만,
우리가 몰입 하면 할수록 태생적인 한계를 느끼게 되거든.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독자는 독자대로,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그 분리를 깨뜨릴 수는 없거든.
우리는 이야기와 인물에 몰입하고, 공감하지만, 그 상황을 바꿀 수가 없어.
그런데 이러한 전능을 결여한 전지가 주는 좌절감이 오히려 긍정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해.
허구적 세계와 인물에 대한, 나아가 우리의 현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나?

심슨 가족을 걸어놓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꽤 길게도 하지?
에세이의 말미에 드디어 어쨌든 구색은 맞춰야 된다는 의무감에 의함인지
저자는 그래서 이런 논의가 심슨 가족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일지 논해.
그래서 심슨 가족이 교육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냐 이거야.
하나는 심슨이 대단히 평범한 풍경을 묘사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거야.
그 평범성이 우리에게 동일시를 용이하게 해 준다는 거지. 공감하기 쉽다는 거야.
더하여 심슨 가족이 유머가 넘치는 프로그램이라는 점도 중요하대.
우리가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결점들이나 혹은 무겁거나 불편한 주제를 더 쉽게 직시하게 해 주기 때문이야.
또한 애니메이션의 형식이 우리에게 심슨 가족을 좀 더 가볍게 접하게 만들어주고,
마지막으로 심슨 가족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라는 점도 중요하다고 해.

이 에세이는 요즘 알음알음 소개되고 있는 너스바움을 인용한다는 점이 조금 구미를 자극했지.
내용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오히려 조금 실망스럽다면 실망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심슨 가족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게 자꾸 엿보여서 그닥 즐거운 독서는 못 되었던 셈이지 싶네.


이제 4장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엔 세 에세이가 실려 있어.
장의 제목은 The Simpsons and the Philosophers야.
심슨 가족과 철학자의 작업을 곧바로 연결시켜 보겠다는 기획인 거지.


16. A (Karl, not Groucho) Marxist in Springfield 스프링필드의 (그루초 말고 칼) 마르크시스트
저자는 James M. Wallace야.
그루초 맑스는 30년대 유명했던 코미디 작가/배우들인 맑스 형제의 맏이인데,
뭐 악명높은(?) 인물과 같은 성씨를 갖고 있는 유명인들이다 보니 저런 제목을 써서 익살을 부려 본 거겠지.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심슨 가족을 살펴보겠다는 기획인데,
조금 우려될 수는 있지. 심슨 가족은 기본적으로 미국적 토양 위에서 가장 좌측으로 봐줘도 리버럴한 프로그램이니까,
이걸 마르크스주의 정도 되는 좌측에서 보려는 시도는 결국 이죽거리는 비판이거나, 아예 기각하는 제스쳐이기 쉬울 것 같거든.
이런 현대 미국 대중문화의 첨병같은 프로그램을 마르크스주의자가 옹호하기는 어려운 것 아니겠어?

그런데 저자의 전략은 좀 화가 날 정도로 단순해.
심슨 가족의 '전복적'인 면에 주목해 보자는 거야.
얼마나 심슨 가족에서 그런 전복적인 장면들이 나왔는지 몇 장 인용이 이어지고,
마르크스주의가 스프링필드에서 그닥 환영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근거가 될만한 장면이 또 몇 인용되지.

음... 이 에세이는 더 정리를 못하겠다.
애초에 기획이 잘못됐어.
내가 시큰둥하게 읽느라 건진 게 없었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이건 속류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도 아닌 걸 가지고
글을 기획하고, 쓰고 있다는 인상밖에는 안 드네.

개인적으로는 "Last Exit to Springfield"에피소드가
스프링필드 핵발전소의 파업투쟁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뭐... 그럭저럭 재미있는 논의거리가 될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17. "And the Rest Writes Itself" "나머지는 저절로 써지는구만"
David L. G. Arnold가 저자야.
이 에세이의 기획은 대강 이래. 롤랑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텔레비전 및 지면의 광고나 쇼 등을 분석한 일이 있지.
그걸 참조해서 심슨 가족에도 비슷한 걸 해보겠다는 거야.

롤랑 바르트 얘기를 하려면 구조주의 얘기를 조금이라도 꺼내야 되는 모양이지
구조주의의 개괄적인 역사에 대한 소개가 이어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얘기라던가, 소쉬르 얘기라던가.
구조주의의 옹호자들은 문학비평에서의 주관성subjectivity나 인상주의 비평 등을 비판했고,
이항대립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정치적, 텍스트적 짜임 등을 살펴보려 했다는 내용이 나오네.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구분도 나오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기표란 언어나 이미지 등을 일컫고
기의는 그런 언어나 이미지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의미해. '사과'라는 단어는 기표이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빨간 사과가 기의겠지.
이 두 개념은 기표/기의, 시니피앙/시니피에, 능기/소기 등으로 일컬어지는데
개인적으로는 처음에는 너무 헷갈리더라고. 닥치고 외우면 될 일이라면 될 일이었지만;
아마도 signify라는 말은 '기호로 표현하다' 정도의 의미인 셈이겠지?
그러니 signifier는 '표현하는 것'이고 signified는 수동태로서 '표현되는 것'인 거고.
개인적으로는 시니피앙/시니피에 쌍이 구분하기 되게 헷갈렸는데 signified의 '-ed'로 '에'를 연결시켜서 외웠던 기억이 난다 ㅋㅋ

소쉬르에 따르면 기표/기의의 개념쌍이 언어에 적용되는데 그 연결이 자의적이라면
(사과는 '사과', 'apple', 'りんご', 'der Apfel', 'la pomme'...로 표현되지. 기표와 기의의 연결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어.)
사진이나 그림 등의 도상은 그것과 소위 기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보인다고 했대.
이를 도상적iconic 혹은 동기유발적motivated이라고 했다고?

바르트는 [이미지의 수사학]라는 글에서 파스타 광고의 사진을 가지고 이미지에
'외연적denotative'측면과 '함축적connotative'측면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대.
이미지를 읽어내는 일은 이미지가 음소의 조합(문자 언어라던가)이 아닌
명백한 유사에 기반을 둔 표현이기 때문에 어려울 수 있다고 했나봐.
우리가 사진을 보면 우리는 그게 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지. 이게 이미지의 외연적 측면이래.
그런데 바르트는 "우리는 결코 (적어도 광고에서는) 자연스러운 상태의 이미지를 보지 않"는다고 주장했대.
이런 맥락에서는 어떤 사진이나 그림도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섞여 있지 않을 수는 없다는 거야.
그 의도가 이미지의 함축적 측면이라고 했대.

예시가 된 장바구니에 담긴 파스타의 사진에서 바르트는
피망, 신선한 토마토, 마늘 등을 보고 '이탈리아 느낌'의 외연을 읽어냈대.
그리고 이는 파스타 브랜드를 선택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일 수 있어.
더하여 고객에게 즐겁고 풍요로운 가정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놓은 물건들의 평범한 상태가 일종의 풍부함을 암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그러하므로 사진 이미지는 어떤 역설적인 성격을 품고 있는데
그 기의? 대상?과의 유사성 때문에 사진은 "코드 없는 메세지"를 구성하는 것 같다는 거야.
언어는 우리가 배워서 알기 때문에 문자 언어를 보고 그것을 해석해내는 것이지만,
사진은 그게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는 거지.
사진으로 전달되는 메세지는 그것이 조직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사진 이미지들이 어떤 조작의 산물이고,
어떤 메세지를 제공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살펴보아야 된다는 결론이야.

심슨 가족과 이러한 논의를 연결시키기 전에, 저자는 바르트의 논의를 한 꼭지 더 인용해.
바르트는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의 영상은 사진과는 또 다를 수 있는데,
어떤 서사를 다루기 위한 양식, 즉 관습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그러하대. 자연스러움이 덜 할 수 있다는 거지.
애니메이션은 심지어 이런 양식성이 더하지. 그럼에도 어떤 그럴싸함verisimilitude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니까.
논의를 이어나가도 무방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해.

저자는 이제 "The Front"에피소드를 참조하면서 여기서 어떤 이항대립을 확인할 수 있는지 보려고 해.
갑자기 단순한 논의가 되어버리네; 구조주의 얘기를 한 김이니 이렇게 편하게 페이지를 채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일가?
이런 저런 내용들을 나열하는데 입맛을 돋우는 건 그닥 아니었고
그나마 현명한 연장자와 어리석은 젊은이의 대립이 아이러니하게 어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이게 나름 흥미로운 지적이기는 한 것 같네.

저자는 심슨 가족을 포함한 애니메이션들의 '기표'가 관습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풍자에 무게를 더한다고 설명해. 위에 인용된 에피소드에서 할아버지 심슨은 바지도 안 벗고
자기 팬티를 꺼내 보여주는데, 이런 장면이나, 마지 심슨의 머리스타일, 캐릭터들의 노란 피부 등이
이것이 '기표'임을 시청자들에게 계속 재확인 시켜준다는 거야.

여기서 [S/Z]를 인용하네. 소위 '정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독자적readerly' 텍스트이지만
이에 반대되는 '저자적writerly' 텍스트도 있다고.
심슨 가족은 그 중구난방의 구성이 이러한 읽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텍스트다... 뭐 그런 결론인 듯하네.
나름대로 논의들이 있는데 정리하기가 조금 귀찮다;
다만 여기서 내가 조금 의아한 건 저러한 구분이 정말 그런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일종의 방법론적인 구분을 이야기했던 거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는 거야. 애초에 [사라진느]도 일종의 정전 아닌가?
그러면 저렇게 바르트를 인용하고 나서 심슨 가족을 애써서 상찬하는 게 조금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모르겠네. 내가 바르트를 읽어본 적이 없으니. 아, 있긴 한데 뭐... 깜냥이 안돼서 별로 남는 건 없었으니;

18. What Bart Calls Thinking 바트가 사유라 부르는 것
Kelly Dean Jolley가 저자네. 성이 재밌다. jolly good show!
제목의 번역이 애매한데, 이 에세이가 하이데거를 다루기 때문에, 더하여 철학적 지평이 있다보니 '사유'라는 단어를 썼지만
글쎄, 내가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지만 'thinking'은 그것보다는 좀 더 일상적인 단어일 것 같거든.
어느 맥락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의 폭이 달라질 뿐인? 바트 심슨도 'thinking'정도는 말할 수 있는 건데
굳이 '사유'라고 옮겨버리면 바트 심슨같은 평범한 어린 아이가 말할 단어는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이 에세이는 하이데거의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자답과 바트 심슨을 연결해 보겠다는 기획인데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나 글이 있는 모양이지? 저자는 먼저 거기에 나온 나무를 설명해 보겠대.
다른 사상가들이라면 이 나무를 어떻게 보았을지를 설명하면서 하이데거의 입장을 구체화 보려 하는데
쇼펜하우어나 프레게 등의 사상가들이 다루어지네.

개인적으로는 하이데거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아주 큰 관심이 없어서
이 글은 뭘 말하려는지 아주 와닿지가 않았네. 의인화된 형태가 아닌 현상으로서의 현상을 보려 했다느니
대충 그런 이야기가 실려 있는듯은 한데...

결론도 심지어 바트는 하이데거적 세계관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니 뭐... 김만 팍팍 새지.
그냥 하이데거 얘기좀 풀어보고 싶었던 거지;

그러니 나로서는 유의미한 글은 아니었음.


하이고 읽기는 후루룩 읽었는데 글을 쓴다고
계획에도 없던 2회독을 했네 사실상; 맙소사;
여하간 심슨 가족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사실 구글링만 해도 훨씬 영양가있는 글들을 더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 책의 의미는 출간된 시기에 있고, 책의 형태이다 보니 외국인인 내가 접하기가 조금 더 용이했다는 데 있었겠지.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으니...

여하간 첫 번째 글에서도 밝힌 대로 굳이 남한테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니지 싶네.
혹여 이 책에 관심있었던 사람은 내가 내용 정리까지 대충 한 셈이니 차라리 내 글을 보고 손 털면 될듯.

The Simpsons and Philosophy (2)

2장은 네개의 에세이가 실려 있고, 심슨 가족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도출해볼 수 있는
주제의식이나 텍스트의 구성 방식을 분석하는 식의 글들이라고 정리하면 될 것 같아.

6. The Simpsons and Allusion 심슨 가족과 인용법
여기서 allusion은 우리가 익히 아는 '암시'보다는 일종의 문학기법을 말하는 것 같아서
인용법이나 인유引喩라는 말을 쓰는 게 맞는 것 같아.
번역어라는 게 얼마나 귀찮아 이럴 때 보면? 원어는 같은데 맥락에 따라 단어가 달라지니...

작가는 William Irwin과 J. R. Lombardo야.
전자는 이미 위에서 이 책의 편집자로 설명을 했고,
후자는 찾아보니 딱히 나오는 내용이 없네. 책에는 뉴욕의 시티 대학에서 재직중이라고 되어있음.

저자들은 일단 인용법이란 무엇인지 정의하려고 해.
인용법은 패러디, 오마주, 풍자나 조롱 등의 목적을 위해 쓰일 수 있는 방법인데,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요소를 가져다가 단순하게 붙여넣는 일은 인용법이라고 할 수 없어.
저자들이 예시로 든 건 "Lisa The Simpson"에피소드에서 심슨가의 친척 중 한명이
"나는 잘 못 나가는 새우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라고 했던 대사야.
이건 <포레스트 검프>를 인용하는 것인데 백치인 포레스트 검프조차 성공적으로 운영했던
새우 회사조차 실패하고 있는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얼마나 심슨 유전자가 열등한지를 말해준다는 거지.

또한 인용법은 반드시 인용하는 주체가 그것을 의도했다는 티가 나야만 하는데
(그래야 그 인용이 기발하다면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셈이겠지...)
그런 경우의 특수한 예로 시대착오적인 인용 읽기가 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해.
"Realty Bites" 에피소드에서 마지가 공인중개사로 활동하는 내용은
<아메리칸 뷰티>를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 저 에피소드가 시간상 먼저 나왔으므로
그건 인용법의 잘못된 도출이 되는 셈이지.

이런 인용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장면을 보고 단순한 정보만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화면의 요소들을 해석하는 과정을 겪게 만들어.
이런 과정들은 더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재미있기까지 한 거지.
무엇보다도 작가들과 관객 사이의 미묘한 연대감이 형성된다는 게 중요해.
아, 저거 그 영화에서 따온 대사 아니야? 라고 관객이 느끼는 순간 제작진이 윙크를 깜빡, 한 셈이지.
다만 지적해야 할 것은 인용은 반대로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누군가를 배제한다는 사실이야.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가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나 심슨 가족이 훌륭한 점은 그런 상황에서도
인용이 그 이해를 강요하는 형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원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즐겁게 시청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저자들은 설명해.

이런 인용의 전거는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 문학, 음악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아.
심지어 심슨 가족의 세계에서 이전 에피소드들을 인용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저자들은 인용된 작품들을 두 페이지에 걸쳐서 열거하는데 음...
이건 개인적으로는 좀 지리멸렬했다는 생각이 드네. 정말 나열에 불과한 글뭉치를 게재해 놨거든.
심슨위키만 가도 훨씬 자세하고 유의미한 형태로 올라와 있을 정보들이 단순히
인용된 영화들 : 보디가드, 케이프 피어, 불의 전차, 시민 케인,.... 이런 식으로 몇십개가 나열되어 있으니 무슨;
아무리 이 때는 위키같은게 없었다지만 이건 무성의인지 오히려 쓸데없는 과성의인지 참.

나는 저자인 윌리엄 어윈을 그래도 시리즈의 책임자 역할 비슷한 걸로 알고 있어서
이 에세이가 제법 흥미로운 내용을 풀어낼 줄 알았어.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갤주 완장 찬 애가 글을 쓰면 좀 더 주목을 받기 마련인 것 아니겠어?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별로인 글이라는 인상을 받았네.

7. Popular Parody: The Simpsons Meets the Crime Film 대중 문화의 패러디 - 심슨 가족이 범죄 영화를 만나다
원래는 부제격인 제목은 굳이 안적었는데 이 에세이는 부재가 더 유의미해 보여서 별 수가 없네 ㅋㅋ;
저자는 Deborah Knight란 사람인데, 캐나다 킹스턴에 있는 퀸스 대학 철학과에서 조교수직을 맡고 있는듯 하네.

이 에세이는 "Bart the Murderer" 에피소드에서 어떻게 범죄 장르 영화들의 공식과 관습,
장르의 유명한 작품들이 패러디되지를 분석해서 심슨 가족이 패러디라는 방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려고 해.

저자는 토마스 J. 로버츠의 [3류 소설의 미학An Aesthetics of Junk Fiction]이라는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대중 소설은 시간의 물결 속에서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하는 당대적 요소들을 끊임없이 참조하고 인용한다는
점을 환기시켜. 간단한 예로 호머 심슨은 자기 아이들이 Happy Days의 폰지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저자는 외재적 참조extrinsic references와 내재적 참조intrinsic references를 구분해 보자고 제안해.
전자는 아푸가 인도 영화 '탑 400'을 소개하는 장면이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를 참조하는 Jackie-O시리얼처럼
에피소드의 서사와는 큰 관련 없이 그 외부에 참조점이 존재하는 인용들을 일컬음이고,
후자는 "Bart the Murderer"에서처럼 범죄 영화 장르의 문법이 에피소드 내부의 서사와 맞물려 있는 형태를 의미해.
저자는 범죄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가족Family(장르적으론 뭐 조직 정도겠지?)이라고 제시하면서,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는 인물의 흥망성쇠의 흐름이 기본적인 서사의 뼈대가 된다고 설명해.

아 너무 지리멸렬한 내용이라 더 정리하기가 너무 귀찮다.
뭔 외재적이니 내재적이니... 이딴 구분을 고안해내는 게 어떤 식으로 의미가 있는지 솔직히 난 모르겠어.
문득 그런 생각은 들지. 철학이란 게 개념을 창안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이라면
이런 식으로 텍스트 분석을 해보려는 노력을 내가 단순하게 기각해선 안 될지도 모르지.
롤랑 바르트가 희한한 개념들을 가지고 [사라진느]을 분석하면 그건 고전이 되고 이 글은 쓸모없는 글이 되는건가?
그건 아닐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치만...;

이어서 린다 허친슨이란 사람의 [패러디의 이론 A Theory of Parody: The Teachings of Twentieth-Century Artforms]같은
책을 인용하면서 패러디란 무엇이고, 그게 저자 생각에는 뭐 소위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의 구분을 나누고 있는데
자기는 그런 구분을 좀 폐기하고 싶고 대충 그런 얘기를 하는데...

여하간 문제의 심슨 에피소드는 기본적으로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을 뼈대로 하고
바트가 팻 토니의 갱에 입단하면서 벌어지는 상승과 하강을 다룬다고 하는데,
바트는 여느 장르의 주인공들처럼 완전한 파국을 맞게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패러디는 철저하지는 않대.
그러나 '평범한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결말이 오히려 그 평범성에 대한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한다고...

문득 느낀 건데, 내가 느끼는 이 지리함은 얘들 글이 두괄식이라는 데서 오는 것 같기도 해.
왜 서론과 심지어 제목에서 이미 다 대충 예측 가능한 내용들이 몇 문단에 걸쳐서 계속 되풀이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니까.

8. The Simpsons, Hyper-Irony, and the Meaning of LIfe 심슨 가족, 초 아이러니, 그리고 인생의 의미
Hyper-Irony를 옮길만한 말은 초,과,고 정도가 생각나는데 고는 아닌 것 같고, 과를 쓰기엔 부정적 어감은 없는듯 해서
그냥 초 아이러니라고 써봤어. 얼마나 거창한 내용을 말하고 싶길래 저런 거창한 단어를 쓰고 있는 걸까?

저자는 Carl Matheson이고 매니토바 대학의 철학과 교수래.

코미디 프로그램이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는 건 당연하겠는데, 저자의 생각에는 근자에 들어
<심슨 가족>이나 <사인펠드>와 같은 시리즈는 뭔가 근본적으로 50-60년대 소위 황금기의 시트콤 등과는 다른 점이 있대.
그것은 첫째로는 근래의 작품들이 굉장히 인용적quotational이라는 것이고(이걸 인용주의quotationalism이라고 명명하는데...)
둘째로는 초 아이러니hyper-irony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고 해. 저자는 심슨 가족에서 엿볼 수 있는 이 두 개의 특성을
논구해 보겠다고 하고 있어.

좀 어이없는 게 뭔지 알아? 구글에 quotationalism이랑 hyper-irony를 치면 유의미해 보이는 페이지는 '이 글'밖에 없어.
학자들 사이에서 나름 공유되는 학술용어가 아니라는 말이잖아. 뭐지? 자기과시?

여하간... 인용주의는 미국의 텔레비전 역사에서 70년대 정도부터 뚜렷한 부각을 드러낸다고 저자는 설명해.
주요한 예시로는 Saturday Night LIve라던지, Late Night with David Letterman이나 Second City TV 등이 있다고 하네.
심슨 가족은 이러한 인용주의가 성숙기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야.
흥미로운 것은 심슨 가족의 기본적인 구성이 이전의 스케치식 코미디와는 달리 가족물로서의 정체성을 지녔다는 점이야.
즉 본질적으로 인용적quotational이지 않은 구성임에도 대단히 인용적인 프로그램이 나왔다는 사실이지.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심슨 가족에서 쓰인 인용의 방식은 그저 패러디의 대상을 말하자면... '읊어내는' 방식의 1차원적인 것이 아냐.
"Streetcar Named Marge"에피소드를 살펴보자면, 주요 소재와 제목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명한 희곡에서 따왔고,
중간에는 아인 랜드와, <대탈주>, 히치콕의 <새> 등의 작품들이 다종다양하게 '인용Allusion'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저자는 여기서 6번째 에세이를 참고해볼 것을 제안해. 그러고 보면 저자가 많으니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생기는 셈이겠지)

저자는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어떤 대상을 조롱하는 것을 깔고 들어간다고 주장해. 코미디는 본질적으로 잔인한 장르야.
그럼에도 이런 무감각은 도덕적 목적을 지닌 경우도 많았다고 저자는 설명해.
예를 들어 <야전병원 매쉬>의 등장인물들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고통을 덜어보고자 농지거리를 주고받는다는 거야.
그런데 근자에 들어서 <사인펠드>와 같이 그런 도덕적 태도를 완전히 저버린 프로그램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문제는 이거지. 심슨 가족은 일정한 도덕적 의도를 겨냥할까, 회피할까, 아니면 그런 문제설정 자체에 무관심할까?
이런 질문은 에피소드와 캐릭터의 수가 다양한 만큼 다르게 대답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이는 하나마나한 질문이지 않나?

저자는 현재 지성계의 동향을 잠시만 살펴보자고 제안해.
저명한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미술사를 평면성flatness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평면성은 본디 화가들이 단순히 대처하고 처리해야 했던 매체medium의 특성이었지만,
즉 평면 위에 3차원처럼 보이는 상을 묘사하려는 것이 화가들이 달성하려 노력했던 목적이었지만,
20세기가 되면 회화의 3차원을 모사하려는 목적이 폐기되고 화가들은 그 평면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거야.
뭐 피카소라던가, 칸딘스키라던가 같은 거겠지 예컨대?

그런데 이런 시각으로 보았을 때 미술사가 마치 과학이론이 그러하듯 '발전progress'해 나간다는 관념이 막다른 길에 처해.
평면성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나서 보니 이후 미술이 추구해야 할 목적이 희미해진 거지.
아서 단토를 이를 "예술의 종말"이라고 일컬었대. 1970년대경이 되면, 화가들은 다시금 재현적인 회화스타일로 회귀하기 시작하고,
많은 작품들이 과거의 예술운동과, 동시에 현재 추구할 목적이 없어진 공허에 대한 일종의 논평이 되어갔대.
"아 왕년엔 나도 말이지..."같은 것일까? 저자는 비단 미술계뿐이 아닌 건축이나 영화같은 예술 영역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지적해.
이런 흐름은 예술계만의 일도 아니었는데, 심지어 과학계의 파이어아벤트나, 철학계의 데리다, 로티 같은 인물들을 보면 그러하대.
지성계에서 일정한 권위가 파국에 처한 것을 우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거야.

이런 파국 앞에서, 그 분야의 사상가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영역의 역사를 재고찰하는 방식으로 침잠해 들어가.
발전의 관념이 파기되었다면, 과거의 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것이 딛고 선, '덜한 것'이 아니게 되고,
자연스럽게 동등한 것으로 고려해도 될만한 자격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지.
더하여 이는 발전의 관념이 부재하게 되었으므로 그 공백을 채우려는 조금은 필사적인 움직임이기도 해.
그러므로 현대의 인용주의는 이런 파국의 결과일 수 있는 거야.
지혜knowledge를 포기하게 되니, 다식knowingness에의 집착이 이루어지게 돼.
이제 절대적 진리같은 건 존재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너보다 '아는 것'은 하나라도 더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거지.

물론 인용주의는 반드시 권위의 부재로 인한 혼란으로만 설명할 일은 아닌데, 예를 들어 건축계에서의 신도시주의new urbanism은
더 나은 공동체를 재구축하기 위하여 이전의 역사를 참조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어.

자, 그럼 심슨 가족은 어떤 도덕적 의도를 지녔을까?
저자의 대답은 심슨 가족은 도덕은 커녕 아무것도 겨냥하지 않는다는 거야. 심슨 가족의 유머는 어떤 대상을 제시하고,
곧바로 그것을 다시 깎아내리기 위해서만 무언가를 배치해. 저자에 따르면 이건 심지어 냉소조차도 아냐.
심슨 가족은 자신의 냉소조차도 다시 깎아내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저자는 이런 태도를 초 아이러니hyper-irony라고 부르겠다고 해.
이게 대관절 무슨 소리인가?

저자는 "Scenes from the Class Struggle in Springfield"에피소드를 참조하자고 해.
여기서 마지는 우연히 싸게 얻은 샤넬 정장을 입고 외출을 했다가 상류층 클럽에 회원인 고교 동창을 우연히 마주쳐.
옷차림 때문에 자신과 같은 계급의 사람이라고 착각한 그 동창은 마지를 클럽으로 초대하고, 상류 사회의 휘황찬란함에
매료된 마지는 클럽에 녹아들기 위해 자기 가족들에게 윽박을 지르고, 목돈을 들여 새 옷까지 무리해서 마련하게 되다가,
가족이 더 소중함을 깨닫고 나서, 어차피 그 잘난 사람들은 우리를 원하지도 않았을 거라며 집착을 놓게 돼.
재미있는 반전은 클럽 사람들이 전부 심슨 가족이 입단하는 걸 기껍게 생각해서 환영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는 거지.

이 에피소드의 흥미로운 점은 일단 클럽의 회원들이 고정관념과 같은 냉혈한들이 아니었다는 점이야.
더하여 마지가 집착을 놓게 되는 이유도 흥미로운데, 그것은 하나는 가족과 클럽을 둘 다 챙기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은 심슨 가족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클럽 회원들은 계급차별에서 동떨어져 있었는데도
도리어 그런 클럽에 심슨 가족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지의 생각은 계급차별적이라는 점 때문이야.
그러하므로 이 에피소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따뜻한 척을 하면서 사실을 굉장히 냉정한 부분을 숨긴 에피소드인 거지.

초 아이러니는 도덕적 고취, 종교적 계시, 진실의 추구 등의 '더 높은 가치'가 상실된 시기에 나타난 태도야.
권위가 상실된 시대에 코미디는 어떤 긍정적인 목적에 복무할 수 없게 되어 그저 공격 자체의 '재미'만을 위해
문화 전방위에 걸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고, 심슨 가족은 그런 흐름의 훌륭한 예시라는 거지.

그런데 심슨은 가족물로서의 정체성도 지녔다고 했지. 저자는 이것을 카타르시스의 반대 개념이 아닐까 추측해.
한없이 냉소적인 심슨 가족의 에피소드에 일종의 당의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거지. 따뜻한 가족물의 외피가.

여기서 초 아이러니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 나름의 생각을 잠깐 적어볼게.
네이버 따위에 아이러니를 쳐도 나는 사실은 무슨 말인지 아주 와닿지는 않더라고.
내가 이해하는 건 이런 이미지야. 예를 들어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에서 일베충들의 태도에서 가장 근본을 차지하는 건
아이러니라고 했거든. 5.18 희생자들에 대해서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은 후, 그것을 비난하면 간단하게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덤벼드시네? 농담이야~"라고 해버린다는 거야.
혹은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이 실린, 우리나라엔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출간된 책에 보면
(당시의) 요즘 일본 예술계는 죄다 "난짯떼~"라는 게 좀 불만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적혀 있거든.
이것도 우리나라 말로는 "농담이야~"정도인 모양이지?
즉 어떤 발화를 내뱉는 화자가 "나도 이것이 OO임을 알고 있는데, XX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농담이니까~"라는 태도가
나는 아이러니라고 이해했어. 거리를 두고, 그것을 '알면서' 비웃는 태도를 일컫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
아니, 꼭 비웃는 행위가 덧붙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슬프지만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것도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일컬어지는 걸 보면 말이지. 여하간 알면서도 아닌 척, 거리를 두는 태도인 거겠지?

문득 그러고 보니 아이러니란 시공간적인 거리나 틈새를 전제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
더하여 그 아이러니라는 사태와 연관된 주체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데,
그것을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사람 중 하나는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는 말이야.
소위 역설은 단어가 가진 의미의 차원에서 '말이 안 되는' 사태를 의미함이니 언표 자체로서 자족적일 수 있지.
그러나 아이러니는 그걸 아이러니라고 판단해야 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누군가와 표현 사이의 거리가 아이러니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 읽고 있는 영어 회화 책에서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이란 표현이 나오면서
저자가 이걸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표현했는데, 이건 말하자면 '살아 봐야' 아는 거잖아.
좋은 의도로 행한 일이 나쁜 결과로 이어졌다는 건 시간적인 틈과, 그걸 '그 위'에서 지켜보고 판단하는 주체를 전제한 게 아니겠어?
ㅋㅋㅋㅋㅋㅋㅋ 혼자 주절거려 놨구먼. 여튼 아이러니란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어.
만약 이런 내용이 아니라면 뭐... 누군가 교정해 주면 좋은 일이겠고...

여하간, 그렇다면 이 에세이의 저자가 초 아이러니라고 일컫는 것은 생각보다는 별 것 아닌 개념적 유희라고 생각되는데
이런 아이러니의 태도마저 다시 한번 비웃는 태도를 가르키는 거지. 무차별적 냉소, 자기의 냉소조차 비웃는 냉소를 말하는 것일 거야.
어중간한, 혹은 철저한(?) 회의주의인 거지. 회의주의마저도 회의하는. 그러나 이런 행위가 메타적으로 끊임없이 상승하는 게 가능한가?
회의주의적 태도는 말하자면 그냥 회의주의적이면 그만인 거거든. 자신에게 그 칼을 들이민다고 단순히 '초 회의주의'따위가 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초 아이러니 씩이나 되는 거창하게 들리는 작업은 "나도 내가 냉소적인 건 알아~"라고 말하는 딱 한 순간에만 반짝 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그 반짝조차 가능은 한 건가? 싶어지기도 해.
나는 아이러니를 위에서 간단히 '거리를 두기'라고 생각해 봤는데, '거리에 두기에 거리를 두기'는 말장난 수준도 못되는 것 같거든.
그렇게 때문에 '초 아이러니'라고 응고시킨 일반화된 개념의 제시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꼴이 차라리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드네.
더하여 요컨대 개념의 고안이 철학적 탐구를 통한 사유의 전달보다, 꼴사나운 잰 체를 하는 수행성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그러다보니 솔직히 말해서. 뭐... 이런 속 빈 강정같은 걸 츄라이 츄라이 하는 게 내가 통속적인 미국 학계에 갖고 있는 인상인 것도 사실이지.

권위의 상실이 무분별한 훈고학으로 귀결되고, 그게 냉소와 인용으로 점철된 활동으로 나타난다는 지적은 그래도 흥미로웠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은 있기 때문이겠지? 나 자신이 이런 식으로 문화적 진단을 내릴 깜냥은 없었지만.

9. Simpsonian Sexual Politics 심슨의 성 정치
Dale E. Snow와 James J. Snow의 공저네. 성이 같은 걸 보니 아마 부부려나?
전자는 메릴랜드의 로욜라 대학의 철학과 부교수고, 후자는 볼티모어의 중학 수학 선생이라고 하네.
부부가 맞는가보다.

이 에세이가 말하려는 바는 꽤 간단해.
심슨 가족의 세계인 스프링필드는 성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거지.

스프링필드가 현대의 미국을 상징하는 장소라면, 그곳에서 틈틈히 얼굴을 비치는 캐릭터들의 성비는
현실의 그것과 다르게 좀 더 남성이 나타나는 비율로 되어 있어.
그나마도 여성들은 항상 아름답고 상냥한 모습으로만 나오고, 좀 더 현실적인 여성의 묘사는 극소수라는 거지.
심슨 가족 가이드 북에 명시된 고정 캐릭터 63명 중 여성은 고작 16명밖에 되지 않고,
그 16명도 살펴보면 스키너 부인, 러브조이 여사, 밴 하우튼 여사, 만줄라 등 좀 더 주요한 남성 캐릭터의
부인이나 어머니... 요컨대 부속물 정도로만 등장하고 있어.
또한 이 에세이가 쓰여졌던 당시로서 248개가 나온 에피소드 중에서
리사에게 집중한 에피소드는 고작 28개이고, 마지에게 집중한 에피소드는 호머와 마지의 연애사 에피소드까지
포함하는 나름의 편법을 사용하고서도 21개밖에 안되는 거야.
혹은 게스트 스타 비율도 160명의 남성 스타와 40명의 여성 스타로 여성의 수가 현격히 적은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스프링필드는 남성 지배적인 사회야.

이어 저자들은 버지니아 울프를 인용하면서 그녀가 말한 "가정의 천사" 타입에 마지 심슨이 정확하게 부합한다고 주장해.
진짜 파격적인 어머니 상이 <사우스 파크>의 카트먼 부인으로 등장했다고 치자면,
푸른 머리를 자기 키만큼 틀어올리고, 쉰 목소리로 말을 하더라도 마지 심슨은 전통적인 어머니 편에 선 캐릭터지.
마지 심슨은 스프링필드의 요지경 속에서 안식처를 제공하는 가정의 수호자로서 기능해야 해.
호머에게 반한 바로 그 순간, 마지 부비에는 그가 제공하게 될 모든 불쾌와 고난을 기꺼히 감내하는 성녀로 거듭나게 되는 거야.
호머 심슨이 파격적인 캐릭터가 되고, 그럼으로써 <심슨 가족>이 파격적인 프로그램이 될 수록,
역설적으로 마지 심슨은 그런 풍파를 거의 초인적인 노력과 힘, 그리고 참을성으로 버텨내는 인물이 되는 거지.
심지어 마지 심슨은 중년의 나이에 아이를 셋이나 두고도 남편과 성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되기까지 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아니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심슨 가족이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핵가족의 모습을 띠는 것은 풍자를 위함이 아닌가?"
그러나 저자들은 이에 반대해. 그런 설명이 가능한 캐릭터는 예를 들자면 번즈 사장이야.
번즈 사장은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그대로 육화시킨 캐릭터야. 그리고 그의 밑간데 없는 언행들은
그 과잉 때문에 곧바로 시청자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욕망의 우스꽝스러운 측면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거지.
그런데 심슨 가족이나, 거기서 마지 심슨이 '가정의 천사' 역할을 맡고 있는 모습에는 그런 조롱조가 섞여 있지 않아.
마지 심슨이 현모양처 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런 역할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은 전혀 없거든.

저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리사 심슨에게 주목해. 리사 심슨은 자주적이고, 진취적이며, 도덕적인 인물이니까.
다만 이런 똑똑이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인기가 없기 마련이니, 그녀가 주목을 덜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닐 지도 모르지.
리사 심슨의 도덕적인 성격은 몇몇 에피소드에서 바트 심슨을 조금이나마, 일시적으로나마 교화(?)시키기도 하고,
호머 심슨에게까지 종종 영향을 끼치지. "Lisa's Wedding"에서는 호머 심슨의 입을 빌려서 "네 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고백까지 듣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리사 심슨이라는 캐릭터의 존재는 저자들에게 일종의 위안이 된다는 식인 것 같아.

음... 이 에세이는 전반적인 논조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불만이 없었어.
특히 마지 심슨이라는 캐릭터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부분이 꽤 와닿았지.
평소에도 많이 느끼고 있던 부분이니까.
다만 오히려 나는 또한 남자로서 그런 성녀 이미지에 끌림을 느끼던 적도 제법 되었던 게 사실이지만.


3장은 '윤리학과 심슨 가족'이라는 표제 아래에서
이번에는 아예 윤리학을 걸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겠다는 선포를 해버려.
1장에서 했던 걸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지?
물론 여기서는 심슨가 밖에 다른 캐릭터들에 시선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10. The Moral World of the Simpson Family: A Kantian Perspective 심슨 가족의 도덕 세계 - 칸트적 관점에서 본
저자는 James Lawler야. 뉴욕 주립대학 버팔로 캠퍼스의 철학과 조교수네.

칸트의 도덕철학은 의무에 중심을 맞추고 있어.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욕망 따위와는 반대되는 개념이지.
저자는 호머, 바트, 마지 순으로 그들의 행위를 평가하는데, 그들은 아주 가끔씩 (특히 앞의 둘)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자신의 욕망에 더 충실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나 리사 심슨은 달라. 그녀가 주목을 받는 에피소드들은 항상 일정한 도덕적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지기 때문이야.
온 마을 사람들에게 고립당하더라도 진실을 밝혀내거나("Lisa the Iconoclast"),
국회의원의 부패를 고발하거나("Mr. Lisa Goes to Washington"), 동물을 해치는 것이 옳은지 질문하거나("Lisa the Vegetarian") 등등.
저자는 이런 리사의 행동을 칸트의 정언명령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해보려고 해.
왜 있잖아, 보편적 준칙이 될 수 있는 원칙 하에서만 행위하라는 거.
그 후엔 "Moaning Lisa"를 참조하면서 뭐 도덕적 의무를 다할 때 진정 행복도 찾을 수 있다 비슷한 얘기를 하는 듯 하네.

정리를 하면서 느낀 건데 저자의 약력은 그럭저럭이어 보이는 것에 비해
끔찍할 정도로 영양가가 없는 에세이네. 그럼에도 내가 이 에세이에 크게 불만을 갖지 않았던 건
적어도 각 에피소드들에 대한 참조는 풍부했기 때문이었던듯 해.
각 캐릭터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에서의 행동에 관한 서술이 제법 되거든.

11. The Simpsons: Atomistic Politics and the Nuclear Family 심슨 가족 - 원자론적 정치와 핵가족
저자는 Paul A. Cantor야. 버지니아 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듯 하고 다른 저자들에 비해 제법 저명한 사람인 듯 하네.

심슨 가족이 핵가족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많은 평론가들이 이것을 현재 미국에서의 가족 가치의 상실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저자는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해. 오히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역사에서 심슨 가족의 직속 선배격인 드라마나 시트콤들은
제법 급진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거든. 편부모 가족의 구성이나, 아빠가 둘이라거나 등등.
특히 Party of Five(1994-2000)정도까지 오면 파격은 정점을 찍는데 이 프로그램에선 아이 다섯 명의 부모가 차사고로 목숨을 잃어.
이건 핵가족이라는 관념을 굉장히 훼손하는 건데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아이들은 부모 없이도 (그건 자유를 의미하겠지) 잘 살 수 있고,
부모들은 자기들 없이도 아이들이 잘 클 수 있으니 자기들은 본인들 인생만 즐기면 된다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런 흐름 속에서 심슨 가족이 등장했던 거지. 심슨 가족은 핵가족의 관념을 풍자하고 있지만 그렇게 풍자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체는 항상 유지되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어.
"이 가족은 가능한 최악의 형태이다. 그럼에도 가족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는 거야.

바트는 청소년들에게 나쁜 본이 된다는 숱한 비판을 받았지는 그는 일정한 선은 절대 넘지 않는 인물이고,
결정적으로 미국의 반항아의 계보를 잇는 캐릭터이기도 해. 그런 의미에서 전통을 따르는 인물상인 거야.
문득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Simpson Tide" 에피소드에서 바트가 한쪽 귀에만 귀걸이를 하거든.
그걸 보고 리사가 말하지. "굉장히 반항아스럽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대단히 순응자스럽고."
마지와 리사는 두말할 것도 없지.
호머는 대단히 나쁜 가장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적어도 가장 노릇을 저버리려고는 하지 않아.
"Home Sweet Homediddly-Dum-Doodily"에서 볼 수 있듯이, 심슨 가족은 삐걱거리는 가정의 문제에 대하여
전통적인 대처(플랜더스 가의 독실함)와 현대적인 대처(아동센터의 조치) 모두를 기각해.

여기서 또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첫째로는 힘있는 종교 지도자들(특히 근본주의적인)의
불만을 살까봐 두려워서, 둘째로는 본인들이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기 때문에 종교를 아예 무시하는 방식으로 제작을 하는데
심슨 가족은 현대 미국인들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인 종교를 도외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
심슨 가족이 일요일마다 교회에 참석하는 모습은 다양한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고, 교회와 관련한 이야기를 다루는
에피소드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야. 나도 생각해보면 심슨 가족을 보면서 아 미국인들이 저렇게 교회를 중시하나 보다 했었지.
심슨 가족은 물론 종교를 풍자하고 있지. 그럼에도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인의 삶에서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긍정하고 있는 거야.
그뿐 아니라 가족이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정부, 기관, 학교 등을 풍자하면서 심슨 가족은 그것들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해준대.

그러므로 이 스프링필드라는 소도시의 세계가 묘사되는 것은 현대의 파편화된 도시생활에 찌든 미국인들에게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자족적 공동체를 지켜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거야. 스프링필드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같은 장소인 거지.

저자는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고 있어.
니체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식자층만 이해하도록 썼지만 보통 사람들의 편견을 옹호하는 내용을 썼다고 했대. 그게 우스운 점이라고.
심슨 가족은 지식인들에게 지식인의 방식으로 보통인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 니체의 칸트에 대한 평과 닮았다는 거야.
그러나 심슨 가족은 식자층이건 보통 사람들이건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더 나은 점일지도 모르겠다고.

비판하고 풍자함으로써 오히려 그 실체를 긍정하게 된다는 시각은 꽤 재미있는 지점이 있는 에세이였던 듯 하네.
그리고 각 에피소드들의 묘사나, 무엇보다 여타 텔레비전 시리즈들의 간략한 역사들이 흥미로웠어.


아 쓰기 진짜 쉽지 않네;
드럽게 귀찮다 정말... 앞으로도 리뷰 남길 때 좀 생각해봐야 될 경험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고생시킬줄 몰랐어 더군다나 좀 별로였던 독서경험이었던 걸 쓰려니까 더 고생스럽네.
영어로 된 글을 요약하는 것도 고역이고 ㄷㄷ

The Simpsons and Philosophy (1)

나는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을 정말 좋아해.
10시즌 정도까지는 한 에피소드 당 농담 안섞고 100번도 넘게 본 것 같은데도
그 특유의 독한 풍자나 영리한 상황전개 등은 아직도 배꼽을 잡게 하는 데가 있거든.
지금 생각나는 건 한 등장인물이 "no one who speaks german could be an evil man"라고 하는 장면인데
https://www.youtube.com/watch?v=gaXigSu72A4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건 볼때마다 웃겨죽겠네 진짜.

어릴적 MBC에서 (정말 안어울리게) 배한성 씨가 호머 심슨 역을 맡아서 했을 때부터
아니 이건 뭐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거지? 하면서 봤었고
뭐 EBS판은 거의 레전드지 사실; 그 후로도 심슨 앓이를 하면서 살다가
세상이 참 좋아져서 지금은 편하게 보고싶은 대로 볼 수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팬이라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초반 열 시즌 정도가 정말 대단하거든.
애초에 이 정도 퀄리티를 10년 이상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거지.

각설하고, 펜실베니아 킹스 칼리지의 철학 교수라는 윌리엄 어윈 교수가 주축이 되어서
유명한 영화나 TV 프로그램 등을 소재로 해서 철학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보자는 기획이 있는 모양이지?
'대중문화와 철학'시리즈인데, 찾아보니 80권 정도가 나온 시리즈라고 하네 ㄷㄷ; 그 중 이 책이 가장 잘 팔렸던가봐.

한창 심슨에 빠져있을 때 심슨 관련으로 책을 찾아보면 이게 가장 위에 나왔었거든.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고, 심슨에도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 책을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지.
그러나 오호통재라. 쉽지 않은 건 하나가 더 있었으니 이걸 읽어내는 거였어.
원서를 읽는 사람이란 게 인터넷을 좀만 돌아다녀도 수두룩 빽빽해 보이지만 내가 그 중 한 명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던 차에 이제서야 읽게 된 거지.

책의 구성은 열여덟 편의 에세이로 되어있고, 각 에세이는 뭐 어디서 한자리씩 맡고 있는
사람들이 쓴 건데, 혼자 쓴 것도 있고 둘이 공저한 것도 있고 등등이야.
에세이의 질은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균등하지가 않아.

결론을 말하면 그다지 만족스러운 독서는 사실 아니었어.
이 책은 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도, 심슨에 관심있는 독자도 만족시키기 어려워 보이는데
철학에 방점을 찍자니 수준이 너무 낮고
(눈높이가 낮다는 것 이상으로, 내 깜냥으로 봐도 좀 갸우뚱 하게 되는 지리멸렬한 논의들이라 할까)
심슨에 방점을 찍자니 글쎄... 글들의 논조 자체가 각 에피소드들의 전개나 캐릭터 등등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은연중에 엿보여서 말이지.
책의 기본적인 집필 의도가 심슨을 통해서 철학을 좀 대중화시켜 보자는 쪽이었던 모양이야.
심슨 가족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 따위를 바랐던 나로서는 아무래도 실망에 또 실망일 밖에.

책은 각자 주제별로 네 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간단하게 각 에세이를 소개하고 내가 느낀 점을 덧붙일게.

그럭저럭 여기 실린 에세이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두 개인데
하나는 각 에피소드들마다 설정이 충돌하는 지점이 꽤 많다는 걸 저자들이 인지한다는 점과
(그래서 전 시즌과 에피소드를 아우르는 성찰이 사실상 쉽지 않다는 거지)
또 하나는 저자들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에피소드가 사실상 몇 개로 좁혀진다는 거였어.
우연의 일치인지, 정말 그 에피소드들이 꺼낼 이야기가 많은 훌륭한 에피소드인지는 모르지.
다만 에세이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에피소드 몇 개가 있는데 글쎄, 이 책이 나온 2001년을 기준삼아도
12시즌 정도가 나온 시리즈에서 그렇게 손가락(혹은 발가락까지?)만으로 셀만한 에피소드들만을 다룬다는 건
왜 그랬던 걸지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 구석이 있지.


첫 번째 장은 각 캐릭터를 다루는 주제로 묶여 있는데,
다섯 개의 에세이가 호머,리사,매기,마지,바트 심슨을 다루고 있어.

1. Homer and Aristotle 호머와 아리스토텔레스
저자는 Raja Halwani라는 사람이야.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면 시카고 예술대학 정도인가?
여튼 거기 철학과에서 이 책이 나왔던 2001년 당시에는 조교수였고 지금은 정교수 같네.

이 에세이의 기본적인 구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소개하면서 그 기준에 따라
호머 심슨이라는 캐릭터를 평해보겠다는 거야. 호머 심슨은 존중할만한 바가 있는 캐릭터인가? 가 중심 물음이지.
이 에세이는 시작부터 쉽지 않은 길을 걸으려는 셈인데 호머 심슨이라는 캐릭터는
실제로 존재한다면 뭇매를 맞아도 싼 성격을 가진 인간이거든;
먹는 거 좋아하고 앞뒤 안가리고 자기 하고싶은 것만 하고 책임감도 없고 말도 험하고 하고 등등...
사실 저자도 호머 심슨의 성격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미리부터 못을 박아.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특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참조해서 일단 그의
성격론과 덕이론을 간단히 검토해. 그에게 따르면 덕성이란 행위와 마음가짐 둘 다 중요한데,
무엇이 옳은지 알고 그것을 기꺼이 행하는 것이 덕 있는 인물이라는 거야.
'착하기 때문에 착하다'는 건 의미가 없는 거지. 그래서 진정한 덕에는 이성이 함께해야 해.
그게 소위 실천지인 프로네시스phronesis야. 그럼 무엇이 옳은 행위인가 하면
무엇이 덕스러운지 알고, 그것을 기꺼이 행하며, 더하여 자신의 성정(character)이 그렇기에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이런 기준으로는 호머는 사실 덕이 있는 인물인지 알아볼 만한 후보군에 낄 수조차 없지.
그럼에도 그에게 정상참작을 해줄 여지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야.
스프링필드라는 가상의 도시는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인물들로 가득 차 보이고,
호머라는 인물의 가정사 또한 제법 불우했으며,
(그는 자식을 존중할 의지가 전혀 없는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어)
심슨 유전자가 남성에게는 굉장한 무능력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음에도,
즉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혀 통제할 수 없이 말하자면 나쁜 환경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가정을 꾸리고, 그걸 자기 나름대로는 지켜나가려는 의지를 계속 보여주거든.
그리고... 호머 심슨은, 적어도 악의를 가진 인물은 아니라는 점도 있고.

저자는 "Scenes from the Class Struggle in Springfield"라는 에피소드에서 마지의
"당신의 가식없는 성격을 좋아해"라는 대사를 인용하면서
적어도 호머 심슨은 악의가 없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자기 욕망에 솔직하여
인생을 즐기는 인간이라는 점이 나름대로는 존중할만한 점이 있다고 결론을 내려.
그런 무책임한 성격을 갖고도 자기 가족의 테두리는 지킨다는 것도 유의미하고,
심지어 인생이 암울할 여지가 충분한 환경에 처한 인간이라는 점이 가점을 더 주지.

나로서는 이 에세이가 조금 변죽만 울린다는 인상을 받았던 게,
일단 다루는 주요 소재 둘(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그에 입각한 호머 심슨의 성격 판단)이
매끄럽게 녹아들어 있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야. 서로 겉돈다고 해야하나?
그러면서 말미에는 호머 심슨이 여하간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은 되지 못하는 이유를
굳이 세 가지를 대기까지 하는데 글쎄, 이런 사족을 왜 덧붙이는지도 모르겠고.

"그는 적어도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결론이나 낼 거였으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참조할 이유가 뭐였으며
그렇게 참조를 하고 난 뒤라면 저런 결론을 내는 건 또 무슨 의미냐 이거야.
다른 기준이 갑자기 끼어드는 셈이잖아? 아마도 '당대(현재) 미국의 상식선의 도덕관념'정도의 기준이 말이야.
그러니 썩 길지도 않은 글에서 미묘한 긴장이 느껴지는 거야.
글의 전제와, 전반부와, 후반부가 어그러져서 서로를 밀어내고 있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더 읽고 싶게 만드는 것이 단순한 목적이었다면
소위 대학교 강의실에서 참고자료로 쓸만한 수준은 될지도 모르지. 그치만...

2. Lisa and American Anti-intellectualism 리사와 미국의 반지성주의
저자는 Aeon J. Skoble라는 사람이야. 책에서는 웨스트 포인트 군사학교 철학과 객원교수라고 되어있고,
구글을 쳐보니 지금은 브리지워터 주립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듯 하네.

나는 이 에세이를 읽기 전 기대가 꽤 컸는데, 리사 심슨이라는 캐릭터의 입바른 성격을 내가 좀 좋아하기도 해서지만
그걸 반지성주의와 연결되어 논의한다면 흥미로운 관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어.

저자는 서두에서 지식인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점을 지적해.
소위 전문가들을 자기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할 때는 인용할 가치가 있다는 듯이 대하면서도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내용을 대했을 때는 "그 사람이 대체 뭘 아는데?"라고 돌아선다는 거지.
저자는 이런 태도는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와 "그렇다면 모든 건 의견의 문제로 귀결되고,
내 의견도 결국 한 표인 건 마찬가지네?"라는 의식을 전제로 깔고 있다고 설명해.

저자는 전문가라는 집단이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지적해.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에 더 정통할 수 있고, 하수도가 막혔을 때 우리는 분명 배관공을 부르니까.
그러므로 위에서 설명한 "내 표도 한 표"라는 태도는 정치와 윤리의 영역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야.

심지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진정 객관적인 역사는 없고, 그저 서사의 조직으로 환원된다"거나
소위 자연과학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각 연구자의 가치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라거나
심지어 뭐... 병원이 오히려 병을 키운다는 식의 주장까지 남발되는 현실이
이런 반지성주의를 더욱 부추기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어.

여기서 반지성주의의 대표주자나 다름없는 호머 심슨과, 지식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리사 심슨의 대비가 유용해지지.
또한 리사 심슨이 또래들에게 따돌림당하고, (어리다는 이유로) 어른들에게 무시당하며,
본인의 언행 또한 <이치와 스크래치 쇼> 따위를 즐긴다는 점에서 미국에서 '지식인'이라는 집단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거야.
특히 "Lisa vs. Malibu Stacy"라는 에피소드가 좋은 예시가 되지. 리사가 만들어낸 바람직한 인형은
말리부 스테이시의 새 의상 세트에 밀려서 전혀 빛을 보지 못하게 되거든.

더하여 저자는 "They Saved Lisa's Brain"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철인왕'들의 통치가 전혀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을 보아서도 미국 사회에서 지성인이 처한 상황을 알 수 있다고 해.
소위 "이론적으로는 맞지, 공산주의도 이론적으로는 잘 돌아가!"라는 거지.

저자는 그럼에도 꼭 현실적인 대안이 호머 심슨으로 대표되는 반지성주의나,
큄비 시장으로 대표되는 부패한 모습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해.
리사 심슨으로 대표되는 지식인상이 불완전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지향할만한 바가 있으며 그것이 공익을 가져온다는 거지.

음... 그러니까, 이 에세이는. 전개도, 결론도 결국 좋은 게 좋다는 거야.
현대사회에 반지성주의적인 흐름이 있다는 걸 느끼거나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좋은 귀띔은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어떤 진단과 처방이 가능하며, 그것이 리사 심슨이라는 캐릭터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가 이 글을 읽는 동기였다면
제법 실망스러운 독서경험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드네.
나로서는 이 글을 읽은 후의 나는 읽기 전의 나보다 더 배운 게 없는 것 같거든.

3. Why Maggie Matters 왜 매기가 중요한가?
저자는 Eric bronson이란 사람이야. 책에서는 뉴욕 버클리 대학의 철학/세계사 강사였다고 되어있는데
지금은 아마도 토론토 요크 대학 인문대에 적을 둔 것 같네.

매기라는 캐릭터에 중점을 두면서 어떤 논지를 전개한다는 게 쉬울 수는 없지.
매기 심슨은 장식품같은 캐릭터거든. 역할도 없고.
그러다 보니 "Who Shot Mr. Burns?" 에피소드에 조금은 분량을 할애해야만 했을 거야.
그나마 매기 심슨이 무언가를 했던 에피소드이다 보니...

저자는 제법 재미있는 주장을 하는데
"Brother, Can You Spare Two Dimes?" 에피소드를 근거로 해서 매기 심슨이 자기 안에
제법 명료하게 표현될 수 있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일리가 있지.
이 에피소드의 말미에 '아기 말 번역기'가 나와서 매기의 옹알이를 번역해 주는 모습이 나오거든.
그리고 그 후로 몇십, 몇백 개나 되는 에피소드들을 거치면서 (정말 드문 예외를 제하고) 매기 심슨은 단 한 마디도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거나, 못 하거든. 이게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겠다는 거야.
침묵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인 거지.

저자는 사르트르의 자서전 격인 [말]과 플로베르 연구서? 평전?인 [가문의 백치]를 인용해.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타인들과 언어를 통해 소통하면서 발달한다는 거야.
[마담 보바리]와 같은 작품들은 플로베르가 겪은 유년기의 소통 부재를 만회하려는 치열한 행위였다는 거지.
매기 심슨이 이런 처지에 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저자는 추측해.
매 에피소드에 덧붙은 오프닝 씬만 보아도 마지 심슨은 자기 막내딸을 계산대 위에 올려두고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찾다가 장바구니 안에서 매기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하거든.
호머 심슨의 부모 역할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겠고;
상황이 그러하니 "Home Sweet Homediddly-Dum-Doodily" 에피소드에서 다른 두 아이들과는 달리
매기 심슨이 플랜더스 가정에 그렇게 쉽게 적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거지. 부모의 사랑이 고팠던 유아였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여기까지는 꽤 재미있게 읽었어. [심슨 가족]과 관련있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됐거든.

그런데 아, 여기서 노자의 도덕경 얘기가 나오는데...
솔직히 이후로는 그냥 휙휙 넘겼어. 도덕경이니 바가바드 기타니를 인용하며 저자는
서양의 토의 전통에 반대되는 동양의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따위의 말하자면... 도?가 있다는 얘기를 해.
그런 동양의 도를 받아들인 쇼펜하우어나 하이데거 등의 철학 거장들도 있다는 식으로... 주절주절.
아이고;

그러니 결론은 침묵을 무시하면 번즈 사장처럼 따끔한 맛을 본다 이거지;

4. Marge's Moral Motivation 마지의 도덕적 동기
저자는 Gerald J. Erion과 Joseph A. Zeccardi라는 사람들이야.
전자는 뉴욕 주 Medaille College 메달이야 메데유야?; 여튼 여기서 철학교수를 맡은 듯 하고
후자는 캘리포니아 Saint Mary's College에서 철학과 조교인 모양. 아 프로필 찾아서 쓰기 귀찮네 진짜;

캐릭터를 판단하거나 평가하려면 윤리학을 쓰는 게 편리하게 되고
윤리학을 쓰려다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를 인용하게 되나 봐, 아무래도.
이 에세이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입각해서 마지 심슨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평하려는 게 목적이라고 해.

마지는 기본적으로 '중용'을 지키는 인물이야.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사실 두 명이 더 있겠지.
러브조이 목사와 네드 플랜더스가 그들인데, 전자는 사실 세속사회에서 지쳐서 '관심을 꺼버린' 종교인을 상징하고
후자는 오히려 종교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인물형을 상징하거든.
그 사이에서 중용을 지킴으로써 대단히 바람직한 인물상을 보여준다고 저자들은 설명해.

근대 이후의 윤리학은 어떤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은 어떤 인물이 어떤 trait을 가졌는지를 중시했다고 하는데
뭐 특성? 성정? 정도이려나; 여하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9개의 덕성이 제시된다고 하네. 용기, 절제, 관용... 등등.
이러한 특성을 마지가 지녔다는 것이 어떤 에피소드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 저자들은 나열하고 있어.

이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덕 있는 삶을 영위하는 건 에우다이모니아를 준다고 설명하고 있어.
이는 쾌락과는 다른 차원의 뭐 깊은 행복? 같은 것인데,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제대로 사는 형태를 의미하는듯 해.
그러하므로 마지 심슨이 타인과 관계를 맺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녀가 좋은 삶을 영위하려 하고 실제로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자주 관찰할 수 있는 거지. 친지 및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삶을 운영하는 방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덕성들은 자연히 배양되는 것이 아니야. 그것들은 습관으로서 삶에 각인되어야 해.
덕성 있는 행위를 행함으로서 우리는 그런 덕성을 지니게 된다는 거지.
그러므로 덕성 있는 타인을 본으로 삼는 것이 중요해. 나 자신이 따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한 거야.
그런 의미에서 마지 심슨은 자기 자식들에게 모범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기까지 해.
자식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마다 중요한 조언을 주거나 자기 행동으로 말해주는 인물이기 때문이지.

심지어 네드 플랜더스와 비교해보면 마지라는 인물의 훌륭함이 더 부각되는데,
그녀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야. 어떤 때는 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되더라도
그녀는 그녀 자신이 믿는 바로서의 옳은 일을 행하기 때문이지. 그녀에게 윤리는 신이 내려준 명령이 아닌 거야.
마지 심슨이라는 인물은 이로서 상당히 훌륭한 윤리적 상을 보여준다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이 에세이는... 딱히 황당한 구석은 없는 편이지만 좀 심심하지 싶네.
그래, 마지 심슨은 제법 모범적인 인물형으로 기능할 수 있지.
그러나 내 생각에는 거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야. (이런 관점은 뒤의 다른 에세이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그녀가 좋거나 옳은 행동을 하는 건 윤리적 판단보다는 그냥... 훌륭한 엄마상을 보여줘야만 하는
텔레비전 시리즈의 일종의 관습에 의해서라고 나는 좀 생각되거든.
그렇게 그녀의 영웅적(?)인 윤리성은 생각보다 자율적이지 않다는 판단이 아무래도 나는 들다보니...
자연히 논지의 전개도 기능적으로 보이게 되지. 아, 아리스토텔레스가 9개의 덕을 말했어? 싶은 거야.

뭐... 마지 심슨이란 캐릭터를 주제로 에세이를 써야 되는 제약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겠지.
그 부자연스러운 캐릭터 메이킹에 눈을 가리게 되고...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마지 심슨이 좀 튀는 에피소드들을 더 좋아하거든.
경찰이 된 에피소드나, 도박중독에 빠진 에피소드라거나.

5. Thus Spake Bart 바트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는 Mark T. Conarad라는 사람이네. 뉴욕 시의 메리마운트 맨하탄 칼리지에서 철학과 부교수를 맡고 있나봐.
니체 전공이었나 보지?

바트 심슨이 스프링필드의 악동이라면, 철학계에도 악동이 있대. 그게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인 거지.
저자 생각에는 아마도 리사 심슨이 더 모범적인 인물이 아니겠냐고 생각하지만, 니체가 보기에는 그녀는
그저 약자의 도덕을 신봉하는 인간형에 불과한 거야. 그러면 바트 심슨에게서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모습을 건질 수 있는 걸까?

저자는 니체의 철학을 대강이나마 소개하려고 하고 있어.
표상와 의지의 이분법을 견지하던 쇼펜하우어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던 초기의 니체는
그를 따라서 [비극의 탄생]에서 의지를 근원일자(primal unity)라고 부르고, 우리가 접하는 겉모습으로의 세계를
이 근원일자가 만들어낸 일종의 예술활동의 결과? 비슷한 걸로 본다고 해.
인간이 세계를 직시함에 따라 이것이 환영에 불과하고 그 근원에는 소용돌이치는 혼돈만이 존재함을 알게 되는데,
인간은 이를 인식하지만 이를 바로잡을 수는 없는 고통에 처하게 된대.
저자에 의하면 이런 부조리와 혐오를 덜어내기 위한 돌파구로서 예술이 존재한다고 니체는 설명했대.
이런 세계의 근원에 놓인 무의미를 되돌려서 파악하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인데,
니체는 본질적으로 혼돈에 싸인 이 세계를 교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그 진면목에서 눈을 돌리는
나약함과 타락의 징표에 불과하다는 거야

저자는 스프링필드를 이런 혼돈스러운 세계로 받아들일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해.
그건 매 에피소드마다 조금씩 설정이 뒤바뀌는 에피소드식 텔레비전 시리즈라는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예를 들면 번즈 사장은 어떤 때는 70대였다가 어떤 때는 100세가 넘는다고 소개되곤 하거든.
이런 혼돈 속에서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 소크라테스 역은 리사 심슨이 맡게 되는 거지.

니체는 초기작의 이원론을 그 후 바로 폐기하는데, 그에 의하면 세계는 오직 흐름flux에 불과해.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계의 피안에 어떤 세계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염원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는 언어 자체가 존재를 잡아두는 것처럼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야. 주어와 술어가 결합해 있는 언어의 형태가
마치 주어에 해당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가능한 것처럼 착각을 불어넣어 준다는 거지.
말하자면 "번개가 친다"고 하지만 "번개"가 "치"는 게 아니라 그저 번쩍임이 있을 뿐이야.
혹은 "호머가 맥주를 마신다"고 하지만, 그는 맥주를 마시고, 트림을 하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행위들 모두의 합일 따름이라는 거지.

하여 저자는 니체가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꽤 반겼을 거라고 설명해.
애니메이션의 움직이는 그림, 동화에는 이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거든.
움직이는 그림들이 움직이는 그림으로서만 제시되는 것이니까. 그저 '흐름'인 거지.

현상-의지의 이원론을 폐기한 니체에게 예술은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돌파구가 아닌
삶 그 자체가 돼. 예술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이상적인 형태라고 제시되는 거지.
애초에 주체라는 개념 자체도 폐기해버린 니체에게 있어서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러하므로 '나'라는 것은 출발점이 아닌 도달점으로서 설정이 된다는 거야.
삶에 양식style을 부여하는 거지. 그 정점이 소위 초인uebermensch라는 것이고,
이는 자기의 삶을 예술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인간을 칭하는 거야.
그럼 그런 삶을 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야훼의 말씀을 따르면 되나? 물론 아니겠지.

니체는 종래의 철학이나 모든 종교가 무가치한 것이라고 폐기해.
피안의 세계를 상정하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차안에서의 고통이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다는 체계는 말도 안 된다는 거야.
피안을 상상함으로써 차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들이 무시된다는 거지.
더하여 역사적으로 피안의 세계를 숭배하던 인간들은 자신들의 체계를 남들에게 강요해 왔어.
무엇보다 이 강요는 소위 선악의 이분법 하에서 행해졌는데,
니체에 의하면 이 선악의 구분 자체가 오히려 약자가 자신들의 복수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작으로서
자기들을 선이라고 참칭한 것에 불과해.
강자가 강하기 때문에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들의 의지를 표하고 행했던 때에는 그저 구분의 표지로서
"우리 아닌 너희는 나쁘다"는 윤리가 통용되었을 뿐인데, 그 아래서 신음하던 약자들이 원한을 품고
소위 노예의 도덕을 창안해 냈다는 거야. 도리어 악한 건 너희들이다! 라고 했다는 거지.
그래서 소위 겸손 따위가 덕으로서 숭앙받게 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설명해.

자, 그러면 바트 심슨은 니체적인 초인 상에 부합하는 인물일까?
그런데 의외로 분석을 해 보면 그게 그렇게 녹록한 작업은 아니야.
바트 심슨은 새로운 가치,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안해가는 예술가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한 인물이거든.
오히려 그의 정체성은 기존의 권위에 대항하는 반항아 정도로서만 자리잡혀 있어.
스키너 교장이 해고되었다가 복직하는 내용을 다룬 "Sweet Seymour Skinner's Baadasssss Song"을 보면 알 수 있지.
바트는 스키너 교장이 해고되고 학교를 떠나자 그를 적으로서 그러워하게 되거든.
혹은 마을의 모두가 자기처럼 악동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 모습의
"Bart's Inner Child"라던가.

오히려 저자는 바트 심슨을 니체 이후의 도덕적 혼란을 보여주는 인물일 수 있겠다고 결론을 내려.
니체의 주장대로 기존의 선악의 구분을 폐기한 이후 모든 사람들이 예술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기에
오히려 혼란스러운 허무주의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경고를 니체가 했었던가봐.
그러니 바트 심슨처럼 그 무엇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가볍고 얕은 인물형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거지.

이 에세이는 제법 영양가가 있었지. 니체 얘기를 두루두루 하다가
결국 바트 심슨이 초인상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할 때는 조금 김이 샌 것도 사실이지만,
그 나름의 정합성이나 정보의 전달이 수준 미달이라는 느낌을 주는 건 아니었지 싶어.


아 대충 쓸라고 했는데 정리하다보니까 힘드네;;;
나머지는 다음에 쓸게. 일단 쓴 것부터 올림 ㄷㄷㄷ

2017년 5월 13일 토요일

장승진·Paul J. Lee, 나는 더 영어답게 말하고 싶다 비즈니스편

조만간 토스나 오픽 중 하나를 볼 생각이거든.
시험용 교재라고 부득부득 나온 것들을 달달달 외워도 괜찮겠지만 뭔가 기분이 별로란 말이지.
삐딱선인진 몰라도 나는 시험공부를 위한 교재를 보는 게 기분이 좀 나쁘더라고 항상.
기왕 나는 내 실력으로 보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고,
출판사 프랙티쿠스의 책 몇 권을 모아 놓은 차였으니 마침 때가 좋았던 거지.
다른 편들도 볼 거지만 일단 토스에 조금이라도 더 연관이 있는 주제를 다룰 것 같은 비즈니스편을 먼저 봤다.

이 책을 평가하는 일이나, 나아가서 프랙티쿠스의 책들을 평가하는 일은 좀 애매한 꼴일 수가 있는게
나는 그다지 대한민국의 영어교재 시장을 통관하고 있지는 않거든.
그러니 다른 책들에 비교해서 이 책이 정말 좋다! 라는 식의 추천은 사실 하기 어렵지.

다만 프랙티쿠스라는 출판사가 지향하는 바는 꽤 마음에 들어.
이런 소리를 내가 직접 하는 게 좀 웃기긴 해도 나 정도면 대한민국 평균보다는 영어실력이 낫다고 생각하거든.
허구헌날 왕초보 발걸음 떼기! 이런 책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원서를 읽는 것도 좋은 건 좋은 거지만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배운다고 할 때 묘하게 가려운 데가 있는 법인데
여기 책들이 그런 류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거든.
걔들한텐 너무 당연하고 우리한텐 생소한 표현이라 미묘한 중간지대에 있는 표현들을 가르쳐 주는,
그야말로 중급자용 책인 셈이야.

어차피 이런 류 책은 안에 있는 내용을 내가 얼마나 읽고 외우고 체화시키냐가 관건이니
뭐라 감상이라고 적을만한 건 사실 좀 없지 싶긴 하네.
그래도 제법 햐 이런 표현이 있구나, 아 이런 건 이렇게 표현하면 되는구나 싶은 게 많더라고. 재미있었어.

지금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건
demographic이란 표현인데 이거는 네이버에 치면
동아출판 영한사전 기준으로 그냥 '인구 (통계)학의'라고만 되어있어. 예문도 변변찮고.
그런데 '특정 연령대의 인구집단' 정도의 의미로도 자주 쓰이는 모양이더라고?
dictionary.com에서 쳐보면 3번 정의로
a specific segment of a population having shared characteristics:
The producers were looking for a show that would appeal to the 18-34 demographic.
라고 되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어. 'the 연령대 demographic'이라는 꼴로 사용하는 단어라 이거지.
혹자는 영자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코웃음칠지 몰라도
나로서는 꽤 흥미로운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들거든.
심지어 국내 사전에서는 쳐도 나오지도 않는 용례라는 게 진짜 재미있는 거지.

여기 나온 내용들이 고스란히 저자와 출판사의 재산(?)인 셈이니
내가 여기다가 무턱대고 그 내용을 더 공유하기는 좀 애매할 것 같고,
여하튼 나름 괜찮게 읽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관심 한번쯤 가져봐.
한국인으로서 머리를 짜내봐야 결국 축어역 형식밖에 안 나오는 작문 및 회화에 한계를 느꼈던 사람이면
꼭 이 책만이 답이란 건 아니지만 괜찮은 답이 될만한 책이지 않나 싶음.

52쪽에서
Demand for big-ticket items remain weak라는 예문이 있는데
이건 remains가 아닌가 싶더라고 내가 보기엔?
이거랑 또 하나 이상하다 싶은 부분이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안나네.

여튼 추천


2017년 5월 10일 수요일

Clive Barker, Books of Blood vol. 6

이 책은 미국판이라서 그런지 바커의 중편 [Cabal]하고 피의 책 6권이 합본된 책이야.
그만큼 긴 편이고, 이상하게도 피의 책의 에필로그 격인 짧은 단편은 잘린 사양인데
몇쪽 되지도 않는 걸로 아는데 왜 책을 그따위로 만들었는지는 의문.
여튼 드디어 숙원사업이었던 피의 책을 완독해버렸다. ㅠㅠ 마냥 기쁘지는 않은게
기대에 좀 못 미치는 독서였기 때문일까...
이것도 저번 주에 독서를 마쳤는데 영화판을 좀 보느라고 글이 늦었어.

[Cabal]
피의 책이 84-5년에 출간되었다고 하고 이게 88년에 나왔다고 하니
사실은 그 사이에 시간이 좀 떨어져 있는 꽤 독립된 작품인 셈이야.
내용이나 전개도 피의 책에 실린 단편들과는 좀 다른 편이고,
개인적으로는 약간 독서의 리듬을 망친 것 같다는 기분을 많이 받은 편이었어.

주인공은 애런 분이라는 인물인데, 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그래서 데커라는 의사와 상담 치료를 받고 있었던 차인데,
어느 날 데커가 끔찍한 살해현장을 담은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건 네가 한 짓들이다"라고 말해. 분 본인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데커와의 대화 끝에 결국 이건 자기가 한 짓이 맞다고 수긍하게 되고
죄책감에 거리를 헤매다가 어느 병원에서 Narcisse라는 광인의 울부짖음을 듣게 돼.
이게 나르시스인지 나르키세인지 아님 작중 배경이 캐나다라 뭔가 불어 발음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튼 '미디안'이라는 괴물의 도시가 있고, 그곳에서는 누구든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나르시스한테 그 위치를 전해들은 분은 그곳을 향해 떠나게 돼.
살인자인 자신은 이미 괴물이나 마찬가지고, 그곳에서만큼은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결국 찾아간 미디안은 거대한 무덤이었고, 그곳에서 희한한 괴인들에게 분은 습격을 받아.
분은 그들에게 공격받았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온 뒤 그 근처 마을에서 우연히(?) 데커를 다시 만나게 되고
데커는 고백을 하지, 살인은 내 짓이었고 너한테 누명을 씌운 거라고. 그러고는 분을 쏘아서 죽여.
얼마 뒤 안치소에 들어가 있던 분의 시체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지.

분의 여자친구였던 로리를 갑작스러운 분의 실종과 뒤이은 그의 죽음이 이해가 되질 않아.
그래서 그의 발자취를 다시 따라가보기로 결심해. 셰릴이라는 여자도 만나서 동행하게 되고.
셰릴은 그 과정에서 자기 꿈의 왕자님같은 남자를 만나기도 하는데, 그는 결국 데커로 밝혀지고 셰리를 살해해.
결국 미디안을 찾아간 셰릴인데, 그곳에서도 데커가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데커는 분이 아직 죽지 않은 것임이 분명하고, 로리를 위협하면 다시 분을 만나서 죽일 수 있을 거라고 계산한 거야.
무덤가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결국 분이 다시 나타나서 데커를 막아내고, 데커는 간신히 도망가지.
분은 미디안에 거주하고 있던 나이트 브리드라는 괴인 종족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었고, 로리를 구함으로써
외부인과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율을 어기게 돼. 일원이 되자마자 쫓겨나는 전개인 거지;
그래서 미디안을 건설했다는 뭐... 족장?이자 예언가인 바포메트를 만나기로 하게 되고....

분과 로리는 재회하고, 일단은 하릴없이 로리가 묵던 모텔에 돌아왔는데,
모텔에 묵던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한 거야. 데커의 짓인 거지. 빨리 나가자는 로리의 재촉에도
괴인의 식욕에 이끌려버린 분이 시체를 먹어치우기 시작해. 경찰 사이렌이 멀리서 울리고,
로리는 도망치지만 분은 결국 경찰들에게 잡혀서 철창신세가 되지.
데커는 경찰서장을 설득해서 미디안을 쓸어버려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이야기는 괴인 종족에게 닥친 큰 위험과 구속된 영웅의 전개 비슷한 걸로 흘러가게 되는 거지.

아 정리하면서도 지겹네.

이 지리멸렬을 좀 느낄 수 있겠어? 서사의 전개가 정말 형편 없다고 느꼈어, 이 소설은.
이야기의 맥이 없는 거야. 결국 이 이야기의 본질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일종의 인디언 이야기거든.
더 오래된 원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런 거 있잖아.
박해받는 종족이 있고, 박해하던 쪽이었던 인물이 모종의 사건을 통해 개심을 하고, 결국 전투나 판세를 뒤엎게 되는...
최근의 판본으로는 나는 <아바타>가 떠오르네. 그러면 거기에 집중을 할 필요가 있지 싶은데,
본론을 말하기 전까지 자질구레한 소리들로 2/3정도의 분량을 소비하면 어쩌자는 거야;

이거는 바커가 자기가 쓰고 싶은 걸 휘갈기다가 '한 편'으로서의 리듬을 뭉개버린 결과라고 밖에는 나는 생각이 안되더라.
살인마 얘기도 넣어보고, 정신병 얘기도 넣어보고, '또 다른 세계' 이야기도 넣어보고 등등...
차라리 장편으로 가서 좀 더 길고 진득하게 전개나 캐릭터에 활력을 불어넣던지,
아니면 본론만 적당히 써서 단편에 걸맞는 리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던지 했어야 해.
이 소설은 바커가 장편에 소질이 그다지 없다는 걸 드러내는 한 편이면서
그의 상상력이 생각보다는 그렇게 톡톡 튀는 편이 못 된다는 걸 알려주는 한 편이기도 하다는 감상이야.

개인적으로는 이건 영화를 염두에 둔 소설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러면 지지부진은 중반부까지의 전개는 나름 넘길만 하게 될테고
미디안이라는 배경이나 괴물 종족의 이미지가 영화로 표현되었을 때 흥미로울 수 있겠다는 싶었거든.
헬레이져로 영화 맛을 톡톡히 본 바커가, 그걸 알게 모르게 자기 글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한국 출시명은 <심야의 공포>로 출시된 영화가 있지. 바커 본인이 감독했고.
그닥 재미를 잘 본 영화는 아니야. 그럼에도 나름 컬트적인 반응이 있었던 모양이고
몇 년 전에 결국 감독판으로 복원되기도 한 영화지. 하여 이번 기회에 보게 되었는데...

얼기설기 뻗쳐나간 서사의 흐름이 영화로 보면 덜 거슬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라.
그럼에도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매혹적인 구석이 있었어. 괴물들의 모습이라던가, 지하 도시 미디안의 모습이라던가.
바커는 읽을수록 대단히 문재가 있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본인 스스로가 어떤 이미지에 매혹을 느끼고 있고,
그걸 글로서 풀어낸 사람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슬 들더라고.
그리고 이 영화판의 진짜 재미는 데커 역을 맡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지.
볼때마다 자꾸 우습고 반가워서 원 ㅋㅋㅋㅋㅋ

[The Life of Death]
자궁 적출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일레인이란 인물이 주인공이야.
그녀는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과,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에 따라 약해진 마음으로 갈팡질팡하고 있어.
산책을 나갔다가 공사가 한창인 교회당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거기서 캐바나라는 남자를 만나서 여기서 무덤이 발견됐고 그래서 발굴작업이 진행된다는 걸 듣게 돼.
이 남자는 말수는 적지만 '죽음'에 관해 매혹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하고 일레인은 거기에 묘하게 동감을 느껴.
어느 잠 안오는 밤 일레인은 발굴작업이 한창이던 그 교회당 안으로 몰래 들어가게 돼.
죽음에 가까워짐으로써 캐바나에게 이야기할 거리가 생길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그 곳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기묘한 죽음의 형상이었어. 수없이 많은 인간들을 산 채로 가두어 놓고 묻어버린 듯한?

그것을 목도한 이후 그녀는 갑자기 몸과 마음에 생기가 불어나기 시작해.
그 선연한 죽음의 이미지가 오히려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게 해 준거야.
그렇게 활기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녀였는데, 그녀 주위에서 이상한 죽음들이 발생해.
밝혀지기로는 그 무덤은 전염병이 창궐한 후 병자들을 격리시켜 묻어버린 장소였던 거지.
그녀는 보균자로서 죽음의 전달자가 되어버렸던 거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다시 그 교회당을 찾아가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곳에 서 있던 캐바나를 만나게 되고...

이 단편은 결말이 꽤 재미있었지.
그래도 이 연작에 속한 적잖은 단편들을 읽으면서
'아 그럼 저 캐바나라는 놈이 일종의 초월자적인 죽음의 사도였겠군' 하게 되잖아?
그런 의미에서 재밌는 반전이 있거든.

[How Spoilers Bleed]
이거는 배경이 아마 남미 오지인 것 같은데, 시간적 배경은 잘 감이 안온다.
여튼 원주민들을 총칼로 몰아내고 땅을 차지해서 자원을 캐내려던 '모험가'들이 주인공인데,
어느 날 부족의 마을로 가서 퇴거 명령을 고래고래 내리치다가 그만 한 아이를 총으로 쏴죽이게 돼.
그런데 그 뒤로 그 마을에 갔던 세 명인가 네 명인가의 인물들이 차례대로
몸의 살이 너무너무 약하고 부드러워져서 깃털만 닿아도 베이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리는 거야.
종국에는 그 사실을 모른 근처의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는데 팔이 떨어져서 과다 출혈로 죽고 그런 거지.

뭐... 저주에 의해 몸의 상태가 변한다는 공포는 제법 많이 다루는 소재인 것 같아.
스티븐 킹도 비슷한 걸 썼던 기억이 있는데... 씨너였던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참신한 상상력은 아닐지 몰라도, 제법 무난히 읽었던 단편이었음.

[Twilight at the Towers]
요거는 개인적으로 조금 이해가 안 가던 소설인데, 그래서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 뭔지 확 들어오질 않더라고.
85년 당시에는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았잖아? 그때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야.
영국 측 정보요원인 밸러드는 KGB 소속 미로넨코의 망명의사를 입수하게 된 당국의 명령으로
그가 이중간첩일지 진심일지 판단하기 위해 만나게 돼.
밸러드는 미로넨코가 진심일 거라고 믿게 되고, 보고서를 올리지만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게 되는 거지.
미로넨코는 갑자기 실종되고, 자기 상급자인 크립스는 자기를 만나주지 않기 시작하고,
그러던 중 서클링이라는 요원은 대뜸 자기의 친우였던 오델과 크립스가 작전 중 사망했다는 이야기나 하고...
밸러드는 뭔가 함정에 걸렸구나, 하고 감지하게 되는 거지.

결론적으로는 주인공 밸러드를 포함한 몇 명의 인물들은
각자 당국에 의해 늑대인간같은 괴물이 되어버렸는데 본인은 그것도 알지 못하고,
그 굶주림?을 이데올로기적인 열광으로 억누른다는 실험의 희생자였다는 결말인데,
음... 모르겠다. 어떤 은유를 해보려고 했던 건지,
그냥 에스피오나지 장르에 호러 장르를 좀 섞어 보려고 했던 건지.

[The Last Illusion]
명망높은 대 마술가 필립 스완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
이전에 귀신들린 아이의 사건을 맡았던 걸로 나름 유명한 사립탐정 해리 다머가
이 미망인 도로테아 스완의 의뢰를 받게 되지. 이 사건도 오컬트와 관계되었다는 낌새를 주면서.
큰 설명을 해주지는 않지만, 필립 스완의 시체를 하루 동안 지켜만 주면 된다는 내용이야.
저택에 도착한 해리는 퉁명스러운 집사 발렌틴과, 아름다운 미망인을 만나게 되고,
필립 스완이 혹시 자기가 죽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남겼다는 편지도 읽어보게 돼.
편지의 내용은 밤낮으로 감시를 해서라도 자기 시체에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화장해서 흔적도 없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어. 그 일을 위해서 해리가 고용된 거지.
관을 지키던 해리는 이상한 환각을 보게 되는데, 깨어난 후 발렌틴이 자기를 중독시켰다는 설명을 듣게 돼.
갑자기 들이닥친 변호사 버터필드가 이제 의뢰는 끝났다고 이야기하고, 떨떠름한 기분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해리는 발렌틴을 맞닥뜨리게 되는 거지. 그리고 발렌틴은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는데...

필립 스완은 진짜 마술가였던 거야. 무대 위의 모든 트릭은 사실 진짜로 구현한 마술이었던 거지.
그는 젊은 시절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서 그런 능력을 얻었지만, 그런 힘조차도 죽음 뒤의 영원한 고통 앞에서는
한낱 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곧바로 깨달았다는 거야.
위대한 능력받고도 고작 사람들의 유흥거리밖에 안되는 짓을 함으로써 악마들을 엿먹이고 있었던 거지, 자기 나름대로는.
전략은 주효해서 악마들은 이 짓거리에 그야말로 분개하고 있었고 그를 해하려고 수차례 시도했는데
이번에 그것이 성공하게 되었고, 그의 시체를 손에 넣게 되면 그의 지옥행이 결정되는 거야.
해리 다머는 필립 스완의 투쟁의 막바지에 끌려들어간 셈이었던 거지.

개인적으로는 이 상황의 설정이 참 재밌다고 느꼈어.
악마와의 장엄한 투쟁이 장난질을 행함으로서 수행된다는 게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더라고.
결말부의 나름 처절한 전개도 나쁘지는 않았고.

이 소설도 영화화가 되었는데,
글쎄, 바커가 이 소설의 느와르풍을 좀 아꼈던 게 아닐까 싶기는 해.
그리고 이 영화가 조금 재미를 못봤던 모양인지 바커는 이후로 영화판에 손을 뗀 것 같은데.

영화판의 내용은 조금 달라. 악마같은 건 없고,
닉스라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일종의 악마로 기능을 하지.
하는 짓도 광신도들 몰고 다니면서 이상한 교리를 설파하고, 그런 거니까.
필립 스완은 그의 수제자였다가, 어떤 계기 때문인지 그를 배신하고, 결국 그를 봉인해.
그 뒤로 마술가로서 명망을 얻으면서 살게 되는 거지.
그런데 닉스의 추종자들은 닉스의 시체가 묻힌 곳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필립의 동료였던 사람들을 추적해서 하나하나 고문하는 거지. 그런 현장에 해리 다머가
들이닥치게 돼. 다른 의뢰 때문에 갔던 거지만, 뭐 그렇게 사건이 얽히는 거지.
그런 내용의 신문기사를 보게 된 필립의 부인 도로테아가 내막을 조사해달라며 의뢰를 맡기고,
얼마 뒤 마술 쇼에서 필립 스완마저 사고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영화판은 나름대로 탐정 장르에 충실하기도 하고,
바커 특유의 기괴한 이미지가 나쁘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전개도 그럭저럭 부드러워서 <심야의 공포>같은 불쾌한 미숙함이 보이지도 않아.
이건 꼭 장점만은 아니긴 하지. 좀 평범하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배우들도 자기 역할에 썩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특히 팜케 얀센은 어우; 난 이 배우 그렇게 매력있다고 느낀적 없는데 정말 예쁘더라.

영화판의 가장 큰 단점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
해리 다머가 모종의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이라기 보다도
해리 다머/필립 스완이 악의 화신 닉스와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에 좀 더 맞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그러니까 이야기의 중심 축이 되어야 할 적대자의 존재가 정말 희미해.
닉스의 부활은 정말 후반에서야 이루어지고, 그나마도 그를 물리치는 건 좀 간단하게 처리되거든.
탐정 장르가 조금 오리무중 안에서 손 휘젓는 전개일 수 있는 건 나도 알지만 그럼에도
이야기의 갈등 축이 빈약하다는 느낌을 떨쳐내기가 어렵더라고.
후반부의 이미지들, 특히 진흙 안으로 쳐박히는 광신도들의 이미지는 꽤 강렬하고 흥미로웠지만.
결론적으론 내 생각에는 바커는 본인의 비전에 취해서 올바른 리듬을 만드는 법을 조금 도외시하는 것 같아. 이해는 하지만.


여튼 이것으로 피의 책 연작은 마치는 것으로...
나름 대장정이었네;
앞으로 바커 책은 굳이 찾아보지는 않을듯.
학창시절 때부터 계속 마음 한구석의 빚처럼 남아있던 독서여서인지
기대가 너무 커졌던 모양이야. 그리고 바커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줄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지.
그게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2017.4.30

Clive Barker, Books of Blood vol. 5


대망의 5권이다.
사실 읽기는 저번주 화요일 쯤 읽었는데,
글쓰기 귀찮은 것에다 결정적으로 여기 실린 단편을 영화화 한 <캔디맨>을 보고 글을 쓰고싶어서
이제야 쓰게 되네 ㄷㄷ;


[In The Flesh]
클리브라는 죄수가 있는데, 교도소 내에서 그럭저럭 자기 앞가림은 하는 인물이야.
그래서 간수장이 새로 입소한 비리비리한 꼬마애가 있으니 신경좀 써주라면서 같은 방에 배정을 해.
근데 같이 얘기를 좀 해보니 이 빌리 테이트라는 꼬마녀석이 조금 희한한 녀석인 거야.
자기 외할아버지가 끔찍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피가 유전되지 않도록 자기 자식들을 모두 죽였으며,
그래서 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교수형 당했는데, 자기 어머니만 운좋게 살아남아서 자기한테 '그 힘'을 물려줬으니,
자기는 이 힘을 어떻게 써야할 지 알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영혼?)를 만나기 위해 이 곳에 일부러 끌려왔다는 거지.

뭔 개소리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주인공도 무언가 영능력이 있었던 거야. 그런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자꾸
꿈에서 이상한 장소에 가게 되고, 그 곳의 주민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기는 살인자들이 갇히는 일종의
연옥이며, 제물을 매개로 거기서 탈출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지.
빌리가 자기 외할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그 연옥에서 현실로 접촉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그곳을 보게 되는 거야.
주인공은 외조부의 의도가 빌리를 도우려는 것이 아니고 제물로 하여 연옥을 탈출하는 것임을 직감하게 돼.
그래서 빌리를 구하려고 하지만, 빌리는 자기 외할아버지를 믿는다며 오히려 그를 적대하기 시작해.
조그만 방에 빌리와, 그의 외조부의 유령과 함께 갇히게 된 주인공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는 거지.

이 단편은 개인적으로 결말이 인상깊었는데,
주인공이 꿈에서 살인자들의 연옥을 돌아다니다가 "이 곳에 우연히 오는 영혼은 없다"는 소릴 듣거든.
그게 결말부에서 실현이 되는데, 제법 씁쓸한 느낌이 들어서 좋더라고.
결국 파국을 (그게 파국인 줄도 모르고) 맞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이 말이야.

[The Forbidden]
이 단편이 영화 <캔디맨>의 원작인 소설인데,
요즘에야 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나 어렸을 때 까지는
비디오샵에 항상 꽂혀 있던 영화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기억하던 영화거든.
개인적으로는 영화도 괜찮더라.
특히 소설을 읽으면서 캔디맨의 벽화가 어떤 모습으로 영상화됐을지 궁금했는데 나쁘지 않더라고.

소설의 배경은 영국의 리버풀 근처인 모양이고, 그래피티에서 빈민계층의 심리를 파악한다는 논문을 쓰려는
헬렌이란 이름의 여성 대학원생이 주인공이야. 조사를 하던 도중에 앤-마리라는 미혼모를 만나서
그 주택지구에서 일어났다는 살인사건에 대해 듣게 돼.
후에 지인들 사이에서 이 화제로 이야기를 하던 중 평소에도 잘난 척 하던 인물에게 그건 거짓말 아니겠냐며 무시당하고,
자존심 문제도 걸리게 된 셈이니 여기저기 다니며 조사를 하게 되는 거지.
그랬더니 갑자기 이런저런 소문이 있다며 자기한테 주절거렸던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리면서 그런 소리는 한 적도 없다는 거야.
얼마 뒤 앤-마리의 어린 아이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내가 읽기로 이 단편은 배경이 되는 주택단지 사람들의 희한한 (그리고 아마도 으스스한?) 공모가 주가 되는 것 같아.
캔디맨은 생각보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편도 아니고, 결국 주인공을 희생시키는 것도 그 빈민가의 사람들이거든.
캔디맨은 그냥... 주인공의 환각일 수도 있는 셈이고, 그 장소에 서린 악령 비슷한 걸 수도 있지.

영화판에서는 캔디맨이라는 살인마 캐릭터에 조금 더 주목하면서
'도시전설'이라는 주제로 접근을 하는 것 같아.
주인공의 주변에서 살인이 계속해서 벌어지거든.
이게 주인공의 소행인지, 캔디맨의 짓인지를 불분명하게 처리하면서
도시전설이라고 치부하던 일들이 현실로 육박한다면? 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셈이지.

그리고 당시 이게 조금 인종차별로 보일 수 있다며 가볍게 논란이 되었던 모양이지만
영화판은 미국 자본으로 미국에서 찍는 영화라 배경이 자연히 미국이 되거든.
그런데 빈민가의 풍문을 소재로 하게 되니 흑인들이 사는 빈민가에 캔디맨도 흑인이 된 것 같아.
나는 이 수정이 꽤나 맘에 들었던 것이
영화의 후반부에 자기 목숨을 걸고 아이를 지켜 준 주인공에게 경의를 표하는 빈민가 사람들의 행렬에
뭔가 짠해지는 데가 있더라고. 뭐... 흑백의 화해? 라고 하면 침소봉대려나;

[The Madonna]
제리 콜로쿤이란 사람이 버려진 수영장을 사서 재개장을 해보려고 하는데
사업 구상이 부실했는지 그다지 투자를 받지 못하는 거야.
하여 에즈라 가비라는, 좀 뒤가 구리다는 평을 받는 사람한테까지 투자를 부탁해보게 돼.
직접 만나서 건물 내부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던 도중 전기도 나가서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서
가비가 벌거벗은 소녀를 보게 된 거야.

호기심 때문에 가비는 이후 홀로 이 건물을 찾고, 건물의 중앙부에서 이번에는 소녀들을 발견하는데,
한 소녀의 가슴팍에 형언하기 힘든 괴물체가 젖을 빨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중앙의 수영장에서는
기묘한 빛과 열기가 내뿜어져 나오고, 괴상한 무언가가 헤엄치고 있고...
뒤가 구린 만큼 적이 많았던 가비는 이게 일종의 함정이었다 생각하고 제리한테 복수를 하려고 해.

결말부에 이르면 저 소녀들의 정체가 뭐였는지 대강은 밝혀지는데
음... 스포일러지만; 그게 이전에 잡혀들어온? 사람들이었던 셈이거든.
제리랑 가비가 여체로 되어버리는 전개인 걸로 보아서는.
이야기가 좀... 당혹스러운 게, 그래서 작가가 저 건물에 살고 있던 괴물들이 뭔지 그다지 설명해줄 생각이 없어.
어쩌자는 건지;

[Babel's Children]
그리스 지방을 여행하던 바네사라는 여성이 외딴 길에서 저 멀리로 무장한 사람들에게 쫓기는 사람을 발견해.
호기심에 그쪽으로 가서 둘러보다가 희한한 수도원 비슷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고,
여기서 그만 저 무장한 사람들한테 잡혀서 갇히게 된 거야.
지금 진행중인 일만 정리되면 풀어주겠다고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타이르는 데다가
대접도 무례하거나 나쁠 건 없지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도 설명하지 않고 계속 갇혀있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답답해서 미치겠는 지경이 되는 거지. 그러던 어느 날 밤, 웬 노인이 자기 방문을 두드리고는
이곳을 탈출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꽤 재밌는 게,
저 노인을 포함해서 한 너댓명 정도 되는 인물들이 그 시설의 수감자들이거든.
그들의 주장은 자기들이 이 세계를 이끄는 두뇌이고, 각국의 수뇌부들을 그저 자기들이 내려주는 명령을 듣는 거라고 해.
핵무기라는 너무 큰 파괴력과 예측 불가능한 지도자들의 성정이라는 두 요소가 합쳐지면 세계의 파멸이 도래하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므로
자기들이 일종의... 철인 왕으로서 세계의 정세를 조율한다는 거지.
그리고 그 시설의 책임자인 클라인은 저들은 광인들이고, 위험한 살인자라서 수감을 했다고 설명하지.
결말부에서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 지 나름 판단할만한 정보를 주기는 하는데,
그것도 주지 않는 편이 이야기의 의도에 좀 더 맞지 않았나 싶기는 하더라고, 나로서는.


그러니까 이 5권에서는 이야기들이 전반적으로
어떤 상황 속에 던져진 인물들이 혼란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고,
독자에게도 시원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방식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 것 같아.
뭐... 일종의 신비감을 부여한다는 게 아주 나쁜 전략은 아니지. 매력이 있다면 있는 거고.

2017.4.25

자주 가던 헌책방 이야기

소위 신림동 고시촌이라고 불리는 대학동/서림동에 꽤 오래 전부터 살았어.
사실 내게는 신림9동/2동이라는 구분이 더 친숙하지만 ㅋㅋ
여튼 도림천을 사이에 두고 대로 하나로 양분되는 이 두 동네에서
대학동 사이드로 주욱 이렁저렁 가게들이 있거든.
80년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가 사라졌다는 사회과학서점 중 아직도 근근히 명맥을 잇고 있다는
'그날이 오면'이 여기에 있고, 그 같은 건물, 바로 옆에 지하로 헌책방이 하나 있어.
지금은 상호가 대교고서인가 그럴거야. 원래는 도동고서였는데, 왜 바뀌었는지는 조금 뒤에 얘기함...

원래 이 건물의 마주보는 오른쪽에 헌책방이 하나 있었거든. 상호가 기억 안나네;
여기를 정말 자주 갔었지. 뭐 뜸해도 하루 걸러 하루는 가다시피 했었으니까.
원래는 여기 주인이 웬 대머리 아저씨(ㅠㅠ)였고 조금 꾀죄죄한 아저씨가 가끔 가게를 보길래
아 뭐... 직원?이구나 했었는데...

여기서 [소돔의 120]일 고도판을 발견하고 계속 눈독만 들이다가
대머리 아저씨가 나한테 단골이고 계속 관심있어 보이는데 40000원에 주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원래는 얼마였더라; 여튼 나는 이게 괘 괜찮은 딜같아서 냉큼 거금을 들여 샀었는데
나중에 알라딘 중고서점 신촌점인가에서 비닐포장까지 되어있는 쌔삥을 발견하고 (심지어 가격도 쌌음)
땅을 치며 또 구매했던 기억이.... 지금보다 책 모으는 걸 더 재밌어했던 젊은 날의 과오라 하겠다.
심지어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이게 혹자들이 혀를 끌끌 차는 매서 취미라는 거겠지. 어쩌겠어?
여튼 그랬는데 어느날인가 갑자기 건물 지하에 웬 헌책방이 하나 더생기더라고? 그게 도동고서인데,
지금와서 보면 꾀죄죄한 아저씨가 대머리 아저씨한테 헌책방 운영 노하우를 좀 전수받은 모양새인듯 하더라고.
얼마 안있어 대머리 아저씨 헌책방은 없어졌는데, 이게 합의가 되어있던 상황인지 아니면
대머리 아저씨가 뒤통수를 맞고 배신감에 부들거리면서 폐업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왠지 후자같긴 한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eriabox&logNo=20107947129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96551.html

여튼 이 도동고서 아저씨가 한겨레에 자기 기사가 난 걸 스크랩해서 액자에 걸어놓은 것도 본 기억이 있어서
구글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 있네. 내가 봤던 건 두번째 링크의 내용이었는데,
여하간 여느 헌책방과는 다르게 꽤 산뜻한 곳이었어. 나는 진짜배기 고서를 찾아다닐 생각도 깜냥도 없는 처지라
뭐 눈독들이던 책이 싸게 나온 걸 보고 냉큼 주어오는 식의 손님이었지만. 여하간 여기를 자주 갔었지.

내가 하고싶었던 얘기는 사실 아주 대단한 건 아닌데,
내가 꾀죄죄하다고 얘기했던 이 사장님, 김종건씨가 조금 희한한 사람이었다는 거야.
굳이 말하면 열화판 도올같은 사람이었는데 왜 있잖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모를 이상한 썰 푸는 아저씨들.
자기 나름대로는 근거 확실하고 대단한 걸 (이상하게도 한학 비스무리한 것이 많음) 얘기해 준다는 데 막상 듣자면 좀 지리멸렬한...

한번은 내가 책구경을 하는데 나한테 뭐 허리 건강이 어떻다느니 얘기를 하시더니
요상한 런지 자세를 막막 취하면서 이게 고구려 무사들이 건강을 지키던 체조라고?
나한테도 해보라고 하고 뭐 심지어 자기 허리쪽을 만져보라고 하고...
대충 이미지가 잡히지?

맨날 가면 사극에 나올 것 같은 요상한 한자 책을 펴놓고 소위 공자왈맹자왈하듯 읊고 계시거나
뭐 어떤 날은 가면 불경이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고
어느 날은 일본어 방송을 틀어놓고 신문지에다 서예공부라도 하시는지 붓글씨를 쓱쓱 쓰기도 하시더라고.
약간... (나로서는 조금 허무해 보이는) 현학자 스타일이었던 셈이지.

그랬는데 어느 날은 또 가보니 나한테 말을 거시더라고?
뭐 이름이 어떻게 되냐는 거야. 그랬더니 대뜸 사람의 이름에 그 사람의 운명이 담겨 있다고?
이것이 '음성학'적으로 어떻고 저떻다고?
???????
어차피 자기만족이지 싶은데 내가 대뜸 개소리 집어치우쇼 할 수 없으니
네 네 하고 들어는 드렸는데 이게 참으로 당황스럽고 황당한 거라.
심지어 저 '음성학'이라는 용어가 나는 너무 우스꽝스러웠던 것인데
Philosophy : 철학관의 철학 = Phonetics : 이 아저씨의 '음성학' 이었던 게 아닌가 싶어져서 그랬지.
띠용 소리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났는지 모르겠다; 거의 불꽃놀이 수준이었음.

압권은 뭐였냐면 그러고 얼마쯤 뒤에 이번엔 우리 부모님 성함을 물어보시더라고?
가르쳐 드렸더니 두 분이 금슬이 좋다는 거야.
오호 통재라; 이게 더 틀릴 수 없는 말이었거든. 사적인 내용이니 여기서 굳이 더 밝히진 않겠지만.
내가 이 사장님을 면박을 주려면 줄 수 있었지만 속으로만 웃고 말았지.
나중에 보니 다른 손님들 붙잡고도 비슷한 얘기 하고 있더라고.
심지어 그 '음성학'을 들으려고 찾아온 것 같은 사람도 있어 보였고;
보험왕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혀가 그렇게 날름낼름 길쭉하셨던 건지?

아 상호를 바꾼 것도 내가 제대로 알아서 하는 얘긴 아니지만
아마 그 '이름철학' 때문이었을 거야. 도동고서보다는 대교고서가 무언가 낫다는....?
정작 사모님한테 내가 한번 스리슬쩍 여쭤봤을 때는 아니라고는 하셨는데
글쎄 정황이 저런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

최근 다시 가볼까 했는데 갈때마다 문은 닫혀있고
통로에 쌓여있던 책들이 휑하니 없는 것이 폐업을 했거나 옮겼거나 둘 중 하나같아 보이더라.
요전에는 알라딘 때문에 헌책방들이 고생이라고는 하시더니 설마?
거창하게 추억이랄 건 없어도 나름 자주 갔던 곳인데 그래서 조금 씁쓸은 하더라고.

2017.4.18

책 자랑


예에전에 발터 뫼어스 얘기가 잠깐 나왔던 게 기억나서
자랑하려고 찍어봄 ㅋㅋ
[푸른곰 선장의 13과 1/2의 삶]이던가?

예전에 독일로 유학갔다 왔던 친했던 선배가 선물해준 책.
내가 발터 뫼어스 좋아한다는 걸 기억하시고는 서점에서 이 책을 샀다고 했다 ㅠㅠ
너무너무 감동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읽었던 작가의 소설 중 이걸 가장 좋아하는데
발터 뫼어스 본인이 그렸다는 삽화나 표지가 예쁜 건 두말할 것도 없고
판형이 묘하게 귀여운데다... 뭐 위에서 말한 개인적인 사연(?)도 있다보니 아끼는 책.
사실, 나는 독어 수준은 정말 낮은 편이라서...
입문 수준 수업도 들은게 반올림해서 10년은 전이니;
뭐 소유 자체가 조금 즐거운 셈이지, 이 책은.
그래도 인생 길게 보면 언젠가는 읽지 않을까? 하는 책이다.

문득 생각이 막 나는데 차모니아 연작이나 조만간 읽을까 고민되네.

2017.4.13

Clive Barker, Books of Blood vol. 4


 글쓰기 지겹네 이거;
여튼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 연작 제 4권, [The Inhuman Condition]임.


[The Inhuman Condition]이야기가 조금 덜 완결되어 있는 편인데 이 단편은,
여하간... 대충 심심하면 노숙자들 패고 다니는 동네 양아치들이 어느 날
재수없이 걸린 아저씨를 털다가 뭐 쓸만한 게 있는지 뒤적거리던 중에
희한한 매듭을 발견해.

일정한 패턴으로 묶어놓은 줄을 다시 풀어내는 식의 퍼즐이 있는 모양이지?
이게 영국에서만 나름 애호가들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주인공 소년이 그런 부류였고, 이 녀석이 이 매듭을 요리조리 풀다 보니
이게 사실 뭐... 신비스러운 물건이었던 거지. 괴물을 부르는?

아마 <헬레이져>의 원형이 여기 있었던 걸까?
신비로운 퍼즐이라는 소재 말이야.
술술 잘 읽히기는 하는데 그렇게 건질 내용이 있었던 건 사실 아니긴 해.
특히 결말이 조금 흐지부지라는 인상이라서.

[The Body Politic]
야 이거 재밌더라.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인 찰리 조지라는 중년 남성의 '손'이 자의식을 갖게 된 거야.
양손은 끊임없는 예속상태와, 보잘 것 없는 짓거리나 맡아줘야 하는 현재의 상태에 불만이 쌓여 있었던 거지.
그래서 주인이 잠든 사이에 두 손이 계속 격론을 벌여.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여기까지 읽으면서는 손이 팔을 떠나면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재미가 있었던 듯 한데,
여튼 소설의 세계에서는 그게 가능하다는 식으로 전개가 되더라고. 뭐 그래줘야 재미있긴 하겠지.

그래서 먼저 탈출한 왼손이 다른 손 동지들을 찾아가는 거야. 손의 혁명이지;;
결말에서는 손의 군대가 일종의 메시아였던 주인공의 오른손을 모셔가려고 우르르 몰려오는데...

간단히 정리는 했는데, 이게 정말 재미있었던 단편이었던 이유는
내 신체가 내 의지에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당혹과 공포를 꽤 잘 그려내서였던 것 같아.
꼭 호러 소설에만 고유한 특성은 아니겠지만,
사실은 말도 안되는 상황설정을 꽤 설득력있게 받아들이게 하는 게 소설의 힘이고 작가의 재능인 것 같거든.
나도 읽다가 햐 나도 저렇게 되면 이렇게 경악하겠지 싶어서 문득문득 내 손을 한번씩 쳐다보게 되더라고.
상황의 설정도 흥미롭고, 전개도 제법 흡입력있고. 재미있고.

아마도 <이블 데드 2>가 이 단편을 좀 참조했을까?
자의식을 가진 손이라는 소재가 아주 흔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크레이지 핸드>라는 작품까지 나왔던 저 소재가 샘 레이미의 것이라고만 여겼었네.
정확한 내막은 모를 일이지만.

[Revelations]
이 단편은 읽으면서 굉장히 흥미로웠던 게,
연극을 염두에 두면서 써낸 소설인 것 같더라고.
설정은 시간은 폭우가 내리는 날 밤이고, 장소는 미국의 외딴 모텔.
인물은 전도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수행원, 모텔 주인과 그 딸,
그리고 전도사 일행이 묵게 된 방에서 죽었던 남자와 그를 쏘고 사형당했던 여자, 이 부부의 유령.
대강 몇시간 정도 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랄 것도 없는 자잘자잘한 상황들의 연쇄가 소설의 내용이야.
아마도 유령이 등장한다는 것 때문에 장르소설로 분류될법 하지 꽤 잔잔한 내용이기도 하고.

이야기는 저 전도사가 그야말로 꼬장꼬장하고 독선적인 기독교도의 전형이라는 사실을 축으로 진행돼.
예를 들어 자기 아내가 자기한테 지칠대로 지쳐서 진정제를 먹는 것조차 힐난해야 하는 인간이었던 거지.
그리고 유령 부부는, 남자는 난봉꾼이고 질려버린 아내가 그를 권총으로 쏴서 죽였던 역사가 있는 부부인데
희한한 섭리의 결과로 하필 소설의 무대가 되는 그 날, 그 역사적(?) 장소에서 부부 사이의 화해를 위해 만났던 거지.
그런데 전도사의 아내가 방에서 희뿌연 형상들을 보게 되고...

결말이나 유령 아내의 캐릭터라던가 등등 해서 뭔가 억압되던 여성의 해방 같은 주제를 다룬 것도 같은데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꽤 신선한 형식과 전개라서 재미있게 읽었어.
클라이브 바커가 연극 쪽에서 몸을 좀 담았던 모양이긴 하더라고. 1권에서도 눈치는 챘었지만.

[Down, Satan!]
이거는 거의 5쪽정도 분량의 짧은 단편이라 할 말은 많지 않은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주인공이 어느 날 자기가 믿음을 잃었다는 걸 깨달아.
그리고는 아무리 기도를 하고 성직자를 만나도 신이 자기를 돌아봐주질 않는거야.
그래서, 계획을 세워. 사탄조차 군침을 흘릴 악의 소굴을 꾸미고 거기서 사탄을 기다리는 거지.
사탄이 그를 만나는 순간, 신 또한 그에게 주의를 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때 비로소 그는 신을 만날 것이라는... 뭐 그런 계획인데,
꽤 희한한 상황설정이지?

[The Age of Desire]
이거는... 내 짧은 식견으로는
대강 늑대인간 이야기나,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류의 이야기에 한 자리를 마련할만한 단편같은데,
나름 신선한 포인트는 여기서 늑대인간이 된 인물은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최음제를 맞아서
성욕의 화신이 되어버린 인간이라는 거지.
뭐 남녀도 안가리고 그냥 박아버리는 괴물이 된 거야;
중간에 잰 체하고 다니던 수사관이 있는데 냅다 박아버리는 장면이 있거든. 피식 하게 되더라고.

할 말이 많이 떠오르는 단편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재미있는 소재이기는 했지. 발기한 하이드 씨라니;


책을 바꿨다는 기분때문인지 작가 본인이 뭔가 집필과정에서 성장이 있었는지
이전의 세 권보다 훨씬 더 몰입해서 읽은 것 같아. 책이 짧기도 했다지만 꽤 후루룩 읽어냈네.
어차피 장르소설에서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딨겠어. 정말 재밌게 읽은 것 같네.

2017.4.13

며칠 전에 산 책


[피의 책]을 3권까지 읽었으니 나머지도 읽어야지.

내가 산 건 미국판인 듯한데, 왼쪽부터 6,5,4권임.
맨 왼쪽의 [Cabal]은 피의 책 6권하고 [Cabal]이라는 중편이 합본된 구성인데,
왜 그런식으로 출간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네;
대충 보니 영국판에 있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또 수록이 안된 모양인데.

우스운 건 저 오른쪽에 있는 4권이 책이 절판되었던 모양이지?
내가 알라딘에서 주문하려고 해보니 이거는 POD에디션이라고 Print on Demand?
출판사에서 스캔본같은 걸 갖고 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이걸 인쇄해서 보내주는 방식이었나 봐.
그것까지는 그럭저럭 오케이였는데, 실물을 받고 보니 문제가 좀 있더라고.

막 인쇄해서 제본해서 보내준 거라 그런지 좀 불쾌한 잉크 냄새가 나는 게 하나.

그리고 위에 사진에서도 볼 수 있지만, 미묘하게 사이즈가 작음;
기왕 모으는 건데 크기에 일관성이 있어야지!

그리고 제본 방식이라 해야하나 인쇄 방식이라 해야하나... 둘 다인가? 여튼 결정적으로 맘에 안 드는 게
책의 오른쪽 면을 읽는 데는 큰 불편이 없는데

책의 왼쪽 면을 읽으려면 페이지의 오른쪽이 안쪽으로 찝혀있어;;;;
인쇄 자체가 페이지의 왼쪽에 여백이 좀 넉넉하게 되어있고 오른쪽은 조금 좁게 되어있는 거지.
아니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구성해서 출간을 할 정도면
이런 식으로 인쇄되면 좀 불편할 수 있다는 노하우가 쌓여있어야 되는거 아냐?;
아예 찝혀서 읽지도 못하는 수준은 아닌데 끝부분은 쫙 펴서 읽어야 되네 거참 ㅋㅋㅋㅋ


그래도 당장 다음에 읽어야 되는 4권이 이모양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빨리 읽어 치워야지.

2017.4.8

Clive Barker, Books of Blood vol. 3

피의 책 연작 3권을 다 읽었다.
과연 완독을 하고 보니 왜 국내 출간이 2권을 건너뛰었는지 알겠더라고.
나로서는 오히려 1권보다도 괜찮았어. 2권에서 느꼈던 실망감이 제법 가신듯.

지금까지 읽으면서 느낀 건데,
호러 소설은 참 희한한 장르일 수 있겠다 싶은 게
별의 별 것들에 인간성이 부여된다는 생각이 들어.
꽤 몽뚱그려서 말한 것이지만 소설의 세계관 안에서 지성이 부여된 존재들은
일종의 의인화인 셈이거든. 저건 인간이 아냐, 괴물이야! 라고 하지만
인간인 작가의 상상력 위에서 펼쳐진 것이라는 점에서 난 결국 그 또한 '인간'이라고 보고 싶어지거든.
그런 식으로 인간 아닌 것이 인간을 모방한다는 모티프가 정말 수도 없이 등장하는 것 같아.

더하여 냉소적인 세계관도 짚어볼 만 하겠네.
호러 소설에서는 인명이 경시되거든.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선 인명이 무엇보다 존엄한 것이니까
결국 호러 소설의 세계는 항상 기묘한 냉소를 품고 있는 거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가볍고, 파국을 맞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니까.

그러하므로, 호러 소설의 세계는 일종의 애니미즘적인 세계이기도 한 것일까?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굉장히 흐릿하고 거기서 한 걸음 나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마저 흐릿하거든.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인간이 될 수 있는,
의지... 특히 그 중에서도 악의와 그 악의로 인한 고통으로 만연한 세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하나만 더 짚자면,
이게 장르에 일반화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설이란 장르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거든.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이 사건들이 펼쳐지는,
또 그것을 묘사하는 리듬이 굉장히 빠른 것 같아.

예를 들면 주인공이 괴물과 맞닥뜨리고,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아마 공포?) 느끼고, 뒤돌고, 건물로 달려가고,
문을 잡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계단을 올라가고, 그러는 사이사이 뒤를 돌아보고, 또 그 사이사이 긴장을 느끼고,...
그러니까, 이게 단편집인 탓도 크겠지만,
전부 몽뚱그렸을 때 결국은 그닥 길지 않은 분량의 시간을 정말 세세하게 쪼개서 묘사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그걸 쪼개는 방식이나 묘사하는 사건사건의 리듬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80년대 공포영화스럽다고 느꼈어, 이 책은.
내가 1권을 읽으면서 읽는 속도가 잘 붙어서 놀랐다고 썼는데
아마 그래서 읽기가 수월했던 거겠지 싶어. 자극적인 사건이 빠른 리듬으로 서술되니까.

그리고 아마 이 책 뿐 아니더라도 이런 리듬의 서술을 하는 소설들은 많은 것 같아.
나는 가끔 어떤 소설을 읽다가 이건 소설이라기보다 차라리 영화를 서술하려고 한 글인가? 싶을 때가 있거든.
하다 못해 작가가 영화의 세례에서 무의식적으로나마 자유롭지 못했던 거겠지.


[Son of Celluloid]
도입부는 바베리오라는 범죄자가 경찰에 쫓기는 장면이야.
자신도 모르고 있었지만 뱃속에는 암세포가 제법 크게 자라고 있었고,
도주과정에서 오래된 극장의 뒷편으로 숨어들어갔다가 거기서 죽게 된 거지.
그의 목숨이 그 장소에 녹아 있던 수없이 많았던 환상들과 함께 녹아들어가더니...

그리곤 얼마쯤 뒤, 어느 운 나쁜 날,
심야에 극장에 남아 있던 관객 둘과 종업원 둘이 재수없는 밤을 보내게 되는 거지.
갑자기 화장실의 공간이 서부의 황량한 마을로 변하고, 웬 존 웨인이 나타나서 총을 겨누고,
전화기에서는 페터 로레가 대답을 하다가 돌연 그레타 가르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영화가 현실로 육박하는 거야.
(이것보다 조금은 더 복잡한 내용이지만, 뭐...)

주인공이 제법 살찐 여자라고 나오는데, 킬로로 환산하면 100kg가 넘는?
그런 부분에서 약간 의외성이 있는 설정이려나?

이 편에서는 '영화'가 괴물이야. 물론 인간성을 몸에 두르고 있지.
영화라는 매체는 탄생부터 사람들을 매혹시켰다는 점에서
그것이 의인화된 캐릭터는 꽤 흥미로울만한 구석이 있지. 환상의 집약체잖아?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아들'이 조금 덜 악의를 지닌 존재였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어.
순진무구한 '환상'이 자신의 본성(?)에 충실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생기는 전개가 더 일의관지하지 않나 했거든.
좀 추상적으로 말했는데 왜 그런 장면이 있어.
화장실이 서부극의 장소로 바뀌는 통에
거기서 일을 보던 등장인물을 '존 웨인'이 버릇이 없다며 쏴버리는 장면이 있거든.

여하간 결말부까지 하여 나름대로 매듭이 지어지는 모습은 좋았는데
오히려 조금 더 매력적일 수 있었던 발상이 전형적인 80년대식 장르물같은 느낌이 된 거는 같네.

[Rawhead Rex]
질Zeal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위치는 글쎄? 영국 어디쯤인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한 마을 청년이 물려받은, 놀고 있던 땅을 경작하겠다고 하다가 거기 봉인되어 있던 뭐... 괴물?을 그만 꺼내버리고
그 괴물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난리를 치고 다닌다는 내용이야. 물론 제목이 괴물의 이름이지.
난리를 치는 과정에서 교회로 쳐들어가서 verger가 뭐 '복사'라는데, 일종의 목사 도우미 같은 거래. 걔도 타락시키고,
아이들도 잡아먹고. 유아살해를 터부시한다는 영미권 문화라고 아는데 꽤 선정적이군! 싶더라고.

교회가 나왔기 때문에 이거는 뭐 종교적인 메세지가 약간은 있는 셈인듯 한데,
저 복사가 타락한 뒤에 내 주인님은 예수보다도 훨씬 전부터 계셨다 운운하기도 하고.
그런 식의 아류 사타니즘은 결국 기독교 거울상의 위악일 뿐이지 않나 싶어서... 뭐 하아품이고.

나는 이런류 괴물이 설치는 내용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
현대문명이 제공하는 어마어마한 살상능력의 무기들이 괴물들을 걸레로 만들지 않나 싶거든.
해결책은 둘 중 하나겠지, 괴물이 강하거나, 배경이 되는 곳이 낙후되었거나, 고립되었거나 중 하나든 둘이든.
이건 둘 다 아닌듯 한 전개라서 제법 신선하다 생각했는데,
그래서 결말이 좀 김이 빠지더라고. 뭐 저럴거면?; 싶어서.

[Confessions of a (Pornographer's) Shroud]
로니 글래스라는 착실한 회계사의 얘기야.
성실하게 잘 살던 인물이 돈좀 만져보려고 하다가 포르노 사업을 돌리는 일당하고 엮인 거지.
그 사실을 모르고 사업 관계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사업장에 들러서 온갖 도색잡지들을 보곤
충격먹고 대판 싸우고. 뭐... 악당(?)이 연줄이 있었는지 주인공을 오히려 포르노 왕으로 둔갑시켜서
언론에 흘린 거야. 인생 망한거지. 처자식도 다 집을 나가버리고.
그래서 주인공이 복수를 하려고 두 명을 죽인 뒤 결국 암흑가에서 처형당하는데,
이 복수를 향항 원념이... 안치소에 누운 그의 시체를 덮은 천에 빙의하고, 복수를 이어 나간다는... 뭐 그런 내용.

나는 자꾸 영화 <할로우 맨>이 생각났는데,
천쪼가리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돌아다는다는 점 때문이겠지.
그다지 트위스트는 없는 전개야. 복수도 잘 마치고. 그런 의미에서는 절정의 만족을 주나?

재미있었던 건 주인공이 도색잡지들을 보고 충격에 빠지는 장면이었어.
그까짓 거 2017년을 사는 우리에게는 조금 더러운 디씨 갤러리만 가도 뭐...
이제와서는 정말 일상적인 영역이거든. 아마 좀 특별한 사람들에게는 80년대에도 각별하지는 않았겠지.
당장 마지막 단편은 남창 이야기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이야기 속에서의 관념적 인간이라도
포르노를 보고 충격먹어서 자기 인생을 뒤집어놓을 선택을 한다는 게
착실한 인간상으로 그려지는 걸 보면 꽤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되기는 하지.
80년대 보통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보게 되는 느낌? 생각해 보면 30년도 전 얘기거든.

[Scape-Goats]
남녀 두 쌍이 요트를 타고 유람하다가 재수없이 한 섬에 부딪쳐서 상륙하게 돼.
지도에도 없던 섬이 갑자기 항로에 나타나서는 뱃머리를 때린 거지.
이들은 꽤 황량한 섬을 이리 저리 둘러 보다가 울타리에 갇힌 양 세 마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풀도 안 자라는 이 섬에 웬 양이? 왜?

왜 김 나는 밥이 올려져 있었다는 이어도 전설같은 게 생각나서
연관된 것이 하등 없는데도 나는 괜히 오싹한 내용을 기대했었는데
그렇게까지 오싹한 단편은 아니었어.

그래도 기본적인 설정이 꽤 매력적이기는 했지.
스포일러인지는 몰라도 저 섬은 결국 뭐였냐면
해류가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이라서 1차, 2차대전을 포함해서 엄청 긴 시간의 온갖 곳에서 흘러온 시체들이
한 곳으로 모여 이루어진 섬이었던 거거든. 저 양들은 영혼들을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었던 거고.

결말이 좀 재미있었는데 주인공은 죽고 난 뒤인데도 서술은 계속 이어지더라고.
죽음이 끝이 아닌 세계를 그린다는 게 얼마나 희한해?

[Human Remains]
주인공 개빈은 제법 잘 생겨서 그걸로 빌어먹고 사는 남창이야.
어느 날 고객에게 서비스를 주러 그의 집에 따라갔다가, 기묘한 걸 보게 되지.
욕조 속에 담긴, 인간의 형상을 한 이상한 물체?
그 날 뒤로 자기는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면서 해코지를 당하고, 등등...

꽤 뻔하지만, 이건 도플갱어의 이야기야.
인간을 흉내내는 괴물이 등장하고,
사실 원래는 먹잇감이 되었어야 할 주인공은 미모 때문에 다음 모방 대상으로 선택되었던 거지.

이 단편도 결말부가 꽤 재미있는데,
인간 아닌 것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는...
그런 대비를 잠깐 그리거든.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어.
물론... 사실은 그런 모습들도 전부 인간이겠지만.


여하간, 드디어... 이 책을 완독했네...
거진 10년은 전에 사서 이사다닐때마다 언젠간 읽을거라며 챙겼던 책을 드디어...
체증이 내려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2017.4.7

Clive Barker, Books of Blood vol. 2

이어서 올리는 감상문.
사실 며칠 전 부로 2권까지 읽었는데 이걸 가지고 뭐라고 끄적인다는 게 또 일이더라고.
막상 보면 개발괴발 글이거늘.... 글쓰기의 지난함이여! (하고 폼을 재본다)

2권을 읽으면서 희한하다고 여겼던 것은
우리나라에 출간되었던 이 피의 책 연작이 두 권이었는데,
두 번째 출간된 권이었던 [요괴 렉스]가 연작의 3권을 번역한 것이었다는 사실이야.
왜일까? 2권에 어떤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독서를 마친 후의 내 생각은 아마도... 출판사 측에서는 2권이 썩 재미있지 않다는,
그래서 판매량에 영향이 있을 것 같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해.
그렇게 큰 출판사도 아니었고 (아마 지금은 없어진...듯?) 책을 낸다는 건 어쨌든 모험인 셈이니까.
다시 말해 내 감상은 2권이 그렇게 만족스러운 편은 아니었다는 거지.

[Dread]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을 정말 많이 읽고 싶었어.
왜였는지도 기억 안나지만 뭐 아마 어딘가에서 추천을 들었던 거겠지.
더하여... 제목의 심플함을 봐. 대체 저렇게 단도직입적인 제목을 가진 단편은 어떤 내용을 말해줄까?
두려움이라니... 어떤 기기묘묘한 이야기로 나를 매혹시켜주겠냐 이 말이야.

이야기는 대강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져.
주인공 스티븐, 퀘이드, 셰릴. 이 세명은 대학생인데, 퀘이드라는 인물은 좀 독특한 철학을 가졌어.
뭐... '두려움'의 탐구자? 철학자? 같은 거지. 인간의 실존은 두려움을 바탕으로 하고,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매한 자들을 자신이 '두렵게 해줌'으로써 계몽시키는? 뭐 그런 삐딱한 인물인 거지.
개인적으로는 여기서부터 조금 핀트가 어긋난 기분이었는데
대뜸 플라톤이나 벤담 따위는 한량의 주절거림 정도라고 비웃는 모습이 되려 나에게는 꽤 같잖아 보였기 때문이야.
인물과 그의 언행이 독자인 나에게 공감을 못 불어넣더라고.

여하간 제법 자기주장이 강한 채식주의자 셰릴과,
어릴 적의 일시적인 청각장애로 트라우마를 가진 스티븐이
이 퀘이드에게 '계몽'되는.... 내용이 대강의 줄기인 것 같네.

기대가 컸는데 거기에 부응이 안되어서 좀 객관적인 판단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첫 번째 단편부터 조금은 실망스러운 독서였어.
특히 결말부는.... 음.... 홀로 고고히 '가르침을 준다'는 미명 하에 남을 괴롭히고 앉아있던 인물이
제대로 당하는 모습은 나름 고소한 맛은 있었지만,
이 소설은 애초에 그런 골계를 겨눈 작품은 아니란 말이지;
의도에서 벗어난 감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어딘가 조금 엇나가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돼, 나는.

[Hell's Event]
런던에서 자선 행사로 경주대회가 열려.
거기에 참가한 달리기 선수들이나, 그걸 보며 환호하는 관중들 그 누구도 몰랐지만,
이 대회는 이면에서 사실 지옥과 지상 사이의 건곤일척의 대승부였던 거지.
(물론 자기 정체를 숨긴) 지옥 대표선수가 승리하면, 지옥이 지상 위에 펼쳐지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뭐... 소설에서는 100년? 이라고 한 것 같은데 잠시동안은 다시 인간세가 이어지는 거지.
음... 이 간략한 줄거리만으로도 뭔가 너절한 느낌이 좀 있지 않아?
내가 더 그렇게 보이도록 간추린 것은 같지만 말야.

아마도 이 단편은 다분히 일상적이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심지어 주인공이 몇 번이나 환기를 하거든, 이건 별것도 아닌 자선행사 경주일 뿐이라고)
사실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그런 비틀림에서 착안한 소설이지 싶어.
지옥의 사자라는 애들이 심각한 척 하면 할수록, 일상적인 경주 대회라는 대비 속에서
꽤 희한한 인상을 주는 거지.
하여... 뭘 하려고 했는지는 대강 알겠는데, 아주 매력적인 단편은 사실 아니었지 싶네.

[Jacqueline Ess: Her Will and Testament]
이 단편은 제법 괜찮았어.
재클린 에스는 평범한 가정주부야. 지긋지긋한 일상에 지친 그녀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고 있던 힘을 깨닫게 돼. 그녀는 뭐라고 하지 그걸? 사이코키네시스? 였던 거지.
죽어버리라고 생각하면 정신과 의사가 목이 픽픽 꺾여 죽고, 뭐 그런 것.
이런 '힘'을 깨닫게 된 그녀는 이 힘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배워나가고, 결국 뭐... 좌절하기도 하고.

이렇게 풀어보니 역시 범속한 이야기이지 싶지만,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에서 마음에 들었던 점은 이거였어.
그 원형을 내 식견으로는 정확히 지목하기는 어렵지만
19세기-20세기초에 소설에서 많이 등장했던 인물의 유형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보바리 부인]으로 대표되는 억눌린 가정주부들이 있는 것 같거든.
이 소설은 내 생각에는 그런 일종의 클리셰를 비틀어 놓은 소설 같아.

권태를 느끼던 가정주부가, 힘을 얻고, 그 힘을 자각하고는 심지어 중반에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소설 세계관에서는 손에 꼽힌다는 거부를 찾아가기도 하거든.
권력의 행사를 배우기 위한 거지.
그 힘 때문에 그녀 주위의 남자들은 그녀를 두려워하게 되고, 그래서 매혹당해.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 인간이 지닌 권력에 대해 염두를 두고 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네.

[The Skins of the Fathers]
아... 이 단편은 책을 들기 시작한 뒤로 가장 별로인 단편이었는데....
이야기에 축이 없어.
인물도 많고, 사건도 많은데, 정합성도 없고, 결말도 흐지부지야.
아리조나 사막에서 괴물들의 습격을 받은 한 마을...이 그럭저럭 주요 소재인듯 한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사업가? 회사원?의 이야기가 섞이고
그 괴물들에게 강간당해서 괴물의 아이를 낳은 여자와 그 아이의 이야기가 섞이고
그러더니 결말부에서는 그냥 아이도 죽고, 대뜸 괴물들에게 희한한 능력이 있었다는 식으로 다 처리되고,
정작 괴물들은 그냥 사라졌다...는 식이고.
이 단편으로 뭘 보여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 나는.

굳이 짚을만한 점이라면 괴물들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비틀림 정도일까?

[New Murders in the Rue Morgue]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포우의 유명한 단편을 염두에 둔 편이야.
사실 난 포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았거든. 이 편을 읽으려고 예비독서로 포의 단편까지 읽게 됐네.

포우의 단편은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는데
이 이야기가 가진 대단한 역사적 가치는 둘째 치고서라도
나는 이렇게 기능적이기만 한 이야기가 썩 매력적인 것 같지 않거든.
그리고 자기 혼자한테만, 그리고 자기 홈그라운드(자신이 주인공인 소설) 안에서만
딱딱 맞아 떨어지는 짜고치는 고스톱에서 판돈 따가는 인물인 주제에
잘난척이나 하는 탐정류 캐릭터(바로 이 뒤팽이 원조라는)도 좀 재수없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포우도 이 소설이 그렇게 찬사를 받는 걸 조금 이해 못했다는 걸 줏어읽은 것도 같고.

여하간, 이 단편의 기본적인 설정은
주인공 루이스의 할아버지의 동생이 오귀스트 뒤팽이었다...는 거야.
엥? 이거 완전 김전일 아니냐?

그렇다고 대뜸 루이스 소년의 사건부가 펼쳐지는 건 아니지만.
시간적 배경은 소설이 쓰여질 당시의 현재인 것 같아, 80년대이고, 주인공은 이미 노쇠한 70대 노인이지.
노년에 회화로 예술계에서 명망을 얻게 된 주인공은 젊은 시절 친구였던 필립이 살인죄 누명을 썼다는 소식을
필립의 동생 캐서린에게 전해듣고, 어떤 내막이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해 파리에 도착하는 거지.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향수를 진하게 뒤집어 쓴, 면도날을 지니고 다니는 거구가 자꾸 모습을 드러내고...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에서는 범인...이라고 해야 하나;
여튼 그 인물의 동기가 굉장히 이해가 안 갔는데, 그게 꽤나 열쇠가 되는 지점이라서
결국 단편 자체가 조금 아리송한 기분이 있어.
애초에 일종의 원작이 존재하는 패러디물인 상황에서
원작에 대한 큰 존경이 없는 나로서는 거기서 어떤 맛을 찾기도 어려웠고.
하여 아주 흥미로운 독서는 아니었던 것 같네.

2권의 감상을 이렇게 대강 끄적여 봤지만,
드디어 읽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었지 아주 즐거운 독서는 사실은 아니었어.
안타까운 일이네;

지금까지 읽으면서 특기할만 했던 건,
읽는 속도가 꽤 잘 붙는 책이라는 거야.
아마도 작가인 클라이브 바커가 글을 많이 꼬지 않고 묘사 위주의 서술이 많은 탓일까?

2017.4.2

Clive Barker, Books of Blood vol. 1

클라이브 바커는 사실 한국에서는 소설가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겠는데,
요즘은 그런 커뮤니티를 들락날락거리지 않고 있어서 얼마나 회자되지 잘 모르겠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포영화 필견 리스트에 꼭 들어가던 <헬레이져>시리즈를 만든 사람이다.
뭐... 80년대 중반 이 [피의 책]연작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자기 작품이 영화화된 꼴이 맘에 차지 않아
직접 메가폰을 잡아서 저 <헬레이져>를 만들었다는 건 감초처럼 따라붙는 설명이었고....

글쎄, 그보다 조금 더 뒤 세대라면 아마 [클라이브 바커의 언다잉]이나 [제리코]같은 게임의 세계관을 다듬어준
감수자...이려나? 여튼 그런 역할로서도 나름대로는 유명할지도.
개인적으로는 이 [언다잉]을 너무너무 재미있게 했었긴 해도, 그 재미가 모두 클라이브 바커의 덕은 아닐 거라고는 생각해.

다재다능한 사람이라서 자기 책의 삽화나 표지를 직접 그리기도 하고,
<헬레이져>로 유명해진 특유의 사디즘적 디자인으로 피규어를 발표하기도 하고 (물론 디자인만 본인이 했겠지) 등등
나름 러다이트 신념이 있어서 컴퓨터도 잘 안만지려 하고 커밍아웃한 게이인
하고싶은 건 두루두루 하고 사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여하간 이 양반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이 [피의 책]은 한 권에 대강 5편 정도의 단편이 수록된 구성으로
총 6권이 나온 연작인데, 뭐 연작이라고 해봐야 같은 타이틀로 묶였다는 거지 딱히 뭐 공유되는 지점은 없어.
84년 첫 권이 출간되고 나서 장르 판에서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라는데
가장 두드러진 찬사는 역시 호러소설의 마왕 스티븐 킹이 "나는 호러의 미래를 보았다"고 상찬했던 거겠지.
내가 가진 책의 앞장을 보니 "그는 심지어 나까지 겁먹게 한다... 나는 밤에 혼자 이 책을 읽지 못 하겠다..." 등등
거장 소설가다운 구라로 칭찬을 늘어놓는 스티븐 킹의 몇 마디가 적혀 있기도 하네.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진 건 이 책이 우리나라에 출간된 적이 있기 때문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한창 들락날락거리던 호러 커뮤니티.... 아마 호러존이었던가? 아는 사람은 알겠지.
여튼 거기서 드디어 클라이브 바커의 이 대작이 우리나라에도 출간된다며
누군가 글을 올렸었거든. 그 반짝거리던 미사여구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문구는 클라이브 바커의 날고기와 같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문체를 잘 살리지는 못했다는 평이었는데,
거기서 감탄 또 감탄을 한거지 나는. 아니 그런 문체가 뭔데? 그리고 그런 문체를 어떻게 감지하는데? 저 사람은 원서를 읽어?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2305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5420
여하간 그닥 재미가 좋지는 않았는지 두 권만 출간되고 말았긴 하지만,
그래도 용돈 받아쓰는 학생 주제에 용돈 모아서 두 권 모두 사놓을 만큼의 뭐... 수집욕이겠지, 는 있었거든.
나로서는 그런 개인적 경험 때문에 조금의 애착이 있는 책인 셈이야.
결국 국내 출간은 요원하다 싶어진 상황에서 원서라도 사보자 했던게 이미 몇 년 전이고.
이제야 읽어보기 시작한 셈이지 사실.

위에 사진을 올린 책은 1,2,3권을 묶은 합본인데,
희한하게도 내가 찾아볼만한 데서는 4,5,6권 합본은 없더라고?
글쎄, 이 시리즈는 영미권에서도 생각보다 지지를 오래 받은 책은 아니었던 셈인 걸까?
본론만큼 길어진 듯한 서론은 여기서 그만 두고.

1권
사실 1권은 접한 사람이 제법 될 것 같아.
이미 출간이 되기도 했고, 심지어 다른 출판사에서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개봉에 즈음해서
한몫 땡겨보려 했는지 다시 출간하기도 했었거든.

[The Books of Blood]
이 이야기는 연작의 그야말로 도입부를 이루는 내용이야.
귀신들린 집에서, 심령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원과 귀신들린 척 하는 청년 사이의 아슬아슬한 거짓말 대결?
같은 내용인데, 뭐 그 사이에는 남녀 사이의 성적인 긴장도 있고... 대충 그런 식이지.

그런데 뻔한 반전은 이 집이 사실 진짜로 귀신들린 집이었다는 거지 ㅋㅋㅋㅋ 뭐, 영혼들이 지나는 일종의 정류소?
이 청년이 재수없이 영혼들에게 붙들리고는, 오랜만에 피와 살을 접한 이 영혼들이 자신들의 갈망을 담아서
이 청년의 살 속에 자기 이야기를 손톱으로 파서 긁적여놓는 거지.
이 연작은 그 이야기야. 살 위에 피로 각인된 책. 당신들은 피의 책을 읽는다는 거지.

[The Midnight Meat Train]
한밤의 식육열차? 로 번역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꽤 인상에 남는 단편이야. 실제로 지지도가 높은 편으로 알고 있고, 심지어 꽤 최근에 영화화도 됐었지.
뉴욕에 거주하는 유태인 카우프만이 주인공이고,
극중에서는 정육점의 고기가 그렇듯 미끈하게 '도축'된 시체가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지지. 연쇄살인.
이 살인마의 이름은 마호가니인데, 나름의 사명을 띄고 있는 걸로 묘사돼. 점점 늙어가는 자기 몸뚱이가
작업을 지연시킨다고 생각하지. 여느 날과 같이 사냥에 나선 그는 심야 지하철 칸에서 먹잇감을 찾아서 작업을 시작하고,
재수없게도(?) 카우프만이 야근 끝에 그 열차에서 졸고 있었던 거지.

이 이야기는 개인적으로는 80년대 유행했던 슬래셔 장르를 비틀은 내용이라고 생각해.
왜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같은거 말이야.
장소의 배경은 시골이 아닌 도시이고, 주인공은 처녀가 아닌 아저씨고,
살인마는 괴력의 거한이 아닌 왠 배나온 아저씨고(심지어 뭐... 여자의 입술을 가졌다?는 묘사도 있음)
살인의 이유는 정신이상을 가장한 젊은이들의 방탕의 단죄(?)가 아닌 나름의 이유가 따로 있고
살인의 방식 또한 무차별적인 난도질이 아니고 (이 또한 목적이 있어서지만) 전문적인 백정의 손길이었거든.
심지어 마호가니가 자신이 점점 늙어가기 때문에 후계자가 필요하고, 자기 노하우를 전수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어.

개인적으로는 몇 번 읽어봤지만 결말부는 이해가 조금 안 되는 편인데,
어딘가에서는 이걸 사회의 은유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역시 이해는 잘 안 가.
카우프만이 대체 뭔 본 건지?;

이제와서 내 생각에는 위에 말했던 날고기에서 피가 떨어진다느니 하는 문체가 이 단편을 보고 하는 말이었지 싶기도 해.
시체가 난무하고 살을 찢고 베어내는 묘사가 꽤 선연하게 이루어지고 있거든.
지금도 기억에 남는 묘사 중 하나는 카우프만이 도축된 시체를 처음 보았던 장면인데
그의 눈보다도 내장이 먼저 참극을 보고는 내용물을 게워내려고 했다는 식의 서술이 있거든.
속속들이 한겹한겹 모두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고 그 울렁거리는 한겹마다
고통이 새겨져 있는 그런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리고 싶어하는 것 같아, 작가는.
인간의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속성을 상기시켜주고 싶어한다는 느낌?
세상에 누가 불닭볶음면같은거 먹고 나서 같은 때가 아니고서야 자기 내장을 의식하면서 살겠어.

[The Yattering and Jack]
여기서 야터링은 하급 악마의 이름이고, 잭은 비범한 수준으로 평범한 인간의 이름이야.
둘은 다른 누구도 모르는 대결을 펼치는데,
야터링은 잭을 광기로 몰아넣어야 하고, 잭은 그걸 참고 또 참아서 야터링을 안달나게 만들어서
뭐, 악마의 법칙 따위가 있는 모양이지? 절대 대상에게 직접 손을 대서는 안 되고, 배정받은 '집'의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걸 어기게 해서 자기 종으로 삼아야 되는거지.
물론 그게 목적이라기 보다는 재수없이 자기한테 달라붙은 악마를 쫓아내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거지만.

근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이 잭이 어마어마하게 둔감한 인간이라는 거지.
자기 부인이 바람피우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도 그저 "케 세라 세라" 한마디 하고는
그런가보다~ 하는 통에 오히려 부인이 제발 차라리 나한테 화라도 내라면서,
당신한테는 내가 그것밖에 안되냐면서 울부짖다가 결국 자살해도 무덤덤한 그런 인간이니까.
야터링이 미쳐 나가는 거야. 지옥에 가서 벨제붑한테 제발 이놈 담당에서 빼달라고 애걸복걸을 하는데
뭐 높으신 분들 생각은 따로 있는 거지. 까라면 까야 되니까.
그래서 머리를 쥐어 짜내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켜도
잭은 그냥 옆집놈들이 시끄럽네, 이러고
건물이 좀 기울었나보네, 이러고.
고양이를 세 마리나 갈아치울 때까지
변기물에 빠뜨리고, 불에 태워서 죽이고, 아예 그냥 터뜨려서 온 내장을 방 안에 흩뿌려 놓아도
망할놈의 개들이 집에 들어왔나, 하는 놈인 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따로 살던 잭의 두 딸이 명절을 맞아서 집에 찾아온다고 해.
여기서 이야기가 재밌어지는 거지.

이 이야기는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파우스트]를 참조하는 것일까?
악마와의 계약이나 대결에 관한 내용은 꼭 원전이 파우스트 박사의 전설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여하튼 저렇네.
그런데 야터링도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니고, 잭도 파우스트가 아니지.
굉장히 질 낮은 버전의 파우스트인 셈이고, 그래서 소극이 되는 거겠지.
가볍게 읽기 좋은 단편이야.

[Pig Blood Blues]
소년원에 새로 부임한 전임 경찰 레드먼이 주인공이야. 새로 부임은 했는데,
기존에 있던 직원들은 묘하게 불친절하고, 소년원이니 만큼 껄렁거리는 애새끼들 틈바구니에서,
유약한 녀석을 발견하고, 이 녀석을 도와야겠다고 맘을 먹는데, 뭐.... 기묘한 분위기, 음모가 있었던 거지.
이 소년원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
상황의 설정이나 내용의 전개가 너무 전형적이어서 80-90년대의 평범한 스릴러/공포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어.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도 결말부가 조금 아리송한데,
대체 왜 그런 전개가 되는 건지 나로서는 파악이 안되더라고;
분위기는 나름 괜찮고, 내용의 전개도 속도감 있어서 나름 재밌게는 읽었지만.
할 말이 많지 않네.

[Sex, Death, and Starshine]
아... 이 단편은 정말 좋았어.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공연하려는 소도시의 극장 이야기야,
특히 그 극의 감독이 주인공인데. 성이 캘로웨이 같은데 이름이 기억 안나네.
굳이 따지면 이 이야기는 반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나름대로 예술을 하려는 사람이 현실 앞에서 겪는 지지부진한 엿같음? 비슷한 거야.
이 감독은 나름대로 뭔가 해보고 싶은데
극장주는 돈만 밝히는 놈이고 연기자들은 형편없고, 자기 잘난 맛만 알고,
결정적으로 여주인공 비올라를 맡게 된 여배우는 그야말로 형편없다는 말도 부족한데
왕년의 드라마 스타인 것 플러스 자기 좆을 빨아주는 여자라 이게 진퇴양난인 거지.
예술적으로 완성도있는 작품을 상연하고 싶은 마음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거야.

여기서 리치필드라는 인물이 등장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 인물은 대뜸 '오직 예술'을 설파하는 거지.
본인은 예전 이 극장에 관계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번 상연이 이 극장의 마지막이 될 거란
정보를 접수했다는 거지. 그래서, 자기가 아끼던 극장의 마지막 공연이 그런 여배우로 엉망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자기 부인인 콘스탄치아가 그야말로 완벽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해.

이게 중반부까지는 무미건조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다가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제법 환상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소설이거든.
결론적으로는 이 이야기는 유령 극단의 이야기가 되는데,
걸어다니는 시체가 되어버린 인물들이 그럼에도 '우리는 삶을 연기하지!'라며 끝을 맺는 장면이
꽤 재미있더라고. '연극'이라는 단편의 주 소재와 맞물려서.
인간이 아닌데 인간인 척 하는 존재들을 그림으로써 도리어 '인간'이 무엇인지를 좀 보여주는 느낌?

[In the Hills, the Cities]
이 단편은 유고슬라비아 지방을 여행하던 한 커플이 겪는 이야기야.
이 둘은 남자, 게이 커플인데, 뭐 그게 엄청 이야기에 중요한 건 아니고.
지도에도 없는 희한한 곳으로 잘못 들어온 이들이 맞닥뜨리게 된 건....
어마어마한 참극이었던 거지.
이게 스포일러를 안치고서는 내용을 설명하기가 어렵네;

여하간 이 이야기에서 정말 흥미로운 건
내용의 주 소재가 되는 어떤 존재(?)인데
방금도 위에서 썼듯이 인간 아닌 것이 인간으로 화하는 과정...이겠지, 이것도.
그 상상력 자체가 놀랄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
그리고 그게 잘못되면서 벌어진 아수라장 또한... 그정도로 대규모 인명피해가
악의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전개는 묘한 비틀어짐이 있는 거지.
보통은 그런 참극의 묘사는 어떤 악마성을 전제하거든. 뭐, 히틀러라던가.

혹자는 말도 안된다고 하겠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여하간 그 상상력의 크기라는 점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단편이네.

이 단편 초반부에는 질펀한 게이 섹스의 묘사가 아주 쬐끔 등장하는데
으....; 서로 키스를 나누며 잡잘한 정액의 맛을 느꼈다느니 하는 글귀를 읽고 있노라면
작가는 자기가 쓰는 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거거든.
클라이브 바커는 게이란 말이야. 본인의 체험이 반영되지 않았을 것 같지 않단 말이지.
으....;


사실 2권까지는 읽어서 쓰는 김에 2권도 쓰려했는데 지친다;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도 많았는데 어째 쓰면서 지치니 그게 다 나오지도 않네
여튼 2권은 다음에 다른 글을 쓰기로 하고....
스압글인데 혹시 읽어준 형들 있으면 감사감사

2017.4.1

클라이브 바커, [피의 책] 중에서...



클라이브 바커의 단편집이다. 읽고 나서 글도 짧게 올려야지 언젠가는 ㅋㅋ;
여튼 요즘 이걸 붙들고 있는데, 재밌는 글귀가 있어서 올려보려고.
2권에 있는 단편 Jacqueline Ess : Her Will and Testament에서 발췌하는 것.

She remembered the old joke. Masochist to Sadist: Hurt me! For God's sake, hurt me! Sadist to Masochist: No.

그녀는 오래된 농담 하나를 떠올렸다. 마조히스트가 사디스트에게 말했다. 날 괴롭혀줘! 제발! 사디스트가 말했다. 싫어.

뭐.... 철두철미 100% 마조히스트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런 인간에게는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되려 고통일 수 있을까?
웃기더라고.

(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