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3일 수요일

드니 디드로, 배우에 관한 역설

당장 루소나 볼테르처럼 계몽사상가들은 연극이라는 예술장르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연극이란 꽤나 대접받았던 장르였던 모양.
여기서 드니 디드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던 것이겠고 본인이 희곡을 써서 상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디드로가 연극과, 특히 배우의 연기에 관하여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짧은 책이다.

플라톤의 본이 있어서인지 근대 사상가들이 대화체 저술을 자주 시도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디드로의 책을 읽으면서 그게 사실이었음을 실감한다. 이 책 또한 두 명의 대화 형식을 띠고 있다.

이것으로 디드로의 책을 읽은 것도 몇 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건
기대보다 흥미롭지 못한 독서가 된다는 인상인데 그건 아마도
번역이 좋지 않거나,
원문 자체가 난삽하거나,
저작의 주제의식에 내가 공감하지 못하거나,
저자가 드는 사례나 사용하는 용어 등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등등일 터이다.

이번 독서로 문득 들은 생각이지만 디드로의 글은 대단히 당대를 밀착해 있다는 느낌이다.
이미 잊힐대로 잊혀진 정치가, 작가들의 일화나 예시들이 빈번하여 글을 따라가기 버겁다.
이건 인상일 뿐이니 어느 글은 안그렇겠냐 하면 답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더하여 디드로가 좀 난삽한 글을 쓴다는 평은 꾸준히 있어왔던 모양으로
2류 작가 취급이나 받다가 재평가를 받은 것이 생각보다도 최근의 일이라 하니
(그나마도 그 재평가의 골자가 '글쓰기의 혼란상'을 체화한 작가라는 식의,
이현령비현령식 불란서 비평가 말버릇같은 것이 되어놓으니 나는 조금 도끼눈을 뜨게 된다)
내가 느끼는 이런 곤란도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은듯 하다.

여하간 이 책의 기본 골자는 이런 물음이다.
"가장 뛰어난 배우란 어떤 존재인가?"
요컨대 배우라는 직업에 있어서의 '이데아'는 어떤 특질을 지녀야 하는지를 묻는 것인데
디드로의 주장은 뛰어난 배우는 자신이 보여주는 감정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어져서
냉정하게 자신의 몸짓을 계산할 줄 아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판단력이 좋고, 냉정하고 침착한 관찰자로서 통찰력은 요구되지만 감성은 전혀 요구되지 않는 인물이다.(p19)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배우의 재능이란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외부적 기호들'을 알맞게 토해냄에 있다.(p.30)
배역의 감정이 배우 자신의 것인 양 취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은 단적으로 우스꽝스럽기 때문.

여하간 디드로는 이를 "자연 그대로의 배우"는 형편없다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자연-인공(문화?)의 이분법이 여기서 적용되는 셈이겠고 디드로는
연기의 기술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겠다.
무엇보다도 배역의 감정을 배우 스스로 느끼는 방식의 연기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배우를 지치게 만든다는 점과 그것이 재연 불가능하는 점이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그렇다면 인위적인 관습의 연마가 유의미해지는 근거가
하나는 극장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이라는 점인데 연기의 패턴은 일상생활의 패턴과는 확연한 차이를 갖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연기 톤으로 몸짓을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기 마련이다.(p.35) 반대도 마찬가지겠고.
더하여 영국/프랑스의 극장 풍경, 즉 희곡들의 성격이나 그 문화 하에서의 연기 관습이 다르다는 점(p.19) 또한
연기를 단련함이 유의미한 이유가 된다. 즉, 관습이란 것이 실존하는데 이는 문화의 내부와 외부에서 관찰 가능하다는 것.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그 관습이라는 것 자체가 18-19세기 유럽 연극에 국한된 현상일 뿐일 텐데
당대의 과장되고 정형화된 연기는 현대의 지배적인 매체인 영상물에서의 연기와 판이할 수밖에 없겠고
현대의 연기는 '배역 속에 녹아드는' 것이 더 뛰어남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나?
그런데 이건 사실 조금 잘못된 질문인데 현대 영화 등에서의 뛰어난 연기 또한 결국 우리가 관객으로서 관찰한
연기의 뛰어남, 소위 그럴싸함이고 그래서 그 연기와 감정에 공감을 한 것이니
'관찰자에게 감정을 불어넣는다'는 기본 도식을 상한 것은 아니기 때문.
당장 디드로 본인데 이런 관습이 변화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p.36)

그러므로 제목이기도 한 배우의 관한 역설이란
'전형'으로서의 이상적 배우는 가장 거짓말을 잘 하는 인물이고 그러기 위하여 가장 무성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상적 OO'을 정의함에 있어 '가장 ~한 존재'라는 기준이 배우라는 직업? 기예?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것들에-배역/감정) 가장 ~하지 않은 존재'여야 한다는 성격, 이것이 배우에 관한 역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대학 신입생 때 과 활동으로 연극 배우를 해본 일이 한 번 있었다.
그때 느꼈던 것이 이와 똑같았는데 내가 느끼는 그대로 해서는 공감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분노의 감정을 연기할 때도 정말 실생활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화낼 때처럼 새된 소리를 질러서는
그걸 곁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그저 새된 소리만 빽빽 지르는 소음일 따름이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줏어읽은 것이지만 영화감독 샘 레이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카메라를 들고 찍을 때와 찍힌 내용을 볼 때는 느낌이 너무 다르더라고.
그래서 화면 연출에 있어 어떤 기법의 창안 혹은 습득과 그것의 연마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이것은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매체의 숙명일까?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계몽주의 시대에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저작이다.
더하여 이 책은 이전에 읽었던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에서 다루던 중심 소재였는데,
그 제목 그대로 말하자면 (출시제이긴 하지만) '근대를 탄생시킨' 책이라고 하니
대단히 호기심이 동했던 터라, 언젠가 한번은 읽어야겠다고 맘 먹던 차였다.
드디어 읽은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조금 실망스럽다.
삶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긍정하는 아름다운 책이었다는... 식으로
'우연히'(위의 책의 원제는 '일탈Swerve'이기도 했고) 이 책을 발견해
멋모르고 읽고는 은은한 기쁨을 느꼈다며 찬사에 찬사를 거듭하던
그린블랫에게 속아버렸다는 느낌도 사실은 없지 않은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책이 설파하는 유물론적인 주장들이
생각보다 이미 무의미하거나, 내게 상식선이라는 게 큰 것 같다.
어떤 원류가 되었던 책이라는 의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저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전기는 사실상 전무한 모양이고
책은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대단히 충실하게 설파하는 저서라고 한다.

아마 이 책을 손에 쥐는 사정은 보통은 셋 중 하나겠는데
라틴어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 문장의 맛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그리스/로마의 철학이나 사상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것을 톺아보려는 사람이거나
특정해서 에피쿠로스 사상의 충실한 해설서라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을 읽어보려는 사람이겠다.
즉, 소위 전공자들이나 볼 책이라는 건데 여기에 나같은 딜레탕트가 어쩌다 꼬이는 거다.
개인적으론 저 그린블랫의 책도 크게 보면 상통하는 내용이라고 생각되는데
결국 계몽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읽게 된 것 같다.

책은 특히 라틴어 원문으로 읽으면 그 시작(詩作)의 수준이 실로 대단해서
그것을 음미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쾌를 주는 모양이고 실제로
이미 당대에 베르길리우스 등의 인물이 시의 높은 수준을 상찬했으며
시인 본인이 본문에 쓰디쓴 약쑥(사상)을 달콤한 맛(시문)으로 감싼다는 식의 비유를 몇 번이나 쓰며
일종의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는 노릇인데다가, 후세에도 그 훌륭한 시문으로
추종자들이 끊이지 않았던 듯하니 과연 높은 수준의 작품인가 보구나 싶기는 하다.

문제는 시가 개인적으로는 와닿지도 않고, 가 닿을 생각도 없는 장르라는 게 하나고
이건 번역본이기에 그 맛을 어차피 느낄 수도 없음이 둘이요,
역자 서문에서 드러내고 있듯 역자는 시의 맛을 살리기보단(이게 가능이나 한지는 둘째치고)
원문에 최대한 충실한 직역을 시도했기 때문에 한국어의 어순과는 상이한 구조의 문장들이
그대로 번역되어 오히려 편하고 즐거운 독서를 방해하는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다는 점이
마지막으로 셋이니 시인이 자화자찬의 낯뜨거움까지 굳이 무마해가며 자랑했던
저 달콤한 시문이 큰 의미가 없는 셈이다.
그러하므로 이 책을 누군가 읽는다면 기대함직한 부분 하나가 사실상 결여된 셈이겠고.

그러면 사상적인 내용을 간취해보려는 의지가 이 번역본 독서를 추동하는 동력이겠는데
이게 또 생각만큼 마음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조금 뒤에 설명한다.

아마 계몽사상가들에게 가장 매력적이었던 그리고 스티븐 그린블랫에게 소소한 충격을 주었다는 부분은
종교와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하는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18세기의 유럽이나 근본주의가 꽤나 득세하고 있다는 현대 미국의 지적 토양에서
이런 식의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접했을 때는 충격 혹은 매혹을 느끼기 마련이지 않을까...

하여 주요 골자를 능력닿는 대로 간추려 보자면,
기본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은 '자연'의 토대를 원자라고 설정하고 있다.
이 원자와 '빈 공간'의 배합으로 삼라만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자들이 서로 부딪히며 운동한다면 그 운행은 단순히 기계적인 과정이겠고
그러므로 일종의 결정론적인 색채를 띠지 않을 수 없다는 건데 에피쿠로스는 이를 부정하려 한다.
2권의 216행부터 이에 관련한 내용이 나오는데 원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일탈하기도 한다는 것.
이로부터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의 '자유 의지'가 연원한다는 설명은 확실히 마음에 혹하는 구석이 있다.

에피쿠로스에게 정신은 인간의 지성작용이고 영혼은 육체에 깃든 생기 따위를 의미하는듯 한데
여하간 정신이나 영혼이란 육체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가 소멸할 때 그것들도 함께 소멸하게 된다고 한다. 요컨대 영혼이란
이미 예컨대 기독교적 의미의 존재도 아닐 뿐더러 불멸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죽음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니까.
인간에게 죽음이란 죽기 전에는 살아있으므로 무의미하고 죽은 후에는 모든 정신과 감각의 작용이
정지하므로 또한 무의미할 뿐인 것이다.

5권 110행 이하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신이 만일 신화가 말해주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그저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것임을 설파하는데 한줄만 인용하자면
"불멸하고 행복한 존재들에게 우리의 감사가 무슨 이익을 늘려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러므로 416행 이하에서 설명하듯 세계의 형성에는 어떤 신적인 힘도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종교는 좋게 봐도 무의미겠고,
1권의 60행 부근부터 이야기되는 것처럼 아가멤논이 친딸을 인신공양했던 패륜처럼 크나큰 해악을 낳고
그런 극단적 경우가 아니더라도 뭇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기까지 하고 있으니
종교를 따름으로써 오히려 죄악을 낳는 이 변태적 상황을 막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시는 말하고 있다.

이런 종교는 5권 1161행 이하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우월한 존재이자
온갖 경이와 공포를 제공하는 자연현상들의 뒤에서 그것들을 관장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떠올리게 됨으로써
발생했다고 시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시의 내용이 납득할만 하고, 그래서 옳다고 여겨진다면
이런 자연현상들은 원자의 운동 이외의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신의 존재를
제시할 필요도, 그러므로 그들을 숭배하는 종교를 만들고 믿어야 할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 다른 내용들은 온갖 자연현상들에 관한 시인의 해명이겠는데 이런 글들은
크게 마음에 와닿거나 유의미하다 여겨지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고,
대강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두려움을 벗고 삶을 누리라"는 것이 책의 주요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제법 상식선인 주장을 뽑아내고 보면 너무 두터운 책이었다는 인상이 큰 것.

흥미로웠던 구절들.
5권 705행에 "달은 태양빛에 맞아서 빛나는 것일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게 당대의 천문학 수준을 알 수 없으나 신선하게 여겨지는 건 사실이다.

4권의 말미에 인간의 성교와 관련한 내용이 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눈여겨 보게 된 대목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문장이 조금 아리송했다.
인용하자면

그리고 유혹하는 쾌락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취해지는지,
그것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보통은, 짐승들 식으로,
네발짐승의 방식으로 행하면 아내들이 더 잘
임신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씨앗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슴은 아래로 하고 허리를 들면.
아내들이 음란한 움직임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여자는 자신이 임신하는 것을 막고 싸우기 때문이다.
스스로 행복하여 남성의 베누스를 엉덩이로부터 물러나게 하고,
그 흐름을 출렁이는 가슴으로 흐르게 하면.
보습이 제대로 지나갈 부분과 길로부터 쟁기질을
벗어나게 하고, 씨앗의 타격을 제 자리에서 비껴나게 하니 말이다.
그래서 창녀들은 자신을 위해 그런 식으로 움직여 버릇한다,
되풀이 임신하고 몸 무거운 채 눕지 않으려고,
또 동시에 남자들의 베누스 자체가 더 기분 좋은 것이 되도록.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배우자들에게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게 확실하다.

대강 후배를 위로하면 임신이 더 잘 된다고 설명하는 듯하다가
이후의 행에서 대뜸 '음란한 움직임'을 말하는데 이게 도기 스타일을 의미함인가?
그렇다면 '임신하는 것을 막'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영역본을 보니 문제의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It's important how you do it. People generally believe
That wives more readily in the manner of wild beasts conceive,
For it's in this position that the seed can occupy
The right place, with a lowered breast, and with the loins raised high.
Wanton wiggling's of no use for wives - no, not one bit -
For a woman prevents pregnancy this way, resisting it,
When she grinds her buttocks against the man's member as it thrusts,
Gyrating, her whole body turned to jelly with her lust.
By doing this, she turns the furrow away from the straight and true
Path of the ploughshare, and the seed falls by the wayside too.
Whores thus have their own reasons for wriggling - so that they can
Spend less time pregnant, and to make it better for the man.
Clearly, though, our wives can have no use for such an art.

아... 후배위는 임신이 잘되고 기승위는 임신이 잘 안된다는 뜻이구나...
내가 가진 건 펭귄 클래식 판인데 이게 좀 의역을 했는지는 내가 알 수 없으나
영역본으로 이해한 바가 정확하다면 우리말 번역은 문장 구성이 독해를 방해하는 식으로 되어있다는 걸
이 예시에서 충분히 알만 하다. 이 구절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것이 충실한 번역일지는 모르나 읽기에 좋은 번역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번역본 기준 287쪽에 오타가 있다.
'뮬리적인 형태'라고 쓰여 있음. (1판 2쇄)

2017년 8월 22일 화요일

마사오카 시키/나쓰메 소세키 -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이런 책이 일본에도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역자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소세키와 시키의 서간?들 중 큰 의미 없는 편들을 제외한 후 시간과 전달순서에 맞추어 발췌 번역해 한 권으로 구성한 책이다.
오히려 소세키 전집과 시키 전집을 번갈아 뒤적거려야 하는 수고를 역자가 대신 해준 셈.

개인적으로 마사오카 시키는 나쓰메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연재했던 [호토토기스]를 창간한 인물로,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의 책에서 몇 번 언급되었던 사실 정도로 그저 이름만 알던 사람인데
나쓰메 소세키와 깊은 교우를 나누었던 인물인 모양이다.
일본의 시가 갈래인 하이쿠와 단카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인물로서
오히려 문명은 먼저 떨친 모양인데 결핵으로 인하여 요절한 인물이라고 한다.

책의 구성은 이 둘이 22세였던 1889년부터 34세였던 1901년까지 주고받았던 편지들과,
1902년 시키가 사망한 이후 소세키가 다카하마 교시에게 보낸 편지 한통,
[고양이] 중편 서문에 소세키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내용까지가 실린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소설가 소세키의 삶은 그가 영국유학을 다녀온 1903년 이후 [고양이]를 연재하면서부터이니
여기 실린 글들은 소세키에게 관심을 두고 책을 들었던 나로서는 일종의 '소세키 비긴즈'(?)인 셈이다.

편지의 분량도 소세키의 편지가 훨씬 많은데 역자는 소세키는 이사가 잦은 생활을 했고
시키는 이후 시키암이라 불렸다는 근거지에 자리를 잡은 뒤로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받은 편지를 보관하기가 시키 쪽이 용이했고, 그래서 소세키의 편지가 많이 남은 것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아쉬운 일인 것이, 시키의 편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이 소세키의 답장만 실려 있는 경우도 제법 되기 때문.

책을 펼치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두 명이 대단히 인용에 능란하다는 것인데, 일단 한문의 인용이 굉장히 두드러진다.
과연 19세기의 끝자락을 살았던 인물들이라 그런지 문(文)에 대한 감수성이
현재를 사는 독자와는 많이 다르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된다 할까...
헌데 이런 사정이라면 사실 소위 구한말 문인들의 글도 다르지는 않을 터라면
굳이 소세키의 글을 내가 찾아서 읽었다고 할 때는 이게 사대주의인 건가? 하는 자의식이 살짝 들기도 한다.
여하간, 더하여 특히 영문학자였던 소세키의 글에서는 영어의 구사나 인용도 제법 섞여들어가 있는데 이게 꽤 희한하다.
과연 소위 근대문학의 태동기에서 그 '사이'를 살던 인물의 글이라는 것일지? 글맛이 독특하다.

나머지 하나는 과연 친우끼리의 서간 내왕이어서인지 넉살 좋은 문구들이 많았다는 점인데,
이게 읽기에 재미있다.

서로를 치켜세울 수 있을 만큼은 전부 치켜세우고 있는데 사용하는 단어만도
'대인', '오우(梧右)', '님', '대형', '좌하(座下)', '어전(御前)' 등등...

거기에 두견새는 당시 결핵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하고 시키(子規)의 필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하는데
시키가 각혈을 한 후 문병을 갔다가 보낸 (지금까지 남아 있는) 소세키의 첫 편지에서
본인의 셋째 형도 각혈을 했다며 "이리 두견이가 많아서야 천하의 풍류가라는 이 몸도 두 손 들밖에, 하하."라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혹은 반 장난, 농담 식으로 서로를 깎아내리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한데
대뜸 소세키는 시키에게 "자네같은 냉혈동물은 더위도 겪지 않겠지"라는 식으로 말하거나
잠을 즐기는 것이 어디가 나쁘냐고 묻는 소세키에게 시키가 답장에
"늦잠은 건달, 낮잠은 도둑으라 이미 평판이 정해져 있는 것을 득의양양 으스대다니 가소롭구먼."하며
놀리는 부분이라던가는 친우끼리는 서로 놀려대는 모습이란 게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기도.

1890년 1월 초에 보낸 편지에서 23세의 젊은 소세키가 품었던 '문장'에 관한 생각을 잠깐 엿볼 수 있는데
아마 이 전의 편지에 시키가 나름의 문장론을 써서 보냈던 모양인데 이에 반박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후 그의 생각이 어떤 방식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따르면
문장은 그것이 담은 사상(내용)과 그 문장의 수사(형식)로 대별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 소세키 본인이 더 중시하는 것은 사상인데 이를 함양하기 위해서는 작자가 몸담은
문화적 풍경과 작자 본인의 경험이 중요하며 차등을 두자면 전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여 Idea와 Rhetoric이 좋고 나쁨에 따라 총 4개의 경우가 생기는데 특기해야할 사항은
사상이 좋고 수사가 나쁘면 기껏해야 평범한 문장으로 그치지만 사상이 나쁘면 수사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 나쁜 문장으로 귀결되므로 사상이 나쁘고 수사가 나쁜 경우와 동급이 되니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고
소세키는 보냈던 것 같다. 젊은이의 치기어린 정리에 불과할 지는 모르겠으나...

이에 시키가 다시 반박을 하고 있는데 조금만 인용하자면 이런 식이다.
"그런데 어째서 Good idea expressed by bad rhetoric과 Bad idea expressed by good rhetoric은 그 가치가
거의 같다고 하지 않는 것인가.[몰아붙이기 성공하여 통쾌]"
이렇게 하고 싶은 반박을 대강 하고는 뒤에 괄호로 한두마디 자평을 하는데
이게 읽기에 제법 우습다.

적어두고 싶은 부분.
1895년, 28세 되던 해 11.13일자 소세키의 편지에 최근의 사건 중 다행스러운 것이 '왕비 살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민비 살해 사건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무엇이, 어떻게, 왜 다행스러웠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1897년 2.17일자 시키의 편지 서두.
"뺀들거린 것도 뺀들거린 것이지만 바쁜 것도 바쁜 것이므로 오랫동안 격조했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바쁜 것도 바쁜 것이라 붓은 놓지 않고 있네.
위가 나쁜 것도 나쁜 것이지만 바쁜 건 또 바쁜 것이니 많이 먹고 있다네."
문장이 재미있어 적어놓아 본다.

1891년 11.7일자 소세키의 편지를 보면
시키가 권한 호걸담을 읽고 실망한 소세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실수담이 호걸의 전기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호걸의 명성이 실수담을 유명하게 한 것에 불과하네."라고
적고 있는데 이게 꽤 재미있는 논리의 역전이라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책에 큰 불만은 없는데, 이런 책을 냈다는 것도 감지덕지인 마당이라,
몇몇 경우 연도 표기가 오류가 있고 (1895년인 게 분명한데 1995년이라 되어있다던지)
312쪽의 'gay society'가 아마도... '게이 모임'이지는 않을 듯한데 그렇게 번역을 해놓았다는 것
정도가 눈에 조금 밟힌다. 더하여 둘 사이의 서간만을 실어놓았기 때문에 전후맥락에 관한
내용이 조금 아쉽다는 것 정도? 이런 내용까지 작성하는/기대하는 건 역자로서도 독자로서도
약간은 월권행위가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지노 에이이치, 외국어 잘 하는 법

제목이 강렬한 책이다. 제목만큼 내실있는 책일지?

저자는 일본의 언어학자로 체코어가 전공이고 그걸 중심으로 다른 슬라브어계열 어군을 연구한 사람인 모양이다.
저자 본인이 직접 경험하거나, 스승들에게 혹은 지인들에게 전해듣거나, 다른 인물들의 저서를 읽거나 하여
자기 나름대로 언어를 배운다는 일은 대강 이런 것이다...하고 전해주려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뭐 언어학이나 심리학 등의 어떤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쓴 책은 아닌데,
덕분에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복잡한 이론이나 도표를 인용하는 건
오히려 독자가 정나미만 떨어지기 십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저자는 서두에서부터 "잊어버리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접한 외국어라고 해봐야 영어, 일어, 독일어 정도에 불과하지만
언어라는 게 결국 암기싸움으로 귀결되고 그러면 다시말해 망각과의 싸움이 되는 것이니
한창 열내면서 단어니 문법이니 익혀놓고도 뒤돌아서서 며칠이면 물거품처럼 없어지는 걸
허망하게 느낀 게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보면 꽤나 재미있는 조언이다.

꽤나 공감갔던 대목 중 하나는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필요에 의함이라는 저자의 주장이었다.
언어란 학습자 본인이 필요해서, 즉 배우고 싶다고 느끼는 이유가, 목적이 있기에 배우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애써서 괴로운 과정이어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다수는
(80년대의 일본인을 지칭하겠으나 현재의 한국인을 가리켜도 납득할만할 것이다)
제 1외국어의 선택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이 비극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어도, 주위에서 영어부터나 제대로 하라는 핀잔을 듣거나,
하다못해 나 자신이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꼴이 심심찮게 발견되는 상황이니...
"배우는 사람이 영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 쪽이 학습자를 고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외국어 = 괴로움'의 등식이 습관처럼 마음 한구석에 달라붙어 독이 되는 것이다.
외국어 학습에서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필수불가결이기 때문에.

더하여 외국어 학습의 허들을 너무 높게 잡지 않을 것을 저자는 주문한다.
학습자 본인이 대뜸 해당 언어의 사전 편찬자같은 게 될 것도 아닌 마당에
그 외국어를 배우려는 목적에 맞는 수준과 방식만을 접하면 될 일이라는 것이다.
즉, 외국어 학습에 있어서 목적과 목표를 명확히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마음가짐이 이러한 뒤 세목에 있어서 외국어 습득에는 무엇이 어떻게 필요하냐면
저자는 언어의 신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던 지인의 말을 인용한다.
어학을 잘 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필요하며, 그를 기반으로 "어휘와 문법"을 익히고,
그것은 좋은 "교과서, 교사, 사전"을 통해서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저자는 어휘, 문법, 교과서, 교사, 사전, 발음, 회화, 레알리에 순으로 장을 할애하여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세세하게 더 여기서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예를 들어 단어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어 1000개를 목표로 삼으라는 것이라던가
문법사항은 컴팩트하게 하여 가장 기본이 되는 10장 정도만 일단 눈뭉치를 굴리라는 조언 등
꽤나 자잘하게 와닿는 제안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것은 발음 장에서 ザ의 발음에 관련한 대목이었는데
이 글자는 어두에서는 [dza]로 발음하고 모음 사이에서는 [za]로 발음한다는 모양이다.
친한 일본인 선배가 있었는데, 이 선배와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관련한 잡담을 나누는데
'the world'를 발음할 때 'the'를 [za]로 발음하지 않는다는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다.
뭔가 희한한걸? 하고 느꼈지만 이게 한국인으로서는 변별적인 자질이 아니다보니
그렇다고 모국어 화자에게 왜 그렇게 발음하냐고 물어봐야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고
그냥 석연찮은 기분만 느끼고 넘어갔던 일인데 여기서 그 수수께끼가 풀렸던 것이다.
뭐... 제대로 된 일본어 음성학 자료만 조금 찾아봤어도 훨씬 빨리 풀릴 문제였을수도 있으나...

여하간 저자는 아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않지만
결국 목적의식을 가지고 '꾸준히'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김빠지는 결론이지만 외국어 학습에 첩경이 있을 리도 만무하니 오히려 새삼스러운 주문인 셈.

2017년 8월 7일 월요일

드니 디드로, 라모의 조카

읽는 김에 마저 읽어나가는 중이다.
디드로의 4대 소설이라 하면 [운명론자 자크], [수녀], [입싼 보석들], 마지막으로 이 [라모의 조카]인 모양인데
특히 이 작품은 그의 최고 걸작? 문제작? 대우를 받는 모양.

내용이라 할만한 것도 딱히 없는 글인데,
'나'(아마도 디드로 본인)가 산책 중 당대에는 그럭저럭 유명했던 음악가 장 필립 라모의 조카를 만나서
종이 울리는 다섯시 반까지 대화를 나눈 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물론 이 대화가 어떤 것인지가 중요하겠고.

대화의 상대자인 라모의 조카라는 인물의 성격은
기본적으로는 악한, 건달 류의 인물형이고 남을 등쳐먹고 기식하면서 지내는 인간인데
이 인물이 그럼에도 나름대로는 일관성을 지닌? 어딘가 주목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면
자연히 이 글에도 가치부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게 좀 어려웠던 것 같다.
그저 중구난방인 요설들에 불과한 말뭉치를 꾸역꾸역 토해내는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아서인데...

흥미로웠던 점은 천재에게는 광기 혹은 악덕이 필요불가결로 함께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낭만주의적 인간형이 아닌가 싶어서다.
아마도 라모의 조카는 천재에게 악덕이 함께한다면 악덕이 있는 자는 천재이지 않은가 하는 식의 그릇된 추론을 가지고
본인을 일종의 천재라고 여기고 있는 것도 같다.

역자 해설을 읽어 보면 괴테나 헤겔 등의 인물들은 이 작품에 제법 중요성을 부과했다는 모양이고
나름대로의 의미가 도출될만한 글인듯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공감이 되지도 않고 혼란스러울 뿐이어서
아직은 진가를 알아보기 힘든 글이었다.

언젠가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워낙 짧은 글이라 재도전하기에 부담은 없겠지만.

2017년 8월 6일 일요일

드니 디드로, 수녀

여기서 누군가 올린 리뷰를 보고 머릿속 한구석에 넣어두긴 했으나
이렇게 빨리 읽게 될 거라고는 생각 안했는데, 재미있는 일이다.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 수녀가 크루아마르 후작에게 자신을 도와줄 수 없겠냐면서 자기가 처한 상황과 그때까지의 사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 수녀가 보내는 긴 편지글이 소설의 태반을 이루고 있는데, 이 역시 화자가 극중에 만드시 위치해야만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당시의
문(文)의 감수성이 묻어나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3인칭 시점이 그러고보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새삼 다시 느끼게 된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쓰기는 했으나 아직은 기독교의 아귀 힘이 전혀 풀리지 않은 유럽 사회가 배경이다.
주인공 쉬잔 시모넹은 변호사의 삼녀 중 막내인데, 어머니의 외도로 태어난 여식으로 어머니의 외면과, 그 사실을 의심하는 아버지의 핍박 사이에서
말하자면 자식 취급을 받지 못하게 된 인물이다. 본인의 과오를 밝힐 생각은 없으나 동시에 그녀를 다른 딸들과 똑같이 대해 줄수는 없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그녀를 수녀원으로 밀어넣는 것은 사실상 최선의 선택으로 남았던 것인데 이는 딸을 신에게 인생을 바치게 함으로써 자신과, 존재 자체가
죄인 딸이 속죄를 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조금도 흠결이 되지 않는 길이며, 결정적으로 그 딸을 사회적으로 깔끔하게
매장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부모도, 부모의 재산을 한푼이라도 더 차지해야 하는 두 언니도, 그리고 그녀의 수련수녀
생활을 맡게 된 수녀원의 원장 및 성직자들도 그녀의 부모가 제공해줄 거액의 지참금 때문에 그녀의 수녀서원을 적극 지지하고, 강제한다.
이런 상황의 촘촘한 짜임새에 여지가 없음을 느낀 그녀는 체념하려고도 해보지만 수녀원 제도와 비인간성과 그 구성원들의 가식으로 인해 진저리를 치며
결국 자신에게 강제된 길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다짐하게 되는데.

작중 두드러지는 점은 이 소설이 한 개인에게 부과된 체제에서의 자리와,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 간의 사투를 그린다는 점이다.

주인공 쉬잔 시모넹은 태어날때부터 자신의 자리가 없이 태어난 사생아이다.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그녀가 발 붙일 곳이 없었던 것으로 이미 결정된 채 태어났던 것인데
초반부 처음 들어간 수녀원에서 수녀서원을 거부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 때의 어머니의 냉랭한 태도에서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읽을 수 있다.
당대는 인간이 자기자신으로서 자연히 갖고 태어난 권리라는 관념도, 모성애의 관념도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이 어머니는
뼛속깊이 그녀를 잘못 태어난 인간으로, 어머니 자신의 죄가 체화된 존재로, 그래서 쉬잔이 살아 숨쉬는 내내 어머니 본인만이 그 죄로 아프고, 괴롭도록 만든
일종의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에게 온갖 경멸만을 표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쉬잔이 "그래도 어머니는 제 어머니시잖아요..."라고
절규해 보아도 어머니에게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너는 아직도 나를 괴롭게 만들 셈이냐?"라는 차가운 대꾸 뿐이었다.

더하여 기독교인으로서의 삶 또한 그녀에게는 그저 부과된 것인데 "그저 갓난아기 때 기독교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녀가 된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절규한다. 그런가하면 그녀의 어머니가 죽기 전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데 여기에는 "너를 낳은 것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죄악이었다. 그러니 속죄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신께서 너의 선행을 보아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도록 말이지."(p.62)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을 읽어 보면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느꼈을 모성애를 한사코 거부하며 자기 딸마저 죄악의 덩어리로 보아야만 했던 그녀 어머니의 태도는 기독교적 질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신이 두렵기에 어머니는
딸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부자연과 부자유만으로 짜여진 수녀원 생활을 벗어나고 싶고, 벗어나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후작에게 편지를 보내면서도
본인은 "자유와 운명에 대한 비밀스러운 확신"(p.29)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버텨나가는 것인데 이 감옥같은 수녀원과 나아가 실상 감옥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그 밖의 사회 체계를 대하여 보잘것없는 한 개인이(심지어 그녀는 여성이다) 자유를 향한 열망에 기대어 분투하는 모습은
분명히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결국 자신을 둘러싸고 조여오는 체제에 체념하고 롱샹 수녀원에서 서원을 마치고 수녀생활을 시작한 주인공인데
그것의 수녀원장인 모니 원장은 독실하고 선량한 인간이었다. 그녀에게 쉬잔은 감화되어 성실하게 생활을 이어나가려고도 해보지만
결국 모니 원장은 명을 달리하게 되고 후임은 생트 카트린 수녀는 표독스러운 인물이었기에 신임 원장 체제 하에서도 전 원장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않았던 주인공에게 폐쇄 사회 하에서의 박해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조금 경악스러웠던 건 온갖 따돌림을 통해서 그녀를 박해하던 수녀원의 구성원들이 그녀가 정원 구석의 우물가에 가서
자살을 떠올리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것을 모른척 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도에게 자살은 큰 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방조할 만큼 가식적이고 우악스러운 인물들이 신의 찬미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이에 그녀는 수녀원을 벗어나기 위하여 서원을 무효화하기 위해 소송을 꾀하게 된다. "법의 보호"(p.89)를 요청한 것이다.
천상의 권력에 이어져 있다는 수녀원 생활에 맞서서 세속의 '법'에 기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세속화가 진행중이었던, 다시 말해 종교권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풍경의 묘사인 셈.
소송 과정에서 그녀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마누리 씨의 웅변에서도 이런 관점은 드러난다.
그는 "유독 종교적 서원만은 그러한 엄격한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p.145)하고 역설한 것인데
이는 권력의 기원이 둘이어서는 안 된다는, 즉 법의 지배가 종교계 안으로도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송 사실을 알게 된 원장과의 면담에서 쉬잔은 소리친다. "진실로 신을 욕되게 하는 것은 제가 수녀복을 입고 살면서
날마다 이 옷을 더럽히는 생활, 바로 그것입니다."(p.106) 수녀생활이 오히려 신을 모욕하는 셈이 되는 아이러니가 가능한 것은
개인이 그 자신의 자유를 통한 것이 아니면 그저 거짓이고, 거짓은 악한 것이라는 논리가 뒷받침하고 있을 터이니,
이 또한 시각과 태도의 변화를 보여 주는 웅변으로 느껴진다. 동시에 무신론자로 찍혀 옥살이도 했던 디드로로서는
결국 '신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만큼은 자신도 지키는 척은 해야만 했던 제스처이기도 하겠고.

그러나 결국 소송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녀의 괴로움은 한층 더 강해지지만 그런 소동으로 인해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부주교의 개입 덕분에
그녀는 다른 수녀원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 여기서도 "그분은 공정하시기는 하지만 전혀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니까요. 그분은 덕행을
행하되 그 감미로운 맛을 모르고, 감성이 아니라 추론을 통하여, 즉 이성에 따라 선행을 펼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p.132)라고 부주교의 성정을
묘사하는 그녀의 말은 흥미롭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내재된 동정심을 통하여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를 '감미롭게 여겨야' 선행에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그녀의 윤리관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물론 저자인 디드로 본인에게서겠지만)

그녀가 새로 향하게 된 아르파종의 생트 위트로프 수녀원의 원장은... 소설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만큼은 묘사하고 있는 바로서, 레즈비언이었다.
쉬잔 수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원장은 그때부터 그녀를 총애하기 시작하고, 한밤중에 원장실에 불러 함께 악기 연주를 연습한다고 하면서
이마, 볼, 팔, 다리에 키스를 하는 등...심지어 "육체적인 욕망"(p.224)을 느끼는지 묻기도 하고...
"손으로 가슴이며 허벅지며 배를 쓰다듬지는 않느냐? 그렇게 희고 단단하고 또 부드러운 네 육체를 말이다"(p.227)하고 묻기도 하며...
소설에서는 이런 수녀원장과 가까이 지내는 쉬잔이지만 그녀의 순수함에 원장도 차마 그녀를 부여잡고 농락하지는 못하고 그저 찬탄하며 가까이
지내기만 하는 생활이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화자가 쉬잔 본인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정말로 순수한가?
그녀는 정말로 원장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호의와 다정다감한 애무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후작이 읽을 편지를 쓰는 중이고, 그런 '부자연스러운' 정념의 형태를 곧이곧대로 묘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편지의 말미에 자신을 "실제보다 훨씬 좋게 쓴 것을 알았습니다."(p.303)라며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고백성사를 맡은 신부인 르무안 신부에게 이런 일련의 내용을 고백해서
절대 원장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 그에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면 그녀의 순수함을 의심할 수 없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에 원장은 죄악감에 몸부림치다가 본인의 "영혼의 더러움은 씻어지지 않"음(p.290)에 절망하던 끝에 죽고 만다.
이 부분이 충격적인 것은 이 원장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이 죄였다는 사실을 깨달아 괴로움 끝에 결국 죽기까지 했다는 점인데
결국 태어난 대로의 성향을 '신'이 죄로 규정함으로써 그 사실에 그녀는 괴로워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를 왜 누가 어떻게 죽인 것인가?
신임 원장은 쉬잔 수녀가 전임 원장을 홀렸다고 믿었고, 박해가 다시 시작된다. 그녀는 탈출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껄렁껄렁한 수도사의 말에 속에 탈출은 했으나 상처입고 수배로 인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분조차 숨긴 주인공은
여관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후작에게 편지를 쓴 것인데, 후작에게 인정을 베풀어줄 것을 급히 요청하며 편지는 끝을 맺는다.
완독 후 꽤 희한하다고 여긴 것은 주인공에 처지가 대단히 개인적으로도 연민을 많이 불러 일으켰다는 점이다. 읽고 나서도 그녀의
딱한 처지에 아련한 여운이 계속 남아있었는데, 심지어 저자인 디드로조차도 본인이 쓴 글의 주인공의 비극 때문에 눈물을 훔쳤다는 말을
했으니(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효과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자유가 결여된 인물이 이무런 이유없이 받는
숱한 핍박을 읽으며,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나보려 발버둥치는 인물을 보게 되었기 때문인지?

이렇게 감동에 흠뻑 젖어 책장을 덮으려던 차에, 소설 말미에 글이 한 꼭지 더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전기 작품의 서문]이라는 이름의 이 글은 소설의 창작 배경과 과정에 관한 간단한 진술과 편지의 모음이다.
이에 따르면 위의 크루아마르 후작이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고, 수녀의 서원 취소 신청 또한 실제 있었던 일인데
이에 관심을 가졌던 후작의 모습을 알고 있던 그의 친우들(여기 디드로도 끼어 있다)이 후작을 파리로 다시 불러오기 위해
일종의 술책을 썼던 것이다. 그 수녀가 후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편지를 써서 후작에게 보냈던 것이다.
여기에 걸려들어 자신의 영지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와 친우들에게 사실을 듣게 된 후에는 사람 좋게 웃었다는 것이 후문으로 전해진다.

또한 역자 해설에 따르면 이야기의 발단이 된 수녀는 1790년 대혁명으로 인해 종교시설이 모두 폐쇄되었을 때 73살의 나이로 롱샹 수녀원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2017년 8월 3일 목요일

서경석, 전투감각

월남전 당시 파월 맹호부대에서 소대장 및 중대장으로 복무했던 서경석 예비역 중장의 저서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후배 군인들에게 '전투감각'을 고양시켜 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집필을 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전투경험을 가진 지휘관이 이미 드물었을 91년에 이런 저서를 펴냈을 때는
휴전 이후 몇십년을 보낸 군대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안일해졌다는 판단이 조금은 숨어있을까?
어찌되었건 주적과 대치하고 있는 군이니만큼, 예리한 감각을 벼려내는 데 보탬이 되고자하는 군인정신일는지.

저자 본인이 머리말과 꼬리말에서 한번씩 밝히고 있듯 저자가 문필가는 아니다보니
그다지 글맛이 좋은 편은 아니다. 문장이 불완전할때도 있고, 글의 흐름이 유기적이지 못해 지리멸렬한 부분이 제법 되고,
같은 표현이 계속 반복되거나, 문단의 배치가 애매해서 올바른 이해를 저해한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종종 눈에 띄었다.
아마도 실전에서 저자 본인이 느꼈던 주요한 전술이나 태세 등과 실제의 경험담 혹은 무용담이 뒤섞이다보니
더 그런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글의 성격이 교범도 아니고 수기도 아닌 것이 좀 아리송한 구석이 있으니까.
이따금씩 글의 방향이 소위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뭐 여하간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제법 세세한 것이 아마도 일기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였다. 일기에 쓰인 내용을 토대로 해서 거기에 살을 좀 붙인 구성인 것 같다.

나로서는 이 독서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 않거나
군인도 아닌 내가 이렇게 자질구레한 부분까지 챙겨 읽어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크레모아 관리의 중요성이나 평소 훈련의 강조, 여자가 더 독하다는 저자의 인상이나 포로 처분 방식 등등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내용들은 저자의 부족한 글솜씨 탓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일반인 중에서라도 밀리터리 계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대단히 흡족하게 읽을 것 같다.
소대나 중대 규모에서 실제 전투가 어떻게 행해지는지, 졌는지에 대한 서술이 빼곡하기 때문에.
과연 전투 수행에 있어서 어떤 점이 중요한지 되짚으며 강조하는 대목이나
본인이 겪었던 경험담을 풀어내는 내용들은 실제 전투가 과연 이런 식이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조금 갸우뚱 했던 건 책에 그려진 저자의 모습이 제법 이상적인 군인상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건데
실제로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평판을 받았던, 뛰어난 군인이었기에 본인의 경험을 서술한 것 뿐인데도
그런 상이 그려진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전투감각'이라는 의도도 있는 마당에 애써서 지저분한 내용을
서술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현지인들과 교류를 나눠야 한다는 내용이나 적이 먼저 쏴야 우리도 쏜다는 등의 이야기는 너무 옳고 좋기만 한 얘기같아서.

조금 의문이 드는 대목도 하나 있는데 13장인 '마이 여인'을 읽어보면
매복 작전 중 휘하의 병사가 매복이 들킬 수 있는 상황이어서 부득이하게 한 베트남인 여성을 쏘게 되는데
풀어주자니 발각될 위험이 있어서 데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찾으러 왔다가 그 또한 총격에 목숨을 잃게 되는데(이 둘은 무고한 민간인은 아니었다)
여인이 자신에게는 자식이 있다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던 말도 들었던 저자 본인으로서는 이런 결말이 대단히
씁쓸했고, 그로 인해 이후 악몽도 빈번하게 꾸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 서술된 작전 하에서 사망한 인물은 이 두 명인데 265쪽을 보면
"시체를 끌어다가 마이 여인을 묻었던 자리를 파고 합장해주었다. 나무로 십자기를 만들어 머리 쪽에
박아놓았다. 시체를 찾아다가 장사를 잘 지내주라는 표시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약 2시간 가까이 개울을 따라 철수했을 때 우리가 매복했던 지점에서 폭음이 발생한 것을 청취했다.
시체를 뒤지다가 시체 밑에 매설한 수류탄 부비트랩이 터진 모양이었다."라는 문장이...?
비록 전시였기는 하나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이들에게 예우를 표하려 했다는 것 같은데
거기에 부비트랩을 설치해 뒀다는 건가? 못할 거야 없겠지만서도...

대강 눈치를 보니 내가 읽은 판은 91년 판과 비교해서 뒤에 두어 장이 더 붙은 형태인 것 같은데
특히 마지막 장이 자계서 냄새를 피워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무도 이 책에서 저자의 경험담과 전투에 관련한 일정한 조언들 이상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의 군인으로서의 글이 읽고 싶을 따름인 것을... 아마 저자도 그를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그런 의미로 말하자면 더 거슬리는 것이 말미에 저자가 월남전을 보는 시각도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이미 참전한 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운 저자의 기상에 딴지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기왕 베기로 한 것이라면 칼은 날이 서 있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아마 혁혁한 전과만 올린 저자의 경험담이 서술되어 있으니 전투는 이렇게 이겼는데 전쟁엔 왜 진 거야? 하는
의문을 독자가 품을 수도 있으리라 저자도 짐작했고, 그래서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월남전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밝혀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조금 갸우뚱하게 되는 건데,
간단한 예를 들어 "월남 내부의 철없는 종교인"이라거나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정치 싸움만 반복했다" 등의 서술을 읽으면...전투의 프로페셔널인 저자가, 대뜸 아마추어 역사가나 정치가 흉내를 낼 필요는 없었지 않을까... 싶어 지는 것이다.
뭐 아무래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군인이란 직업과, 심지어 공산군과 전투까지 벌였던 인물의 시각이 이렇다는 게
나는 너무너무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다고 생각해서 참을 수가 없다 말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겠지만.

독서 이후에 간단히 관련 내용을 찾아보다가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저자가 소총중대장으로 복무할 당시 직속상관인 대대장이 노태우 중령이었다.

2017년 8월 2일 수요일

문영심,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제목에는 김재규 평전이라 쓰여 있지만 인간 김재규에 관한 전기적인 묘사나 내용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79년 10월 26일이 가까워오던 시기 당시 중정부장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실체를 목도하여
박정희를 설득할, 그리고 설득이 실패하자 거사를 단행할 결심을 하게 되는 초반 약간을 제하면 저자는 10.26 당일의 묘사와
재판 과정에 지면을 거의 할애하고 있다. 그래도 평전을 자처했다면 김재규의 성장과정 비슷한 것 정도는
서술해도 괜찮지 않았나 싶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개인 김재규의 삶이라 해봐야 크게 보아 당시를 살아가던 권력자들과 아주 다르지는 않았을 터인즉
저자는 10.26과 그 이후의 짧았던 모습이 '우리'에게는 더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런 내용을 저자는 소설식으로 서술한다고 느껴지는데
어떤 순간 어떤 인물의 내면묘사까지 읊어내는 소위 전지적 3인칭 시점의 화자로서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게 맞는 서술태도인지 조금 아리송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일종의 몰입감을 주기도 하고,
평범한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라는 점에서 딱딱한 문체를 피하려 했다는 것도 이해함직 하지만
그래도 꽤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글인데 읽으며 좀 낯간지럽다는 느낌을 억누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혹은 무슨 부마항쟁 당시 부산의 택시 기사가 중정 보고서나 진배없이 시세를 파악하고 있었다느니...
(이것은 아마 부마항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데, 이런 사회 하층의, 말하자면 무식해야 할 인물마저
지성을 가지고 당대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이니... 이런 투박한 '민중' 색안경이 좀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격이라 할만한 부분에서 공히 등장한 인물에 눈길이 가는데
책의 내용을 나름의 자료를 토대로 한 진실이라고 일단 상정하자면 이 인물은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사태파악을 위해
부산행 이후 시위대의 틈 속에서 정찰을 하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소위 '시민 동지'인데
김재규 추모행사에도 말없이 참가했다가 저자의 눈에 띄어 저자가 그런 사연을 듣게 되었다는 식의 내용이 있다.
이게 소위 수미일관을 노린 저자의 기교인지, 아니면 그런 사실이 정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만약 전자라면
글쎄... 나는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부려놓은 장치를 굳이 읽고 싶거나, 궁금했던 건 아닌데... 쯧, 하고 혀를 찰 수밖에.

거기에 김재규가 소위 시절 미군과의 시비로 일본도를 꺼내들었다느니 하는 일화 또한
저자는 그 일화를 소개하는 다른 인물의 입을 빌려 "싸나이 답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소위 '욱 하는 성질'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건 아닌가 싶고도 하고...
어차피 인간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그의 거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언행을 통해서 충분히 가능할텐데
이런 방식으로 미화할 필요까지는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신경써야 할 부분은 아니라지만.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식이다보니 뭐 사건의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
말하자면 이미 아는 내용과, 굳이 알 필요 없거나, 낯간지럽기만 한 서술들 사이에서 책이 유의미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런데 재판 과정을 다루는 3부부터는 제법 읽을만한 내용이 되었던 것인데 아마도 재판 기록에서 발췌한 것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발언들이 오고갔는지 세세히 인용하고 있고 그에 저자가 본인의 판단을 덧붙이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보다 읽으면서 낯간지럽지 않아 좋았고, 제법 충실한 기록을 읽는다는 맛이 있었다.

그 세세한 내용을 여기다가 인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읽으면서 내가 느꼈고 저자 또한 제법 강조했던 점을 적어보자면
하나는 이 재판이 그 자체로 제법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김재규와 변호인단 등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이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당시를 규정하려 했는데 재판부는 이를 무마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신군부가 계엄의 해제도 김재규의 사형 이후로 고집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신군부는 계승하려던 체제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당시의 정치가들은 본인들의 치적을 뽐내기 위해(이렇게만 말하면 좀 악의적인 서술이겠지만;)
김재규와, 그의 재판 과정을 크게 부각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김재규의 거사는 잠정적으로나마 깔끔하게 봉합되었던 것.

둘은 김재규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들도 제법 많지만 전후의 정황상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부분이 분명 있지 않은가 싶다는 건데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의연한 모습이나 나름의 논리를 가진 그의 '혁명론'이 그러하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눈여겨보게 되었던 대목은
"박정희는 언제나 김재규의 인사권자였다"는 한줄인데 그렇게 본인을 아껴주었고 본인도 그래서 충심으로 대했던 상관을 죽이게 되었을 때는
이를 권력욕 혹은 분기를 억누르지 못한 우발적 행동으로 보는 것도 물론 가능하겠지만 그런 은인마저도 저버려야 했던 어떤 대의가 그의
마음 속에 있었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지 않은가 싶어서이다. 10.26의 전개 과정에서 그의 부하들이 일언반구의 반발도 없이 그를 따른 점이나
재판 과정에서 상관에 대한 존경이나 명령 복종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도 인간 김재규가 인격자였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더하여 변호인단이 남긴 개인적인 기록이나 사제단의 청원서 등을 보아도 그의 행동이 막무가내이기만 했던 건 아니지 않을까 싶어지는데
그 정도의 인망을 지녔던 인물이 그런 극단적 선택을 내려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면 그게 소위 신군부가 발표한 근거보다는 좀 더 그럴싸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셋은 당대의 소위 분위기인데, 1심의 구형에 대한 변론에서 태윤기 변호사가 이런 말을 남겼다.
"법조생활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변호인을 만나는 데 경찰관의 방해를 받았고, 저희 집에는 자칭 시민이라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조직적인 협박전화가 왔고, 심지어는 역적 재판을 맡았다고 살해하겠다는 서신까지 보내고 있습니다."
맙소사. 그러고 보면 새삼스러운 부분인데 막상 읽고서야 알았다. 살해 협박이라...

개인적으로는 김재규의 '혁명'발언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었다. 무엇보다 2017년을 사는 나로서는 신군부 독재가 기정사실로 주어졌으니까.
어차피 전두환이 집권하게 될 거 좋은 빌미나 줬지 싶고, 전두환이 집권할 수 있었던 그 구조를 뚫어내지 못하고 그저 박정희 하나만 축출하면
민주주의가 오리라 믿었던, 좋게 말해도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하고 무지한 인물의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리고 그의 진심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재판 과정이 좀 더 적법하게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신군부에게는 대단한 곤란이었을 것이다.
자기들이 물려받아 입으려던 옷이 어떤 것인지 발각될 위험이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당장 박정희의 '행사'들도 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었으니...
그랬기 때문에 재판 과정이 대단히 서두르듯 이루어졌다는 모양이다. 그들을 죽여서 입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고 보니, 그의 '혁명'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더하여 에필로그에서 함세웅 신부가 했다는 말이 이렇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를 죽인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이후는 우리 국민들의 몫이었지요. 김재규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당시 박정희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런 박정희를
제거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거지요."
음... 곱씹을만한 구석이 있다. 박정희가 죽어야만 했다면, 김재규 말고 다른 이가 있었을까 싶어서...

2017년 8월 1일 화요일

드니 디드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요즘 계몽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읽다 보니 자연히 각 사상가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첫 타자는 드니 디드로가 되었다. 이전에 독갤에서 그의 [수녀]를 추천하는 글을 보기도 했고.
이 작품은 밀란 쿤데라가 그렇게 극찬을 했다는 작품이기도 하니...

계몽사상가의 저서를 읽는다면 보통은 흄, 칸트 등을 읽거나
프랑스인 중에서라면 볼테르, 혹은 루소가 먼저 떠오르지만 오히려 그런 의미에서 평범(?)해 보이는
그에게 왠지 관심이 갔던 것.
드니 디드로는 저명한 계몽사상가이자 백과전서파의 수장격 인물인데
2017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사는 내게는 무언가 특색없는 인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사상의 내용이나 영향이 시공을 넘어 나에게까지 울림을 줄만한 구석이 있는지
사실은 조금 아리송하기 때문에...

소설로 분류되는 책이기는 한데, 구성이 꽤 독특하다.
주인공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크와 그의 주인인데,
이 둘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화자의 존재가 굉장히 부각되어 있다.
대뜸 대화 중간에 화자가 끼어들어서 논평을 하는 부분도 많고,
어떤 때는 심지어 가상의 독자의 목소리까지 끼어들어서
예를 들어 "그런 것은 부당하다!"라고 외치면 거기에 화자가 대답하는 등...

이런 방식으로 통상 '소설'이라 불리는 장르의 관습이 꽤나 훼손되어 있는 느낌인데
이런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역자는 책 말마의 해설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 글쓰기를 선취한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하는 것 같지만 그런 설명은 내 생각에는 수레를 말 앞에 둔 격이 아닌가도 싶다.
개인적으로는 아마 '소설'이란 문(文)의 장르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나쁘게 말하면 혼란스럽고
좋게 말하면 다채로운 시도가 있었던 따름이지 않을까. 1700년대 후반에 쓰인 소설이니까.

특히 화자(저자)가 서사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것은
(심지어 중간에 자크와 그 주인의 이야기를 옆으로 제쳐두고 본인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글쓰기'라는 행위를 대하는 자의식이 표현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는데
당장 이런 별 것 없는 독후감을 끄적이는 나조차도 느끼는 이 '글쓰기'의 지난함과 어려움이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정제되어 표현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 희한하지만 부연하자면 디드로는 연극 배우론을 쓰면서 거기에 최고의 배우는 혼자 감동을 받아서
끅끅거리는 연기를 하는 인물이 아니고, 자신의 몸짓과 발성이 어떤 효과를 낼지 전부 파악하고 있는,
오히려 자신의 연기로 표현하는 그 감정에는 멀찍이 떨어져서 계산적으로 연기할줄 아는 인물이여야 한다는
내용을 적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게 글의 직조에서도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해보자면...

하여 중간에 화자는 자신은 당시의 통속적인 혹은 저자 본인이 열등하다고 느낀 다른 작품의 전개 방식을 예로 들며
자신은 그런 방식으로 글을 전개시키지 않고, 오직 사실만을 적어놓겠다고 엄숙하게 선언하기도 하는데,
주인의 입을 빌려 역사에 도덕적 훈계를 섞지 말라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지도(p.82) 모르겠다.
여하간 그런 것 치고는 전혀 '사실주의적'이지 못한 이 글의 얼개가 도리어 저자 본인에게는 대단히 사실적인 글쓰기의 방식이었다는 의미라면
여관 여주인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계속 삽입되는 여관 일꾼들의 방해를 예시로 들자면
저자는 그런 방식의 글이 '이야기를 한다'는 행위의 진정한 형태라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사실주의'적인 소설들의 형태는 오히려 화자가 이야기를 하고, 독자는 그것을 편하게 몰입하여 읽는
의외로 대단히 인공적인 글의 마당(?)을 펼치고 상정해놓는다는 점에서 부자연스럽고 비사실적이라는 일종의 주장이기도 한 건가?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웠던 점을 하나만 더 들자면
소설의 화자는 자신이 이야기를 하는 그 시간과 장소에 함께 입회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자크와 주인이 저 멀리로 사라지니, 우리는 잠시 이 이야기도 멈출 수밖에 없겠다...는 식의 서술이라던지.
바로 위 문단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이 '화자'의 존재가, 그 설정이, 생각보다 꽤 부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환기가 되는 독서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크는 제목에서 저자가 명시해 놓았듯이 운명론자인데,
계속해서 어떤 사건의 향방은 이미 '위에서 쓰여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그렇다.
사건의 연쇄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이 결정론이라면
그것이 어떤 주재하는 섭리(그것이 신일 수도 있고)에 의함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운명론일까?

여하간 재미있는 점은 자크는 그렇게 입버릇처럼 (본인이 말하기로는 후렴구) '저 위'를 말하지만,
즉 자신은 더 높은 원리나 법칙에 의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무릅쓴다는 점이다.
특히 초반부 여관에서 악당들과의 조우에서 그걸 볼 수 있는데
악당들을 혼내주고 나서 돌아온 자크에게 주인이 그들이 덤비지 않을 지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그는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해보기 전까지는 몰랐다는 것 아닌가.
자신의 의지와 그 실행에 방점을 찍는 운명론자라는 건 꽤 흥미로운 설정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크 본인의 입으로도 '두루마리가 풀리는 것'이라는 비유를 쓴 것이다.
위에 쓰여 있는데, 두루마리를 풀어 봐야 쓰여 있는 줄 안다는 것.

자크와 그 주인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데 (그게 어디인지 화자는 한사코 밝히기를 거부한다)
그러는 도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으나
작중 인물들 자신의 말대로 본성에 의해, 자크는 말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고
주인은 듣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특히 자크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자크의 사랑 이야기가 큰 화두이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런 저런 자잘한 사건에 의해 그 얼개를 풀어내는 것을 방해받고
사이사이에 다른 이들의 이야기나 대화 등이 삽입되면서 계속해서 지연된다. 고도?

그리하여 온갖 이야기들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소설인데,
기억에 남는 것들을 추려 보자면
역시 으뜸은 포므레 부인의 복수극이 되겠다.
이것은 두 주인공이 여관에 묵게 되었을 때 그곳의 여주인이
다른 객실에 묵은 두 명의 사정을 전해들었다며 다시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전달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포므레 부인이 자신을 배신하고 외도를 한 아르시 후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창녀를 고결한 여인으로 포장시켜 그가 그녀에게 반해 결혼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서술을 마치고 화자는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데 그녀의 처사가 극악무도하다고 하겠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남자들은 그보다도 작은 일을 가지고도 결투를 벌여 남의 몸에
칼을 꽂을 것이라 설명하는 부분은 제법 진보적인 시각이지 않나 싶기도.

더하여 아르시 후작의 이야기나 이후 위드송 신부의 이야기 등으로 미루어
당대 귀족이나 성직자들의 부패와 가식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같다.
특히 주인이 수도승들을 비난하는 부분이나(p.70) '두루마리를 쓴 자'를 욕하는 부분(p.120)을 보면
계몽사상가답게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듯도 하다.

주인공인 자크는 자기 주인에게 대단히 무례한 행동을 많이 보이는데
매를 맞을 기분이 아니라고 대든다거나 주인에게 계속 깐족거리는 장면들이 있다.
여주인의 여관에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중 그 상대가 되는 여성의 정체가 밝혀지는 데에서
그녀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녀를 찬탄의 대상으로 생각하던 주인이 "너 같은 녀석에게 그녀가..."라는 식의
말을 하자 거기에 화를 내 주인과 방에서 나가라, 싫다로 옥신각신을 벌이는 장면은 그 극치일 것이다.
이 장면의 결말은 여주인이 그들의 방으로 올라와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후 둘이 맺게 되는 약정에는 자크가 모든 업무를 맡을 능력을 지니고 있고 주인은 나약할 따름이라
오히려 실권은 자크에게 있고 주인은 그를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건 소위 주노의 변증법이 아닌가? ㄷㄷ;
뭐 이런 거창한 소리를 떠나서도 하인인 자크의 언행은 피식피식 하게 만드는 데는 있었던 것 같다.

감상은 이정도로 하고,
책이 대량 500쪽정도 되는데 그 중 70쪽 정도가 역자 해설이니 대단히 두툼한 구성이다.
대단히 혼란스러운 구성의 소설인데 덕분에 흥미롭게 정리도 잘 한 것 같다.
위에 쉰소리 한마디 적어놨지만 역자 해설에 들인 노고가 제법 대단했으리라.
그걸 읽고도 내 감상이라며 사족을 달기도 조금은 우습기도 했지만...

2017년 6월 30일 금요일

피터 게이, 모더니즘

속표지가 꽤 멋들어지다. 구성주의적인 느낌으로 중절모를 쓴 신사를 표현한 느낌? 아님 말고.
여느 예술사조가 그러하듯이 모더니즘 또한 단어는 거대하고, 정의는 어려워 그저 막막한 느낌만 주는 단어다.

저자는 모더니즘을 대강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는 이단의 유혹, 즉 관습적인 감수성에 저항하는 충동이며
또 하나는 철저한 자기 탐구이다.
다른 분류 기준에는 단점이 있다고.
에즈라 파운드의 "새롭게 하라!"는 슬로건이 그의 대표격으로 인용된다.
더하여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적의가 덧붙을 수 있겠다.

그런데 '개인'에 대한 주의 환기는 이미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르네상스기에 빛나는 그 천재적 개인들이라던지,
유아론이라는 비판까지 감수할 만큼 '나'를 중심에 놓았던 데카르트라던지 등이 그러하지 않나?
더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태도는 오히려 낭만주의적인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낭만주의와의 대별이 유효할 것 같은데 낭만주의 또한 개인에의 강조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천재'의 이미지가 낭만주의의 고안물이기도 했고.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낭만주의는 코스모폴리탄적인 계몽주의의 물결에 맞서서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려는 움직임으로서
(보통은 목가적인 형태의) 이상향을 설정한다는 점과, 그런 이상적 시공간을 어떤 구체성 안에 투사하는 방식을 통해
예술활동을 했다는 느낌인 것 같다. 그 구체적인 존재가 소위 '천재'인 것이겠고 뭐 '민족'인 것이겠고 등등...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겠지만 낭만주의에서 개인을 강조하는 것은 일단 이념이 먼저인 셈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진보...적?) 물결에 대한 반동적 성격과 '천재'상을 중시하는 것 치고는 희한하게도 집단성이 강조되는 성격이 공존하는 것으로
음... 이것봐라; 파시즘의 시초?

그러면 모더니즘은 일단 '진보'라는 단어에 깃든 긍정성을 인정하든 안하든 간에
이미 달라져버린 세계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 시작인 것 같다.
모더니즘은 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 체제, 세계화, 도시화를 모두 포용한다.
그가 처한 삶의 조건이 '그렇게' 된 이후 이를 받아들인 인간들이 내놓은 예술의 갈래들을 총칭하는 단어가 아닌가...
다시 말해 내 생각에는 모더니즘이란 뚜렷한 구획이 가능한 흐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세대의 구분인 것도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 가량을 살아가던 세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저 삶의 조건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기에,
그들의 예술은 자연히 이전과는 다른 형태를 띠었을 것이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나로서는 이런 세대적인 구분이 유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예술'을 대하는 태도로 보아도 예술이란
(계몽주의) 칸트에게는 완상의 대상이고
(낭만주의) 헤겔에게는 시대정신의 표상이고
(모더니즘) 니체에게는 개인의 예술로서의 삶의 표출인 것...일까?
'예술로서의 예술'이란 태도로 함께 묶을수도 있지만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차이가 그렇게 드러날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으로 분류 가능한 형태의 예술과 예술가들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그런 외부적인 조건을 인정하고 나서
예술가 본인, '나'에 집중한 사람들인 것 같다. 이런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나만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
여기서 기법에의 천착이 이루어진다. 모더니즘 예술은 어떤 형태로 드러나든 간에 내용과 형식의 대별에서
형식에의 집착, 그것도 새로운 형식에의 집착이 굉장히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형식에 집착하다가 '예술'의 경계마저 무너뜨리게 되는 결과(뒤샹, 팝아티스트)가 된 듯하고.

저자 또한 몇몇 곳에서 암시해 놓았지만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체제를 뒤엎어 보려는 의도를 지닌 이들의 작품들이
바로 그 부르주아들에게 각광받고 '팔리게 되는' 지점에서 모더니즘의 취약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아웃사이더로서의 감성(?)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형식의 고안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는 자연히 예술운동의 추동력 자체를 갉아먹게 되었으니까.

아마도 우리가 대중문화를 평가하는 방식도 이러한 태도와 적지 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몽키스는 안되고,
비틀즈는 되고,
비치 보이즈는 안될뻔 하다가 그래도 고개를 끄덕여 줄만한 이유가 바로
가수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한 음악을 부른다는 것에,
심지어 그것이 당대 대중문화의 맥락 안에서 아주 새로웠다는 사실과 결부하여
갈채를 받고 지금도 그렇게 회자되는 것일테니까.

꽤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는 것도 같다. 그렇게 보면.
음반을 몇천만 장이나 팔아낸 '대중문화'의 첨단, 그 기수들이 (모더니즘적인 잣대를 통해) 당당히 예술가로서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말이다.
소위 시대가 바뀌는 것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예술의 각 분야에 걸쳐서 모더니즘적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예술가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활동과 사상을 간단히 정리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벼운 내용이었고 읽기에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간다.
예를 들어 헨리 제임스,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푸르스트 이 네 명을 하나로 묶어
작은 장을 할애하는데 쪽수가 30쪽도 나오지 않을 때는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일람식 구성이 좋았던 건은 그저 어디서 줏어들었지 싶은 인물들이
어디에 위치하는 지를 알려준다는 점이었다. 회화를 예로 들면 인상주의니 야수파, 입체파니
고흐, 고갱, 세잔, 마티스, 피카소, 달리... 이름이야 심심찮게 듣지만 애써 정리할 이유를 못느꼈기에
어지럽게 이름으로서만 머릿속에 존재하던 인물들과 그들의 예술활동이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좋았다.
처음 듣게 된 이름들도 많았고.
제임스 앙소르와 에른스트 키르히너. 책에 실린 그림 몇 점만을 보았을 뿐이지만 전자의 유머감각과 후자의 묘하게 공허한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꽤 재미있었던 건 저자가 한두마디씩 논평을 남긴 부분인데 예를 들면
칸딘스키가 자기만의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그 모호하고 애매한 단어는 재활용된 낭만주의로 넘쳐날 뿐이었다.(p.234)
사실 그 새로운 소설가들(누보 로망)은 전쟁 전에 모더니스트들이 했던 문학비판을 재탕하고 있을 따름이었다.(p.724)
혹은 다다나 초현실주의에 대한 낮은 평가라던가...
이렇게 조금 거리를 두는 논평이 개인적으로 정말 흡족했던 것은 당사자들은 나팔에 꽹과리에 온갖 요란 소란을 떨어도
내가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어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갔던 것들에 대해 '시끄러운 건 시끄러운 것'이라고 말해준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당장 지금도 인터넷을 조금만 돌아다니면 개코딱지 같은 영화나 음반 등에 세상 천지에 둘도 없을 걸작이라며
뿌뿌 나팔을 부는 평론가연 하는 글들이 갈퀴로 긁히는 실정이니, 혼자서 잘나신 예술가 나으리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보여주는 이 사학자의 평가가 개인적으로는 뭔가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눈에 좀 밟혔던 것은
프로이트의 전기로 유명세를 얻은 저자답게
중간중간 프로이트를 미세하게 삽입하는 부분이 있는데 뭐 어떤 예술가는 '승화'를 시켰다던가 식으로.
이게 약간 거슬린다. 나는 아직 프로이트가 지금도 존중할만한 학자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
더하여 오타가 제법 많다. 읽으면 읽겠지만 앤디 워홀이 19세기 말에 활동하고
보들레르가 20세기 후반에 활동하는 내용을 담는 책이 되어버리는 건 꽤 우스꽝스럽지 않나?
심지어 장의 소제목에 '크누크 함순'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도 있고.
교정을 제대로 안 보고 그냥 출판한 느낌이 굉장히 많이 든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작은 자본론

마르크스 사상과 자본에 관련한 개론서는 이미 썩어넘칠대로 많다. 그러면 왜 이 책인가?
누군가에게는 아마 저자인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스타성(?)이 주효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고서야 이런 사람이 있구나... 했던 터라 애초에 이 책을 손에 들은 이유는
1의 추천 때문이었다. 어떤 글인가에 댓글로 달아놓은 게 있길래,
마침 책이 얇고, 제목도 적절해 보이고, 타이밍 좋은 추천까지 보고 한번쯤 읽어봐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망스럽다고까지는 못하더라도 만족스러운 독서가 아닌 것은 분명했는데
일단 제목부터 썩 잘 된 것이 아니었다. 원제는 대강 '내 딸에게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정도인 듯한데
작은 자본론이라....; 말의 무게가 너무 다르잖아 이건. 나는 80년대 골방 냄새나는 논의도 감수할 생각으로 펴들었더니
딸에게 세상을 올바르게 볼 것을 당부하는 아버지의 차분한 어조로 글이 되어있으니;

그러니 내용이 꽤 가벼운 게 사실이다.
그게 단점이랄 건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글이 아니다보니 독서경험이 아주 긍정적이기만은 어려웠다.

과연 저런 제목을 출판사에서 붙였을 때는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본 개념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내용인데
생산이라는 하부 구조를 강조하는 내용이라던가
시장과 시장경제의 대별, 이윤을 동력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설명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굳이 이 책이어야 할 이유가 개인적으로는 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다른 개설서 등으로 대강은 알고 있었던 내용이고...
어리게 잡으면 초등학생이 읽어도 될 내용을 지금 와서 읽으려니 페이지도 잘 안넘어가고...

재미있었던 건 부채를 통한 신용의 사이클이 '미래'에서 가치를 떼어오는 것이라는 표현과
실업 문제를 바라보는 저자의 설명이었는데
하나의 상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그 시장의 가격 균형에 맞도록 가격을 낮추다 보면 수요층이 생길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노동력 상품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고, 그러므로 사회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실업은 자기 노동력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개인의 문제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를 들어 집은 살고, 음식은 먹는다는 쓸모가 있으나 노동력 그 자체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윤을 위한 상품 생산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력의 가격이 하락함이 경제 침체의 신호로 기업가들에게 받아들여지면 도리어 사업 규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결말이 나기도 한다고.

굳이 나누어 본다면 저자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지 싶었던 것이
국가의 역할을 굉장히 강조한다. 시장이 실패하는 지점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이것을 국가가 나서서
조정해야 된다는 입장이 꽤나 자주 반복되고 있다. 소련의 경험이 이런 입장을 제법 막고 있다고도 난 생각했는데,
내가 이 사람의 생각을 짧은 책 하나 가지고 알 수야 없겠지만 일종의 사민주의자인가? 뭐 각자 입장은 있는 거니까.

2017년 6월 19일 월요일

최인훈, 광장/구운몽

[광장]
대한민국에서 글쪼까리 좀 줏어읽고 다닌다는 인간이라면
더듬이에 한번도 스치지 않기 어려운 바로 그 소설, [광장]이다.
이제사 읽게 된 것도 조금 웃기다면 우스운 일인데...

워낙 개작이 많이 된 걸로 유명한 작품이라
모르긴 몰라도 각 판본의 차이를 주제로 한 연구도 충분히 있을 법한데,
내가 읽은 건 전집본 1권으로 나온 판이다. 아마도 이게 일단 가장 최신판인듯?
개인적으로는 관념적인 외래어로 범벅이었다는 초기 판에도 마음이 꽤나 쏠리지만,
뭐... 이런 방식의 작품들이 으레 그러하듯 괜스레 최신판이 가장 나은 판처럼 느껴지는 마음도 한구석에 드는 것이다.

드디어 확인해 본 광장의 진면목은 사실 생각보다 강렬하지는 않았다.
그러하므로 광장이 입고 있는 후광은 역사적인 경험으로 인해 켜켜히 쌓인 먼지(?)에 기대는 측면도 좀 있지 않은가 싶다.
남한과 북한의 대립 사이에서 용감하게도 양자를 부정적으로 표상하는 일을 해낸 작품이 전무했고 후무했던 덕으로,
당대의 충격이 있었던 모양이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그때 참 충격을 줬지'라는 식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은 아닌지.

최인훈의 작품을 많이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여기서도 어김없이 뜬소리를 속으로 읊어대는 소위 '지식인'이 주인공이다.
소설의 현재는 중립국으로 가는 배인 타고르 호의 선상이다.
주인공인 이명준은 전쟁 포로의 신분으로 영어를 제법 하는 덕으로 통역을 맡아서
나름대로는 대우받으면서 지내는 형편인데,
선상에서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소설이 진행된다.

이명준은 분단과 한국전쟁의 사이의 시간을 살아가는 철학과 학생이었는데,
아버지의 친구이자 남한에서 은행장을 맡고 있는 변성제 선생 댁에서 기식하는 입장이다.
아버지는 독립 운동을 하던 인물인 모양으로 이명준 또한 소년기에 신징, 하얼빈, 연경 등에서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여하간 그런 활동들 끝에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나름 높은 지위를 맡고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 덕분으로 어느 날 경찰서로 끌려서 뭇매를 맞는 일이 생긴다.

그는 그다지 남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는 정 선생과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정 선생은 무의미한 일에 마음을 쏟으며 지내는 일종의 한량으로 어느 날 그가 새로 구하게 된 미라를 보여준다며
이명준을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서 남한의 갑갑한 상황에 관하여 일장 연설을 쏟게 되는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지만, 여기서 '미라'는 소위 전통, '우리의 것'도 그저 이런 식으로 박제화되어서
구경거리로서의 지위 정도만을 갖게 되었다는 자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후의 [회색인]을 읽어 보아도 최인훈은 당대의 문제를 직면하고, '전통'으로 후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여하간 이 일장 연설에서 이명준은 남한에는 광장은 없고 밀실만이 있다고 부르짖는데
여기서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은 아마도 이런 의미라고 생각된다.
광장이란 인간과 인간이 모여서 만들어낸 어떤 공동체 일반을 의미하고
밀실은 일종의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통칭함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밀실은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이라는 대목을 보아 그렇다.
그러므로 밀실은 근대에 등장한 주체, '나'라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인듯 하다.
남한에는 광장다운 광장이 없어서 문제고 북한에는 밀실다운 밀실이 없어서 문제라고 했던
그의 절규는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될 것 같다. 밀실의 비유로 제시되는 건강한 개인들이 모여
함께 소통하는 뜨거운 장이 그에게는 광장다운 광장인 셈이겠는데 어디 이게 간단한 문제일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광장이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 단초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
경찰서에서 고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당시로서는 아주 예삿일이었을 매 찜질을 당하고서 그는 속으로 읊조린다.
몸으로써 아버지를 느낀다고. 이 대목이 재미있는데 머리만 부풀어오른 지식인 이명준이 '몸의 길'을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어서다.
그때껏 아버지에게 연대감 비슷한 것도 하나 느끼지 못하던 그이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육박하는 고통을 통해서
이것이 아버지 또한 받았던 고통인가, 하고 문득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 사건을 연유로 하여 그는 우연히 마주쳤던 윤애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몸의 길'을 통해 소통해보려 시도한다. 개인과 개인이 맞닿아 소통할 수 있다면,
그러한 원리로 뜨거운 광장으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할 터라면 이는 그에게 제법 치열한 몸짓일 수 있다.
다만 그 수단이 이런 방식의 '사랑'(?)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회의 또한 들지만....
그러나 이 시도는 제법 간단히 기각된다. 윤애는 그와 소통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에 월북을 결행한다.

그가 당도했던 북한은 광장의 미명 아래에서 그 이름을 팔아먹는 허깨비들만 즐비한 공간이었다.
그곳은 오직 당의 역사와 당의 입장만이 유일한 이상으로 제시되고 그것을 앵무새처럼 따라하지 않으면
저 허깨비들에게 다시 박해받는 일만이 인민들에게 부과되는 곳이었다.
이명준은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그의 보고가 '부르주아적'이라며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이에 환멸을 느끼던 그는 은혜를 만나게 된다.

은혜와의 교제에서 그는 다시 한번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무용수인 그녀에게 모스크바로 떠나는 것을 만류했던 것인데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가도 이후 모스크바로 훌쩍 떠나버린다.
한국전쟁기, 낙동강 전선에서 뜻밖으로 그녀와 다시 조우한 이명준은 자기만의 공간으로 준비했던 동굴에서
그녀와 꾸준히 밀회를 갖는다. 그들의 밀회로 인해 아군(인공군)의 피해가 있을 수도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그들은
악착같이 그에 매달리는데 어느 날, 그녀는 딸을 가졌음을 그에게 알리고 얼마 뒤 폭격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그들이 맺어낸 소통의 결실이 문득, 체제의 폭력으로 인해 무마되어버린 셈이다.

어디에도 적이 없는 이명준은 포로 수용소에서 중립국행을 택하고,
타고르 호 위에서 끊임없이 느끼던 위화감,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기분의 정체를 문득 깨닫는다.
선장이 언젠가 갈매기들은 육지에 두고 온 여인들이 화한 것이라는 뱃사람들의 미신을 알려주었는데
이명준은 그 시선은 갈매기가, 그의 여인들이 보내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명준은 아마도 바다에 몸을 던진 것처럼 묘사된다.

책의 말미에 실린 해설에서는 평론가 김현이 어머니로 표상되는 바다에 자기를 던짐으로써
이명준의 행위에 절망이 아닌 희망이 깃들어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건 사실 조금 납득이 안 된다.
뭐... 패배주의적인 내용을 애써서 긁어오지 않으려는 태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싶지만,
자살이라는 결말은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도 거기서 절망의 정서를 읽지 않기 어렵지 않나?
이명준은 광장과 밀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바랐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던 게 아닌가 싶다.
(이 부분은 개고한 부분이라는데) 이명준이 선상에서 꿈을 꾸는 장면이 있다.
인공 치하의 서울에서 태식과 윤애를 만나 그를 구타하고, 그녀를 강간하려 하다가 깨어나는 장면이다.
이는 '몸의 길'조차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아닌가?

그는 남한에서 한 번, 북한에서 한 번, 두 번을 박해받고
두 번 여인들에게 배신당하고
두 번을 도피한 끝에
결국 그러한 결말을 맺은 것인데,
이에는 그의 소시민성이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봄직 하다.
그는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


[구운몽]
기왕 합본이니 이 또한 곁들여 읽었다.

꽤나 정리하기 난감한 소설인데,
주인공 독고민은 어느 날 귀가하여 자기에게 온 편지를 읽고는
자기를 훌쩍 떠났던 연인 숙이 자신을 애타게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약속 장소인 극장에서 그녀를 기다려 보지만 그녀는 오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일군의 시인들이 몰려 있는 카페에서 갑자기 '선생님'으로 오인받으며
시작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으며 쫓기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은행의 장 대우를 받기도 하고
무용수들? 쇼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희한한 수용소(아마도 정신병원)를 방문한 '각하'가 되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사이 혁명과 그 진압을 둘러싼 방송이 울려퍼지는데
수용소에 극비명령이 떨어져 풍문인이라는 죄명으로 수감되기도 하다가
장면이 바뀌면 술집의 여급과 거친 손님의 다툼을 목도하는 다른 손님이 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소설 내내 등장하던 혁명 혹은 반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가
남한의 가톨릭 대 주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9개의 인물과 역할을 번갈아 떠맡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기에 구운몽인지?

그러면서 왼쪽 뺨에 점을 가진 여성이나
카바이드등과 같은 눈빛의 늙은이라던가 하는 요소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러다 급기야는 정신과 의사인 김용길의 이야기나
영화의 해설 등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그러면 위의 꿈같은 이야기는
김용길의 창작이거나, 그의 병원에서 얼어 죽었다는 독고민 씨의 죽기 전 환각이거나,
어떤 영화의 장면장면들이었거나 한 것일 수도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조리극 같아서 슥슥 읽기에 아주 나쁘지는 않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아주 궁금한 것도 실은 아니다.
아마도 카프카를 염두에 둔 소설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카프카를 그닥 읽어보지 않아서
비교를 바로 해보지는 못하겠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른 작품은
[도구라마구라]인데 이를 최인훈이 접해본 일이 있을지, 하여 어떤 영향 관계가 정말 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떤 특징을 공유하는 인물들이라는 접점으로만 엮인 기묘한 단편들의 연쇄라는 구성과
김용길을 등장시키며 정신의학 비스무리한 것을 버무려놓는 부분, 특히 수백 년 전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개인 운운하는 부분이
선조의 기억을 유전해 받았다는 소재와 조금 비슷하지 않나 싶기도 하거니와,
액자의 테와 같이 빠져나가는 결말부 정도가 제법 유사해 보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뒤의 해설을 보면 이는 4.19를 이은 5.16에 대한 절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으나 중간에 나오는 시나 '4월'에 관한 서술 등이 과연 그럴지도 모르기는 하겠다.

후루룩 읽기엔 나쁘잖았지만 영양가가 높다는 생각은 굳이 들고 싶지 않았던 소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에 달린 댓글들

게르마늄

이문구, 관촌수필

소설가 이문구의 대표작인 관촌수필이야.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영화감독 박찬욱 여러 인터뷰에서 자주 추천했던 책이어서야.
아마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관촌수필을 그야말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면서 자기가 너무 아끼는 책이라고 얘기를 하더라고.
특히 공산토월을 읽으면서는 자기도 어찌나 울었는지 모르겠다면서.
나는 박찬욱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이름을 날린다는 예술가를
그렇게 울렸다는 소설이라니 관심이 갈법도 한 거잖아?

호기롭게 구입한 책이건만 읽기에 녹록한 것은 아니었어.
이문구는 소설어 사전이 나왔을만큼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는 소설가이다 보니
이게 '소설 읽듯이' 후루룩 읽히지가 않는 거라. 아무렴 옛 소설을 읽다 보면
까끌까끌 해석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문장들과 마주치곤 한다지만
아 이거는 정말 심하더라고. 정말 읽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던 거야.
하여 한 번은 읽어내야겠다 하는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방식이었지. 이짓을 책 전체에 했는데
하면서도 이거 참 무식한 짓이다 속으로 몇번은 되뇌였는데, 어찌나 귀찮고 품이 들던지 원;
여하간 이런식으로 부득부득 풀이해가며 읽었던 소설이건만
이렇게 읽어내려니 맛이 맛이 아닌 거라.
그랬던 게 몇 년 전 일인데 요번에 문득 눈에 띄길래 이거 이번에는
조금이나마 편하게 읽겠구나, 하는 마음과 그러니만큼 좀 더 음미를 하면서 읽겠구나,
어휘에 치이지 않고... 하는 기대가 있었지.

이 책은 작가인 이문구가 72-77년 동안 발표한 단편 여덟개를 묶은 소설집이야.
배경은 작가의 고향이라는 충남 대천의 관촌 마을이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 '나'가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야.
내가 이문구 씨의 전기에 대한 정보는 사실상 전혀 없으니 이 연작이 자전적일 것이라
기대할 따름이지만, 아마도 허구 또한 조금씩은 섞여 있을 테지.
그렇다고 허구의 비율이 어느 정도일까? 라고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로서 형상화한 관촌이란 공간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거야.

이 소설은 70년대를 사는 작가가 자기 고향을 다시 찾으면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나,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 어떤 사건들 등을 회상하는 형식이야.
(뒤의 세 편인 관산추정, 여요주서, 월곡후야는 '현재'의 이야기지만)
작가는 그런 그리운 장소와 시간을 떠올리며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아갔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해.
그러면서 이 관촌이라는 향토적 공간이 일종의 아련한 이상향으로 그려진다는 느낌도 살짝 받을법 한데
책의 말미에 권성우의 해설에서도 이 주제를 루카치가 말한 그리스 문화의 충만함과 연결시켜보려 시도해.
그러나 글쎄... 내 생각에는 이 부분은 따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락서산 - 관촌수필 1
말미의 작가의 말에 따르면 연작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기소개가 맞겠다고 생각했다네.
신정을 맞아 할아버지의 성묘를 하러 고향으로 내려온 작가가 풍경을 보며 떠오르는 소회를 서술하고 있어.
도입부터 양놈들 신년을 쇠는 일이 다 뭐냐고 역정을 내던 분이었건만, 신정을 타서 성묘를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묻어나고 있지.
더하여 작가는 선조인 이지함이 꽂아놓은 지팡이에서 잎이 돋아나 큰 소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다는
동네의 명물 왕소나무가 베어져 사라진 걸 보고 그야말로 '타락한 동네'라고 읊조리기도 해.

41년생인 이문구는 토정 이지함의 후예인 모양이야. 그래서 지체높은 양반가라는 의식을 가진 할아버지에게
어릴때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아서 주변의 상놈들을 하대해도 으레 그런 줄 알면서 사는 소년이었다고도 하네.

연작에 실린 단편들 모두 사실 그다지 서사라 할만한 게 없다시피 해.
굳이 말하면 서사보다는 묘사 위주의 소설이라 해야될 것 같네. 이런 풍경, 저런 인물, 자그마한 사건 등등...

소설을 읽어보면 뭔가 이상한 것이 이건 자신의 유년기를 서술하는 소설인데
아버지의 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거든. 찾아봤더니 이문구의 아버지는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한국전쟁기에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고 나오더라고.
거기다 이 소설에는 형제자매의 이야기도 하나 나오지 않는데 두 형이 또한 아버지처럼 처형당했다고 하네.
비단 작가의 아버지 이야기 뿐 아니더라도 이 소설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한국전쟁이 가져온 슬픈 사연들이 많이 등장해.

여하튼 이 편에서 아버지의 이야기가 잠깐 나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조하는 것이 이 단편의 주요한 점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작가는 여기서 가정에 무심했던 아버지의 모습이라던가,
당시에는 '위험 분자'로 찍힌 인물들은 예비 검속이라며 그냥 감옥에 가두기도 했던 모양이지?
그런 옥고를 견디고도 의연했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오히려 거리감을 느꼈다던가,
작가 본인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아버지와의 자그마한 사건이라던지 등등을 근거로
아버지에게 크나큰 거리감을 느꼈다고 토로하고 있어.
그리고 그런 만큼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경외심이 컸다는 고백을 하고 있기도 한데
실제로 바로 첫 페이지에 "내가 그리워해온 선대인은... 그분 한 분만이 진실로 육친이요..."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거든.

부친의 좌익 활동을 연좌제 삼으려는 사람들이 과연 대단했으리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일락서산은 할아버지의 대한 존경심을 담은 단편만은 아니리라고 짐작해봄직도 하겠지.
나는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의, 전통의 편에 섭니다. 라는 고백 아닌 고백이라고 읽을 수도 있을 거야.
여기서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내가 읽은 책의 54쪽에 보면 작가는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전통적 의식이 의미마저 무가치하게 여겨진다고 말하는 부분이야.
전통에 무의미함을 느끼지만, 그런 의식의 화신이었던 할아버지에게는 경애를 느낀다는 말은
단순히 보면 그저 사람의 정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묘한 느낌을 주는 데가 있지.


화무십일 - 관촌수필 2
여기서는 윤 영감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어.
동란 틈에 피난왔던 윤 영감의 가족에게 들이닥친 비극을 관찰한 작가가
그를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는 이야기야.

여기서 윤 영감의 아들인 윤학로는 징집을 피해다닌 청년이거든.
그에게 크나큰 불행이 닥쳤다는 건 과연 작가가 경험하고 관찰한 바를 서술하기만 함일까?


행운유수 - 관촌수필 3
여기서는 작가 집에서 안머슴 노릇을 하던 옹점이라는 여성을 주로 다뤄.
옹점이는 화자인 나에게 말하자면 나이 차 조금 나는 누나 같은 인물이야.
인정넘치고, 남을 항상 보살펴주고, 챙겨주고, 티격태격 할 때도 있지만 져 주기도 하고...
내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 어디서 났는지 카라멜을 가져다가 입에 넣어 주기도 하고.

중간에 작가는 회고조의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에 갑자기 현재로 돌아와서는
근래에 유행하는 주체성이니 주체 의식이니 하는 말이 자기는 참 마뜩잖다고 하거든.
이 또한 '외래종'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나쁘지는 않겠지.
오히려 이런 속 빈 강정같은 말잔치보다는 본인의 행동으로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작가는 옹점이가 본인의 인생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주체적인 인물이라고 공언하기도 해.

그런 옹점이도 다른 집에 시집을 갔다가 동란 중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게 돼서
남편 잡아먹은 년이란 소리에 구박만 받다 결국 약팔이 일행에 떠돌이 신세가 됐다는 내용으로 끝이 나는데,
본인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남긴 소중한 사람마저 그런 식으로 잃어야 했다는
당대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는 셈이기도 하지, 이런 내용은.

관심이 반짝 갔던 내용이 있는데,
옹점이가 시집살이하던 집에서 고추가루와 마늘을 넉넉히 써서 김치를 담갔다며 구박을 맞는 내용이 있거든.
한국인이 세계 기준으로도 고추와 마늘을 그렇게 먹는다고 하더니
당장 5,60년 전에는 이런 사정들이 있었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고추나 마늘을 많이 쓰는 식문화는 그런 식재료가 풍족해지고 난 뒤에
'우리 집도 부잣집처럼 이렇게 해 먹는다'는 일종의 과시적인 형태가 굳어지게 된 건 혹시 아닐까?

여하튼, 이 인물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렇게 순박하고 속없지만 남을 위하는 인물상이 소설에 많이 등장해.
그건 이제는 없는 시골의 따뜻한 사람들을 형상화하는 것이기도 하겠고
작가가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읽으며 마음이 푸근해지기도 하네.


녹수청산 - 관촌수필 4
작가가 따르던 동네 청년 대복이의 이야기를 여기서는 하고 있어.
이야기가 반분되는데, 초반부는 대복이나 그 어머니와 함께 부대끼며 지냈던 작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특히 대복이와 이곳저곳 쏘다니며 짐승들 잡으며 놀고 장난치며 놀았던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동네 망나니 취급을 받던 대복이가 기어이 삐뚤어져서 안하무인에 도둑질까지 일삼으면서 다니다가
결국 잡혀들어가기까지 하는 이야기야.

그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내용은 참봉집 규수였다는 순심의 이야기인데,
군산까지 유학을 했던 지모겸비의 아가씨였으나 이 처자가 도시 물을 먹더니
고향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좌익 활동을 하게 된 거였어. 그러다 어느 날 대복이가
강간 미수 혐의로 잡혀 들어갔다 나온 거야.
국군에게 마을이 수복된 이후 대복이가 빨갱이 척살을 외치고 돌아다니니 참봉집이 벌벌 떠는 거지.
그런데 대복이가 대뜸 참봉집에 머슴살이를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게 되고...

대한민국의 형성 자체가, 그리고 한국전쟁의 경험이
남한 땅에서 좌익 비슷이라도 했던 건 그야말로 일소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여기서도 좌익 활동을 했던 인물에게 커다란 비극이 찾아오고야 말았지?
심지어 결말부를 보면 마치... '범죄자가 도망쳐서는 안 된다'던 범죄영화 장르의 검열 클리셰까지 조금 떠오르고.
이건 자연스러운 사실의 서술이기도 하겠지, 역사가 그랬을 테니. 그러나...


공산토월 - 관촌수필 5
이 단편은 박찬욱이 읽고 이렇게 펑펑 울었다는 편이야.
아... 나도 이걸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뿐은 아니겠지만
연작 중 최고작이라고 여기게 되네. 여기서 소개하는 인물의 됨됨이와, 그의 마지막이 워낙 가슴 절절하게 느껴져서...

단편이 조금 희한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초반에는 웬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
영화 [대부]에 관련하여 이런 폭력적 영화를 개봉해도 괜찮은가 하는 찬반이 있었나봐.
작가에게 찬성 편에 서서 글을 한 편 써달라는 청탁이 오는데 그 근거가 냉혹한 면이 있다는 평가가 있어서라나?
거기에 기막혀 하면서도 과연 내가 그런 면이 없다고만 할 수 있겠나... 하며 회상으로 들어가는 글의 구성이지.

주인공은 신현석, 본인이 돌을 좋아했기도 하지만 천생 돌처럼 우직했던 사람이라 석공石公으로 불렸다는 사람의 이야기야.
이 인물의 소개를 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형태의 혼례식을 묘사하고 있기도 해.
작가에게는 그곳에서 본인의 아버지가 신명나게 노시는 모습을 보고서 감명을 받았던 기억도 있는 듯한데
그런 풍경이 작가뿐 아니고 마을의 모두에게도 충격적이고 의심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인 광경이었던 모양이야.
그 이후로 석공은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외경이 더욱 깊어져서 그렇게 위할 수가 없었다는 식인데
작가 부친의 옥바라지에 정성이었고 그를 빌미로 같이 잡혀 본인도 옥살이에 고문까지 겪었다는 내용이 나오네.

그러다 전쟁기에 인공 치하의 짧은 시기에 석공이 잠시 면청 서기로 발탁되는 일이 생기고
국군의 수복 이후 그 때문에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됐다는 내용이 이어져.
그 이후로 고문과 형무소 생활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몸이 망가졌음에도
그야말로 형무소에서 못한 일 다 하겠다는 듯이 묵묵한 소처럼 내남없이 마을 대소사에 열심이었다고 하네.

그러다 채 40도 채우지 못한 어느 해에 그가 갑자기 쓰러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며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작가는 가족처럼 가까운 이의 일이니 밤낮없이 그를 보살피는 거지.
백혈병으로 투병하는 석공의 마지막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는데,
나는 살아야만 한다고, 논답 다 팔아서라도 살려달라며 부르짖다가도 퍼뜩 자식들 생각에
자기가 죽고 만다며 번갈아 체념하는 모습을 보면 한번씩 울컥울컥 치밀어오르는데,
심지어 이대로 죽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런 자기희생적 인물은 문학을 읽으며 자주 볼 수 있지.
문학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기에 오히려 이런 인물형은 진부할 때가 있어.
좋은 것은 반복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진부해지는 것이 아닐까?
현실에서 보기 힘든 인물형이기에 오히려 관념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석공의 저 삶을 향한 절규가 굉장히 와닿더라고.
그저 소같이 묵묵한 인물형을 그리고 말았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이긴 했겠지,
그러나 저 절규 때문에 이 인물은 현실감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고,
'나'가 있는 인물이 너나없는 희생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더욱 큰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거지.
개인적으로 관촌수필을 읽으면서 아주 입맛에 맞는 글이라고는 차마 못 느끼겠음에도
공산토월의 후반부는 읽을때마다 가슴이 저릿, 하네.


관산추정 - 관촌수필 6
이 편부터는 관촌과 작가의 현재를 그리는 내용이 나와.
엄밀히 따지면 공산토월부터 작가의 현재의 삶을 그리는 것이긴 하겠지만
이 이야기부터는 현재의 이야기가 도입이나 액자의 테로서보다는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것 같아.

여기서는 작가의 또래 친구였던 대복이와 대복 아버지인 유천만을 주로 그리고 있어.
대복 아버지가 일이라고는 전혀 손에 잡지 않는 한량이지만, 여기서기 쏘다니며
마을의 자질구레한 일은 도맡는 인물이었다는 내용이 나와.
특히 마을에서 여우 우는 소리가 들리면 재수가 없다며 장정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와서 쫓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서 앞장서는 인물이었다고 하네.

재미있었던 장면은 284쪽에 작가가 쇳도막이나 양철조각을 훔치곤 했다는 대목이야.
양반집 자제로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하던 할아버지라던가,
미군이 던져주는 음식따위 절대 먹지 말라고 하던 옹점이의 역정을
기껍게 받아들였다고 서술하던 작가 이문구의 모습이건만
여기서는 여느 마을 개구장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문득 나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인데
무심코 이런 서술을 했던 거라면 작가가 직조한 그의 어릴 적 삶은 어떤 잣대에 맞춰서
재구성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따라서 슬그머니 드는 거지.
이 한 줄에서 그만 아차, 하고 본심이 나왔던 건 아닐까 하게 되는 거야 ㅋㅋㅋ

그런가 하면 이런 장면도 있어. 눈병이 났던 작가를 보고 작가의 할아버지는
살 없는 방향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집에 못을 박은 일이 있으니 아이의 눈이 상했다고 하거나
팥을 쥐고 주문을 외면서 눈을 비벼주기도 하는데
이어 작가는 복산이네 가서 그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짧은 동물 뼈를 매달아줬다고도 해.
작가가 그리는 관촌은 이런 주술이 통하던 세계인 거야.

또한 작가가 붓글씨를 대단히 귀찮아 했다는 서술이 나오기도 하는데
당장 일락서산에서는 아버지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고는 홀로 열심히 붓글씨 연습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거든.
이건 모순적이라고까지는 못하지. 싫지만 열심히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작가가 연작의 초반부 단편들에서 말한 내용과 조금 부딪친다는 느낌을 받는
서술들이 이 단편에서 엿보이게 되니 어떤 일이었을까? 갸웃 하게 되기는 하지.

단편의 마무리는 현재로 돌아와 장성하여 처자식까지 둔 복산과 만나 그의 집에서 하루 묵는 이야기로 맺어져.
나들이객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이야기나,
반가웠던 도깨비불들이 사실 낚시꾼들이 켜놓은 불이었다는 이야기,
관광객이 들판에 버리고 간 콘돔을 먹고 속이 꼬여 돼지들이 죽어버렸다는 이야기,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나버려서 잠복 형사가 근무하는 데 복산이가 라면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러 가야 한다는 이야기 등
관촌의 옛날과 지금의 대비를 선명하게 그리고 있어.


여요주서 - 관촌수필 7
이 단편도 작가의 고향 친우 신용모가 겪은 조금 안타까운 사연을 그린 이야기인데
동네 아이가 꿩을 잡아다 팔려고 하길래 본인이 나서서 좀 흥정이라도 잘 해 주려다가
보호동물을 팔려 했다며 연행돼서 결국 재판정에까지 서게 된 그의 사정을 작가가 관찰한 거야.
여기서는 아예 '옛날'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지.
꿩 따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았던 옛날과는 달리 삭막해진 지금의 인정을 그리려던 걸까?


월곡후야 - 관촌수필 8
김희찬이라는 친우가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그 아들 수찬이가 조금 수상쩍인 일을 벌이는 듯 하여 작가가 함께 지켜보는 게 주요한 골자야.
열네살 먹은 순이라는 아이가 사나운 개한테 놀라 자빠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 통에 낙태를 하게 돼서 마을 사람들이 대경실색한 거지.
범인이 누구냐 하던 끝에 결국 두 해 전에 귀농했다던 김선영이란 인물이었던 거고
그가 나름 수를 써서 당국의 처벌을 피하는 눈치가 되다 보니 마을 청년들이 그를 잡아와서
린치를 하려고 했던 거야.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렇게 잡아온 김선영을 가운데 두고 청년들이 놓는 으름장인데
그 중에 국민교육헌장도 모르니까 그런 못된 짓을 했다는 말이 있거든.
혹은 우리가 지역 사회 발전과 근대화를 위해서 발벗고 나섰다고 말하는 대목이라던가.
박정희 시대는 혹시 당시를 살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시해주고,
그걸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의식을 함양해 줬던 시대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이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
이 장면에서 몽둥이를 들고선 코 큰 척 하는 청년들이 바로 지금
50,60대들인 셈이고 그들의 소위 '꼰대질'이나 좀 더 심하면 '박사모'짓들이 저런 경험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으니까.
그런 일면을 엿보게 하는 장면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자부심일 수 있었겠구나,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가 상명하달식이기는 했으되 민중의 차원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기도 했구나, 하는.


이로써 관촌수필 독서 후기는 대강 마무리인데,
마지막에 하고 싶어서 남겨 놓은 이야기가 하나 있지.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서는 여러 대비가 나오거든.
이는 전통과 근대, 시골과 도시 정도의 대비로 추려보면 되겠지.
그 중에서도 작가는 푸근한 정이 남아 있던 시골과, 그곳에서 지켜지던 전통을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것 같아.
하여 이 소설에서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야.
당장 내가 읽은 책 말미의 해설들이 그렇고 이 책을 추천한 박찬욱도 한국의 전통적 공동체상을 그렸다는 식으로 말했지.

그런 방식의 작법과 독법은 사실 이 텍스트가 작가의 직조물이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거든.
너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쓴 것이지? 라는 질문을 던지니 그런 대답이 나오는 거야.
그런데 동시에 이 소설은 작가가 자신의 유년기를 회상하며 쓴 자전적 기록이기도 해. 제목의 '수필'은 거기서 연유하겠지.
이 텍스트는 적어도 이중의 지위를 가진 바, 한쪽 면만 보는 독법이 온당할까? 싶어지기도 하는 거지.

만일 이 소설이 개인적인 체험의 기록일 따름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
작가가 그리워하는 인물들과 풍경들이 사실은 이 책을 읽고 있던 나에게는 그렇게 푸근한 것만은 사실 아니거든.
조명도 어두컴컴하고 땟국물이 질대로 진 부엌의 풍경이나
쉰 막걸리에 똑같이 쉬어 빠진 열무김치나 우적우적 씹는 술자리의 모습,
갯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즐겁다고 깔깔대는 아이들이 모습,
아마 할아버지를 찾아온 나이든 사람들 군내를 견디기 힘들었다던 작가의 어머니의 한마디도 있지만
얼마나 쉰내 풀풀나는 사람들이었겠어?
거기에 이름도 모르는, 이미자보다도 더 윗세대의 가수들이 불렀다던 창이라던가 등등.
단적으로 말하면 내겐 불편하고, 더럽고, 심지어 흉한 것들이지.
내게 그리운 풍경은 오히려 80,90년대의 풍경들이야.
치토스 먹으면 따조 나오고 그런 거 있잖아. 문방구에서 꾀돌이 사먹고.

읽다보면 심지어 작중에도 드럼통이니 전봇대니 전깃줄이니 철로니가 등장해.
사실 이문구가 그려낸 관촌의 풍경은 의외로 이미 근대문물이 침입해있는 공간이야.
오히려 40년대에는 너무도 당연해 그릴 수 없었던 풍경들이 문득 30년 가량의 시간이 지나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그려진 풍경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지는 거지, 나는.
요컨대 이건 70년대를 살던 작가가 문득 사무치게 그려낸 응답하라 1940같은 거야.
40년대라고 특정해버리니 뭔가 묘해지지? 전통적 이상향을 그리기에는 그렇게 옛날도 아니라는 느낌이잖아?
아마 그 30년 정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립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그러니 오히려 작가가 비판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들조차 오히려 내게는 낡은 것으로 다가올 때,
또한 예를 들어 8,90년대에는 작가가 그린 '현재'가 누군가에겐 추억으로 회상하는 '과거'가 되어
그것을 누군가가 또한 윤색해서 그리기도 했다면, 결국 내가 읽는 건 작가의 '그리워한다'는 행위와 그 정서인 거지.

소설을 논하면서 가장 중요한 점을 아직도 이야기하지 않았지.
이 소설의 문체는 다채로운 어휘의 구사로 요약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위에서 내 입맛에 썩 맞지 않는다고 했던 것도 이것이 큰 연관이 있어.
어찌나 읽으면서 심상에 브레이크가 걸리는지; 외국어 원서를 읽는 기분이 다 드니까.
나는 그런 생각도 들었어. 이 까끌거리는 문체야말로 소설이 그리고자 하는 전통에의 동경을 곧바로 체화한 것들이거든.
이를 못내 편하게 읽을 수 없음이 곧바로 그 전통적 풍경이 와닿지 않는 나의 모습과 연결된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러니 온전히 개인적인 텍스트라고만 하면 내게는 사실 전혀 감동적일 게 없는 소설인 셈이야.
암만 전통이니 농촌이니 해봐야 무슨 소용이람? 내게 와닿지 않는걸.

그러니 이 텍스트를 그저 작가 개인의 체험을 그린 것이라고만 봐서는 안 될거야.
이 개인적이고도 개인적인 내용들을 우리는 왜 읽을까? 거기서 어떤 보편성을 끄집어내려는 생각이 있어서 아니겠어?
그렇다면 거기서 어떤 의도를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든.
바로 위에서 적었지만 소설을 나는 하나의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은
나는 맛도 모르는 가재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가재를 잡느라 친우들과 뛰놀던 기억을 회상하며 마음 한켠이 저리는 경험이거든.
이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거야.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소설이 이렇게 자전적 기록과 허구적 구성물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었어.
지나간 것 그리워지기 마련일 따름이니...

2017년 6월 5일 월요일

장승진·프랙티쿠스 연구팀, 나는 더 영어답게 말하고 싶다 구동사편

음 드디어 네번째 권까지 2회독을 마쳤다.
그치만 스피킹 연습이라고 해봐야 짬짬히 책 펴서 입으로 소리내 읽고
표현들 머리에 담아두려고 좀 끙끙대는 게 전부이다 보니 결국
스피킹 실력이 그닥 느는 기분은 전혀 아니라 답답하긴 하네.
결국 연습을 해봐야 하는 거고 투입한 시간이 정직하게 드러나는 법인데
말하기는 연습의 절대량 자체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이런 책 읽어가면서 자기기만 하는 것도 한도가 있게 되네... 음;

여튼, 책을 펼치면 바로 느껴지는 건 이전 책들과 글씨체가 조금 달라졌다는 거야.
나는 그런 부분에서 일관성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약간 거슬렸네.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배울 때 관사와 전치사가 가장 골치라고 하지?
우리말에 없는 개념이라서 와닿지가 않으니 더 그런 것 같아.
그러니 구동사도 머리를 싸매게 하는 개념일 수밖에.
어차피 구동사의 맥을 뚫는 신묘한 법따위야 있을리 없고
이 책은 유의미한 구동사를 200여개쯤 추려서 예문을 곁들여 설명하는 정도의 책이야.

어디가 특출나게 거슬린 건 사실 없었는데,
전반적으로 표현의 선택이나 예문의 질이 조금 별로라는 인상을 받았어.
혹은 구성이 조금 무의미하게 반복적이라는 느낌도 많이 들었는데
예를 들어 50쪽 근처에 전화와 관련된 표현들을 나열하거든.
이것들이 몇쪽에 걸쳐서 독립된 표제로 나와야 할 표현들인가 좀 의심이 가기도 하는 것이...

이전의 세 권은 사서 읽은 게 아깝다고 생각 안했는데
이 책은 좀 도서관용이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

2017년 6월 3일 토요일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이 책은 여기, 독갤에서 보고, 알고, 읽게 된 책이야.
누군가가 자기 책장샷을 올렸고, 거기에 이 책이 있었고, 아마 한경님이 이 책에 대한 코멘트를 간단히 하셨어.
내가 한국현대사에 아주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중앙정보부 비사라는 게 흥미를 자극했지.
제법 두터운 책인데, 내용이 어려울 건 전혀 없고, 오히려 소설식으로 술술 읽히는 책이었어.
아마 신문에 연재했던 내용을 묶어서 나왔던 책을 12년에 개정해서 출간한 모양이야.
대충 찾아보니 나름대로 고전적인 지위를 부여받은 저작이라는 모양인데.

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사실 한마디로 말하면 "더럽고 치사하다"야.
세상에 그 뒷공작에 뒷공작들이 더럽고도 더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인데
그 쓰레기더미 위에서 왕관을 쓰고 있던 게 박정희였던 말인가? 하는...
박정희가 독재자고 박정희 18년이 군부독재였다는 건 상식선이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지탱되었다는 세부를 엿보게 되는 건 또 신선한 충격이었네.
새삼스레 이 땅에 뿌리내린 민주주의가 참 자랑스러운 거였구나 하게 되더라고.
저런 막강한 힘을 저렇게 치졸하게 사용하던 인물들과 집단이 군림했는데도
거기에 맞서 싸우고, 이겼던 사람들이 있었구나, 하게 돼서.

요즘 느끼는 건데, '역사'라는 게 참 오묘해.
역사란 꼭 책에 기록된 거창한 일들만은 아니거든.
모든 역사는 누군가에겐 동시에 일상이었을 테니까.

여기 쓰여 있는 일들은 물론 당시에는 정부의 고위층만이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었겠지만, 여기서 서술하는 폭력들이 얼마나 낙수되었을지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어쨌든 나 어릴때까지만 해도 당장 군에서 의문사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학교에서 선생들이 학생들 빠따질하고 귀싸대기 올리고 그런 일들이 아직도 채 없어지지 않았었거든.
당장 논산훈련소 인분 사건도 고작 2005년 일이니. 시대의 그림자가 길지.

뭐 박정희 시대가, 중정이 그런 폭력적인 시대의 모든 책임을 안았다고는 생각 못하지.
당장 이 책 1장에도 중정에는 일제 앞잡이 고문기술자 같은 이들도 모여들었다는 내용이 있었으니.
그런 경향의 확대 재생산에 분명한 일익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
저자의 표현이 좋은데 그야말로 무뢰배들이 모여들어 온 양산박이나 다름없었다는 서술을 하고 있네.
여하간 꼴뚜기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고 대통령이 총칼을 기반으로 집권하고, 그 아래 수하들이 그 위세를 업고
뭐 예를 들어 남의 멀쩡한 기업 강탈해가고 그러던 때이니...
얼마나 억울한 사연들이 많았을지 하나만 보고도 열을 헤아리게 되는 거지.
이렇게까지 말하면 비약이겠지만 저 하층의 좆도 없는 소시민조차 군대 가서 몇개월만 있으면 아랫것들 줄빠따를 때리고
재수없으면 실수로 사람 죽이기도 하던 때였던 거 아냐.
그런 시대를 일상으로서 살았던 사람들은 여기 실린 이야기들이 경악스러움 보다는
그저 자기 인생의 한자락을 회상하게 해 주는 흥밋거리일 뿐일까? 문득 궁금하네.

여하간... 책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중정의 역사를 훑는 거야.
김종필이 중정을 세우는 61년부터 박정희가 암살당하는 79년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시간순으로 굵직한 사건들과 그 사건에 어떻게 중정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대강 다루는 형식인데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씩 서술의 시점이 옮겨가기도 하고.
윤필용 사건을 서술하면서 강창성과 하나회의 악연같은 걸 서술하면서
12.12 이야기를 살짝 곁들인다던지 그런 식이지.

중정은 시작부터 국내 정치에 관여하려는 뚜렷한 목적이 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어.
박정희의 혁명공약은 사회혼란이 사그라들면 권력을 민간으로 이양하겠다는 거였거든.
그런데 현실은 자기가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돼서 그 권력을 받는... 자기가 자기한테 받는? 전개였지.
그 과정을 돕기 위해 온갖 공작을 벌이는 목적의 집단이 중정이었다는 내용이 나오네.
1대 중정부장 김종필이 공화당 창당을 위해서 주가조작을 감행한다던가...
ㅋㅋㅋㅋㅋㅋ 이게 도둑질이지 뭐야? 첫 단추부터 구린내가 풀풀 나는 거지.
중간중간 야당인 신민당의 국회의원들이 정권에 거슬리는 소리 하면 희한하게 감시가 붙고,
사고가 나고, 빨갱이로 몰고, 아예 정보부 요원들이 납치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뭐 여튼 책 내용을 따라가면서 설명하는 건 큰 의미가 없겠고...
읽으면서 느꼈던 점 몇 가지만 대강 말하자면

꽤나 경악하면서 읽었던 구절은 71년 대선에 쓰인 박정희 측 정치자금이 당시 국가예산의 10% 이상이었다는 내용이었어.
도둑질이라고 하면 이게 진짜지. 이런 대도가 어디 있어?
그 돈이 어디서 났을지 생각해보면 나는 혐오감이 느껴지는 거라.
박정희의 경제발전 신화는 내가 판단할 깜냥이 전혀 안되지만,
흐루쇼프가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했지.
소련은 스탈린이 있어서 독소전쟁에서 이긴 게 아니고 스탈린이 있음에도 이긴 거라고.
글쎄...?
도둑질을 하면 박정희만 꼴랑 하고 말았겠어? 망둥어도 뛰어야 할 거 아냐.
실제로 책에 6대 중정부장 이후락이 후에 그런 말을 했다고도 나오고.
"떡을 만지다 보니 떡고물이 손에 묻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고.

중정 5대 부장 김계원(이사람 작년에야 죽었더라; 명도 길지)때 정인숙이란 여성과 관련된 스캔들이 있었나봐.
그 여자를 보호해준다는 명목인지 일본 폭력단 계열 인물인 정건영이란 인간이
외환은행에서 돈을 당시 100억도 넘게 빌렸다는 내용이 있거든. 이게 나랏돈 아냐?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와의 연으로 그렇게 됐다는데, 이것도 웃기지도 않는 일인 거야.
죄 도둑놈들이잖아.
'높으신 분들' 오입질 쉬쉬하는 데 그 인력과 재원들이 낭비되었다는 건데 참...
심지어 저 정건영이 빌린 돈으로 벌린 사업 때문에 외환은행에서 계속 이자 명목으로 돈이 새어나갔나봐.
그걸 막으려고 77년에 재무장관이 뭐 저당잡힌 사업을 인수해서 부도처리를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혹여 암살당할까봐 그 인물은 일본쪽으로는 가지도 못했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삼스레 참 나라라는 게 내 생각만큼 쫀쫀하지 못하구나 싶더라.
어디 굴러다니는 폭력배 따위가 국가 요직에 앉은 인물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읽으려니까.
하기는 김형욱도 그렇게 비명에 갔다고 하니... 세상 새삼 참 무섭구나 싶기도 해.

얘기가 그렇게 되면 김대중 납치 사건도 참 대단하더라.
국가 기관에서 독재자에게 눈엣가시같은 인간이라고 냅다 납치해서
죽여버릴 궁리를 했었다는 게 참 ㅋㅋㅋㅋㅋㅋㅋ 그 무분별한 폭력의 강도가 말이지.

그게 6대 중정부장 이후락이 벌였던 일이라는데
중간에 이후락이 일본 대사관에서 일할 때 근처에서 즐겨찾던 초밥집의 초밥을
청와대까지 공수했다는 내용이 나오거든. 이것도 참 기가 차더라.
그렇게 똥꼬를 빨아대는 인간이나 빨라고 엉덩이를 대주는 인간이나.
내가 이런 내용까지 읽어야 되나? 싶어지더라고.

육영수 여사 피살 이후의 내용에서 박정희가 대단히 슬퍼하는 내용들이 나오거든.
그럴 수 있지. 개인으로서 슬픈 사건이었을 수 있어.
그러나 뭐 자신이 거사를 치루고 운영하느라 집안을, 특히 부인을 돌보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서술이 있던데 음... 나는 왜 여기서 코웃음이 자꾸 나오는 걸까.
본인의 무리한 집권과 권력욕으로 인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고문실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받았던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인데, 그것은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단 걸까?
그렇다면 박정희 개인의 마음 속에 있는 그 대의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다보면 기본적으로는 중정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 박정희라는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아.
그러나 어쨌든 박정희 정권을 뒷받침하는 버팀목이었으니 박정희 개인은 꼭 그림자처럼...
그보단 중정이 박정희의 그림자였겠고, 그 그림자의 이야기를 하려니
그림자의 주인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만, 이따금씩 자기 존재를 드러낸단 말야.
10.2 항명 파동때 대노했다는 내용이라던가 등등 말이지. 국정을 뒤에서 조종하는 정보부의 이야기라
은근슬쩍 대한민국의 역사는 일종의 충성과잉이 빚어낸 비극들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지만
어떤 사건, 어떤 폭력들은 박정희로부터 하달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건들도 제법 되어 보이거든.

내가 받았던 인상은 이거야.
박정희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혹은 칼을 손에서 놓기 아쉽기도 했을 테고.
내가 읽으면서 경악했던 내용이 있는데 유신을 선포하려고 준비하던 과정에서
미국의 닉슨 행정부나 일본의 대 중국 유화 정책이 유신 선포의 근거라는 걸 빼라는 압박을 받고
"뼈 없는 어묵"(심지어 이것도 일본어로 읊조렸다고)이라고 혼잣말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당시에는 북한과의 체제경쟁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살결에 와닿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 상황에서 대단히 의존하고 있는 우방국 둘이 중공과 데탕트 무드를 연출하니 이게 불안으로 작용하고,
불안한 사회는 혼란으로 이어지고 혼란한 사회는 북한에게 잡기 쉬운 덜미가 되니
철권을 휘둘러야만 한다는 판단이 유신으로 이어졌다는 게 나름의 논리였던가 봐.

물론 책에서는 그런 해석도 있어. 이후락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후
외부의 위협을 근거로 해서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이 꽤나 구미에 당겼을 수 있다는 거야.

허나 어찌되었건, 간간히 등장하는 박정희는 마치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나는 읽었는데, 이게 참... 모르겠어. 전여옥이 박근혜를 평하길 뭐 대통령이 가업이라는 식이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정말 한 나라를 그렇게 철권으로 다스리는 게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과연...
민주화된 사회에서 사는 내 눈으로 읽게 되었기 때문에 더 그게 불가해하고 불쾌할 수 있을 테지만...
정말 이 인간은 자신이 말하자면... 악한? 독재를 한다는 의식이 없거나,
혹은 이것은 필요악이다. 내가 악역을 짊어진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국정에 임했던 건가?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건 '박정희'가 할 수 있는 사명이요 임무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오른 인간이 박정희였을 뿐이고, 그렇게 흘러간 18년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역사로서
부여받아 버렸기 때문에, 기정사실로서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런 후광들이 나오는 것 같거든.
그러나 그 당시를 소위 일상으로써 살았던 인간, 개인 박정희가 본인을 그런 상으로 그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글쎄... 나로선 참 마음 한구석에 탄식이 흐를 수밖에 없더라고. 그 자리에 미련을 버리질 못하고
심지어 2인자를 키울 생각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런 개억지까지 부려갖고 3선개헌 후에 유신까지 하고,
전두환을 키운 것도 결국 박정희였던 걸 생각하면 말야.

뭐 일각에서는 전두환을 우상시하려는 사람들도 돋아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 인물은 그야말로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거든.
실제로 책의 서두에서부터 5.16을 성공시킨 큰 공이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였는데
이걸 기획한 자가 전두환이라고 나오고 있네.
읽다보면 우스운 게 전두환을 키운 게 박정희였던 것 같더라고.
박정희는 존중하지만 전두환은 독재의 마수다! 라는 이분법이 통하는 게 아닌 것 같아.
책을 읽어보면 뭐 그렇다고 박정희가 전두환 대머리가 반짝반짝 예뻐서 키워줬겠어?
그게 아니고 집권을 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다 보니 자기는 왕인데, 신하들이 기어오르는 걸 좀 막아야겠던 거라.
당장 김종필이 두고두고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듯 살았더라고. 견제에 견제를 어찌나 당하던지.
나는 어릴적 이미 3김이니 뭐니 거물 정치인 김종필만 봐서 정작 박정희 아래서는
그렇게 견제만 당하면서 시달렸는지는 생각도 못했어. 여하간...
육사 5기를 8기로 막고, 8기를 전두환이 속한 11기로 막는 식의 형국이었더라고.
나중 가서 전두환 집권시에는 17기의 불만을 기반으로 전두환 노태우가 집권했던 거였더구만.
그러니 결국 박정희의 그 권력중독 덕에 군부독재가 8년은 더 이어진 거잖아.
그런 쿠데타 행렬을 보고 "한국에는 대령 계급을 없애면 쿠데타가 사라질 거다"라고 한 미국인이 평했다는데
우습고도 쪽팔리는 일이지 싶네.

위에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지만, 박종규나 차지철같은 사람들이 딱 그짝이야.
박종규같은 경우는 고작 중사였던 인간이 줄을 잘 서서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의 역사에서
가장 서슬이 퍼랬다던 김형욱하고도 으르렁대던 사이라고 나오던데, 이 천박한 인간이 뭘 알면 얼마나 알고
뭘 하면 얼마나 알았겠어? 이런 무뢰배들이 떵떵거리던 시대였구나... 하는 착잡함이 난 많이 들더라.

예전에 들었던 한국 현대사 수업에서 교수님이 그런 말을 했거든.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회주의의 역사라고. 친일행적이 다만 보여주기 형식으로조차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 정도로
친일하던 인간들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
그 집단적 뇌리 한 구석에 '기회주의적으로 살아야 하는구나'가 각인된 거라고.
그런데 그게 꼭 일제강점기나 이승만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닌 거야.
고스란히 그런 천박한 인간들의 집권과 그 아래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살아갔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서 상세히 드러나고 있거든. 당장 지금 이름을 날리는 김기춘은 유신 헌법의 초안을 도맡았던 인물이더라.

진짜 어이가 없었던 건, 이게 신문 연재본이나 원판과 비교해서 어떤 추가가 이루어졌는 지는 내가 모르겠지만
여기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 살짝 있더라고.
원판에도 있던 내용이라 치면 당장 90년대 초에도 기자가 열심히 취재하면 알 수 있었던 커넥션이었다는 거잖아.
아무래도 현재와 연관된 내용이다보니 잠깐 지나치는 내용이지만 너무 화가 나더라.
그러고도 일각에 어떤 인물들을 최순실을 몰랐다느니 하고 있었단 말이지...; 음...

김재규는 근자에 대단히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이지. 뭐 그 재평가라는 게 주갤같은 데서
오오 재규어의 앞발터ㅂ 같은 형태로 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야.
의외로 이 책에서 김재규의 비중은 대단히 적어. 중정의 역사를 서술하는 게 주인 책이고,
중정 8대 부장으로서 김재규는 그다지 한 일이 많아 보이지 않더라고.
이미 박정희가 노쇠하여 판단력이 티미해졌는지 차지철 딸랑이 소리나 듣고 있었다는 식이다 보니
그에 밀려서 힘도 수완도 좀 부족한 중정부장이었다는 식으로 서술되더라고.
언젠가 김재규를 예찬하는 글에서 그의 임기시에는 중정에서 간첩조작사건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는 김재규가 좀 의젓한 선비 기질이 있는 인물이어서일수도 있지만 그럴 깜냥도 안되는 조직의 장이었던 건 혹시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더라.
여하간 저자는 10.26을 차지철과의 충성경쟁에서 밀린 후 고작 대위밖에 안되었던 인간이 자기를 하대하자
홧김에 그를 쏘고, 동석하게 된 박정희까지 쏘아 죽였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 같아.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김재규가 없었다면, 부마항쟁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지"라 했던 박정희라는데
광주로 인해 전두환이 8년을 해먹었다면 박정희가 부마를 찍어누르면 유신은 더 지속될 수도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김재규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만 할 수는 없는지도 모르지.
자지털이가 캄보디아 300만을 운운했다잖아.
더하여 김재규가 3선개헌을 지지해달라는 부탁으로 깍듯이 어르신으로 모시던 원로 정구영을 대하는 태도라던지를 보면
자기 나름의 원칙은 있었던 사람이었던 걸까? 싶기도 해.

대강 인상에 남는 내용은 이정도인 듯 하네.
아무래도 국회 내부의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한 내용들이 뇌리에 많이 남지는 않아.
흥미롭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건 전혀 아니지만. 내게 좀 더 살결에 와닿는 느낌이 없어서일까?

사실 굉장히 두꺼운 책이고
그런 만큼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종횡무진 등장하는 책이라
구체적인 역사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인상이었는데
이걸 가지고 후기를 대강 끄적여 보려니까 좀 두루뭉술~한 인상만 서술하는 글이 된 것 같네.
여튼 좋은 책이었어.

(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