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대한민국에서 글쪼까리 좀 줏어읽고 다닌다는 인간이라면
더듬이에 한번도 스치지 않기 어려운 바로 그 소설, [광장]이다.
이제사 읽게 된 것도 조금 웃기다면 우스운 일인데...
워낙 개작이 많이 된 걸로 유명한 작품이라
모르긴 몰라도 각 판본의 차이를 주제로 한 연구도 충분히 있을 법한데,
내가 읽은 건 전집본 1권으로 나온 판이다. 아마도 이게 일단 가장 최신판인듯?
개인적으로는 관념적인 외래어로 범벅이었다는 초기 판에도 마음이 꽤나 쏠리지만,
뭐... 이런 방식의 작품들이 으레 그러하듯 괜스레 최신판이 가장 나은 판처럼 느껴지는 마음도 한구석에 드는 것이다.
드디어 확인해 본 광장의 진면목은 사실 생각보다 강렬하지는 않았다.
그러하므로 광장이 입고 있는 후광은 역사적인 경험으로 인해 켜켜히 쌓인 먼지(?)에 기대는 측면도 좀 있지 않은가 싶다.
남한과 북한의 대립 사이에서 용감하게도 양자를 부정적으로 표상하는 일을 해낸 작품이 전무했고 후무했던 덕으로,
당대의 충격이 있었던 모양이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그때 참 충격을 줬지'라는 식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은 아닌지.
최인훈의 작품을 많이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여기서도 어김없이 뜬소리를 속으로 읊어대는 소위 '지식인'이 주인공이다.
소설의 현재는 중립국으로 가는 배인 타고르 호의 선상이다.
주인공인 이명준은 전쟁 포로의 신분으로 영어를 제법 하는 덕으로 통역을 맡아서
나름대로는 대우받으면서 지내는 형편인데,
선상에서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소설이 진행된다.
이명준은 분단과 한국전쟁의 사이의 시간을 살아가는 철학과 학생이었는데,
아버지의 친구이자 남한에서 은행장을 맡고 있는 변성제 선생 댁에서 기식하는 입장이다.
아버지는 독립 운동을 하던 인물인 모양으로 이명준 또한 소년기에 신징, 하얼빈, 연경 등에서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여하간 그런 활동들 끝에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나름 높은 지위를 맡고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 덕분으로 어느 날 경찰서로 끌려서 뭇매를 맞는 일이 생긴다.
그는 그다지 남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는 정 선생과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정 선생은 무의미한 일에 마음을 쏟으며 지내는 일종의 한량으로 어느 날 그가 새로 구하게 된 미라를 보여준다며
이명준을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서 남한의 갑갑한 상황에 관하여 일장 연설을 쏟게 되는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지만, 여기서 '미라'는 소위 전통, '우리의 것'도 그저 이런 식으로 박제화되어서
구경거리로서의 지위 정도만을 갖게 되었다는 자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후의 [회색인]을 읽어 보아도 최인훈은 당대의 문제를 직면하고, '전통'으로 후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여하간 이 일장 연설에서 이명준은 남한에는 광장은 없고 밀실만이 있다고 부르짖는데
여기서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은 아마도 이런 의미라고 생각된다.
광장이란 인간과 인간이 모여서 만들어낸 어떤 공동체 일반을 의미하고
밀실은 일종의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통칭함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밀실은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이라는 대목을 보아 그렇다.
그러므로 밀실은 근대에 등장한 주체, '나'라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인듯 하다.
남한에는 광장다운 광장이 없어서 문제고 북한에는 밀실다운 밀실이 없어서 문제라고 했던
그의 절규는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될 것 같다. 밀실의 비유로 제시되는 건강한 개인들이 모여
함께 소통하는 뜨거운 장이 그에게는 광장다운 광장인 셈이겠는데 어디 이게 간단한 문제일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광장이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 단초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
경찰서에서 고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당시로서는 아주 예삿일이었을 매 찜질을 당하고서 그는 속으로 읊조린다.
몸으로써 아버지를 느낀다고. 이 대목이 재미있는데 머리만 부풀어오른 지식인 이명준이 '몸의 길'을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어서다.
그때껏 아버지에게 연대감 비슷한 것도 하나 느끼지 못하던 그이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육박하는 고통을 통해서
이것이 아버지 또한 받았던 고통인가, 하고 문득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 사건을 연유로 하여 그는 우연히 마주쳤던 윤애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몸의 길'을 통해 소통해보려 시도한다. 개인과 개인이 맞닿아 소통할 수 있다면,
그러한 원리로 뜨거운 광장으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할 터라면 이는 그에게 제법 치열한 몸짓일 수 있다.
다만 그 수단이 이런 방식의 '사랑'(?)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회의 또한 들지만....
그러나 이 시도는 제법 간단히 기각된다. 윤애는 그와 소통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에 월북을 결행한다.
그가 당도했던 북한은 광장의 미명 아래에서 그 이름을 팔아먹는 허깨비들만 즐비한 공간이었다.
그곳은 오직 당의 역사와 당의 입장만이 유일한 이상으로 제시되고 그것을 앵무새처럼 따라하지 않으면
저 허깨비들에게 다시 박해받는 일만이 인민들에게 부과되는 곳이었다.
이명준은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그의 보고가 '부르주아적'이라며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이에 환멸을 느끼던 그는 은혜를 만나게 된다.
은혜와의 교제에서 그는 다시 한번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무용수인 그녀에게 모스크바로 떠나는 것을 만류했던 것인데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가도 이후 모스크바로 훌쩍 떠나버린다.
한국전쟁기, 낙동강 전선에서 뜻밖으로 그녀와 다시 조우한 이명준은 자기만의 공간으로 준비했던 동굴에서
그녀와 꾸준히 밀회를 갖는다. 그들의 밀회로 인해 아군(인공군)의 피해가 있을 수도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그들은
악착같이 그에 매달리는데 어느 날, 그녀는 딸을 가졌음을 그에게 알리고 얼마 뒤 폭격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그들이 맺어낸 소통의 결실이 문득, 체제의 폭력으로 인해 무마되어버린 셈이다.
어디에도 적이 없는 이명준은 포로 수용소에서 중립국행을 택하고,
타고르 호 위에서 끊임없이 느끼던 위화감,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기분의 정체를 문득 깨닫는다.
선장이 언젠가 갈매기들은 육지에 두고 온 여인들이 화한 것이라는 뱃사람들의 미신을 알려주었는데
이명준은 그 시선은 갈매기가, 그의 여인들이 보내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명준은 아마도 바다에 몸을 던진 것처럼 묘사된다.
책의 말미에 실린 해설에서는 평론가 김현이 어머니로 표상되는 바다에 자기를 던짐으로써
이명준의 행위에 절망이 아닌 희망이 깃들어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건 사실 조금 납득이 안 된다.
뭐... 패배주의적인 내용을 애써서 긁어오지 않으려는 태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싶지만,
자살이라는 결말은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도 거기서 절망의 정서를 읽지 않기 어렵지 않나?
이명준은 광장과 밀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바랐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던 게 아닌가 싶다.
(이 부분은 개고한 부분이라는데) 이명준이 선상에서 꿈을 꾸는 장면이 있다.
인공 치하의 서울에서 태식과 윤애를 만나 그를 구타하고, 그녀를 강간하려 하다가 깨어나는 장면이다.
이는 '몸의 길'조차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아닌가?
그는 남한에서 한 번, 북한에서 한 번, 두 번을 박해받고
두 번 여인들에게 배신당하고
두 번을 도피한 끝에
결국 그러한 결말을 맺은 것인데,
이에는 그의 소시민성이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봄직 하다.
그는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
[구운몽]
기왕 합본이니 이 또한 곁들여 읽었다.
꽤나 정리하기 난감한 소설인데,
주인공 독고민은 어느 날 귀가하여 자기에게 온 편지를 읽고는
자기를 훌쩍 떠났던 연인 숙이 자신을 애타게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약속 장소인 극장에서 그녀를 기다려 보지만 그녀는 오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일군의 시인들이 몰려 있는 카페에서 갑자기 '선생님'으로 오인받으며
시작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으며 쫓기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은행의 장 대우를 받기도 하고
무용수들? 쇼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희한한 수용소(아마도 정신병원)를 방문한 '각하'가 되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사이 혁명과 그 진압을 둘러싼 방송이 울려퍼지는데
수용소에 극비명령이 떨어져 풍문인이라는 죄명으로 수감되기도 하다가
장면이 바뀌면 술집의 여급과 거친 손님의 다툼을 목도하는 다른 손님이 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소설 내내 등장하던 혁명 혹은 반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가
남한의 가톨릭 대 주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9개의 인물과 역할을 번갈아 떠맡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기에 구운몽인지?
그러면서 왼쪽 뺨에 점을 가진 여성이나
카바이드등과 같은 눈빛의 늙은이라던가 하는 요소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러다 급기야는 정신과 의사인 김용길의 이야기나
영화의 해설 등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그러면 위의 꿈같은 이야기는
김용길의 창작이거나, 그의 병원에서 얼어 죽었다는 독고민 씨의 죽기 전 환각이거나,
어떤 영화의 장면장면들이었거나 한 것일 수도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조리극 같아서 슥슥 읽기에 아주 나쁘지는 않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아주 궁금한 것도 실은 아니다.
아마도 카프카를 염두에 둔 소설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카프카를 그닥 읽어보지 않아서
비교를 바로 해보지는 못하겠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른 작품은
[도구라마구라]인데 이를 최인훈이 접해본 일이 있을지, 하여 어떤 영향 관계가 정말 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떤 특징을 공유하는 인물들이라는 접점으로만 엮인 기묘한 단편들의 연쇄라는 구성과
김용길을 등장시키며 정신의학 비스무리한 것을 버무려놓는 부분, 특히 수백 년 전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개인 운운하는 부분이
선조의 기억을 유전해 받았다는 소재와 조금 비슷하지 않나 싶기도 하거니와,
액자의 테와 같이 빠져나가는 결말부 정도가 제법 유사해 보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뒤의 해설을 보면 이는 4.19를 이은 5.16에 대한 절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으나 중간에 나오는 시나 '4월'에 관한 서술 등이 과연 그럴지도 모르기는 하겠다.
후루룩 읽기엔 나쁘잖았지만 영양가가 높다는 생각은 굳이 들고 싶지 않았던 소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