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표지가 꽤 멋들어지다. 구성주의적인 느낌으로 중절모를 쓴 신사를 표현한 느낌? 아님 말고.
여느 예술사조가 그러하듯이 모더니즘 또한 단어는 거대하고, 정의는 어려워 그저 막막한 느낌만 주는 단어다.
저자는 모더니즘을 대강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는 이단의 유혹, 즉 관습적인 감수성에 저항하는 충동이며
또 하나는 철저한 자기 탐구이다.
다른 분류 기준에는 단점이 있다고.
에즈라 파운드의 "새롭게 하라!"는 슬로건이 그의 대표격으로 인용된다.
더하여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적의가 덧붙을 수 있겠다.
그런데 '개인'에 대한 주의 환기는 이미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르네상스기에 빛나는 그 천재적 개인들이라던지,
유아론이라는 비판까지 감수할 만큼 '나'를 중심에 놓았던 데카르트라던지 등이 그러하지 않나?
더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태도는 오히려 낭만주의적인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낭만주의와의 대별이 유효할 것 같은데 낭만주의 또한 개인에의 강조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천재'의 이미지가 낭만주의의 고안물이기도 했고.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낭만주의는 코스모폴리탄적인 계몽주의의 물결에 맞서서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려는 움직임으로서
(보통은 목가적인 형태의) 이상향을 설정한다는 점과, 그런 이상적 시공간을 어떤 구체성 안에 투사하는 방식을 통해
예술활동을 했다는 느낌인 것 같다. 그 구체적인 존재가 소위 '천재'인 것이겠고 뭐 '민족'인 것이겠고 등등...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겠지만 낭만주의에서 개인을 강조하는 것은 일단 이념이 먼저인 셈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진보...적?) 물결에 대한 반동적 성격과 '천재'상을 중시하는 것 치고는 희한하게도 집단성이 강조되는 성격이 공존하는 것으로
음... 이것봐라; 파시즘의 시초?
그러면 모더니즘은 일단 '진보'라는 단어에 깃든 긍정성을 인정하든 안하든 간에
이미 달라져버린 세계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 시작인 것 같다.
모더니즘은 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 체제, 세계화, 도시화를 모두 포용한다.
그가 처한 삶의 조건이 '그렇게' 된 이후 이를 받아들인 인간들이 내놓은 예술의 갈래들을 총칭하는 단어가 아닌가...
다시 말해 내 생각에는 모더니즘이란 뚜렷한 구획이 가능한 흐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세대의 구분인 것도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 가량을 살아가던 세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저 삶의 조건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기에,
그들의 예술은 자연히 이전과는 다른 형태를 띠었을 것이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나로서는 이런 세대적인 구분이 유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예술'을 대하는 태도로 보아도 예술이란
(계몽주의) 칸트에게는 완상의 대상이고
(낭만주의) 헤겔에게는 시대정신의 표상이고
(모더니즘) 니체에게는 개인의 예술로서의 삶의 표출인 것...일까?
'예술로서의 예술'이란 태도로 함께 묶을수도 있지만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차이가 그렇게 드러날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으로 분류 가능한 형태의 예술과 예술가들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그런 외부적인 조건을 인정하고 나서
예술가 본인, '나'에 집중한 사람들인 것 같다. 이런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나만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
여기서 기법에의 천착이 이루어진다. 모더니즘 예술은 어떤 형태로 드러나든 간에 내용과 형식의 대별에서
형식에의 집착, 그것도 새로운 형식에의 집착이 굉장히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형식에 집착하다가 '예술'의 경계마저 무너뜨리게 되는 결과(뒤샹, 팝아티스트)가 된 듯하고.
저자 또한 몇몇 곳에서 암시해 놓았지만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체제를 뒤엎어 보려는 의도를 지닌 이들의 작품들이
바로 그 부르주아들에게 각광받고 '팔리게 되는' 지점에서 모더니즘의 취약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아웃사이더로서의 감성(?)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형식의 고안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는 자연히 예술운동의 추동력 자체를 갉아먹게 되었으니까.
아마도 우리가 대중문화를 평가하는 방식도 이러한 태도와 적지 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몽키스는 안되고,
비틀즈는 되고,
비치 보이즈는 안될뻔 하다가 그래도 고개를 끄덕여 줄만한 이유가 바로
가수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한 음악을 부른다는 것에,
심지어 그것이 당대 대중문화의 맥락 안에서 아주 새로웠다는 사실과 결부하여
갈채를 받고 지금도 그렇게 회자되는 것일테니까.
꽤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는 것도 같다. 그렇게 보면.
음반을 몇천만 장이나 팔아낸 '대중문화'의 첨단, 그 기수들이 (모더니즘적인 잣대를 통해) 당당히 예술가로서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말이다.
소위 시대가 바뀌는 것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예술의 각 분야에 걸쳐서 모더니즘적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예술가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활동과 사상을 간단히 정리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벼운 내용이었고 읽기에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간다.
예를 들어 헨리 제임스,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푸르스트 이 네 명을 하나로 묶어
작은 장을 할애하는데 쪽수가 30쪽도 나오지 않을 때는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일람식 구성이 좋았던 건은 그저 어디서 줏어들었지 싶은 인물들이
어디에 위치하는 지를 알려준다는 점이었다. 회화를 예로 들면 인상주의니 야수파, 입체파니
고흐, 고갱, 세잔, 마티스, 피카소, 달리... 이름이야 심심찮게 듣지만 애써 정리할 이유를 못느꼈기에
어지럽게 이름으로서만 머릿속에 존재하던 인물들과 그들의 예술활동이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좋았다.
처음 듣게 된 이름들도 많았고.
제임스 앙소르와 에른스트 키르히너. 책에 실린 그림 몇 점만을 보았을 뿐이지만 전자의 유머감각과 후자의 묘하게 공허한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꽤 재미있었던 건 저자가 한두마디씩 논평을 남긴 부분인데 예를 들면
칸딘스키가 자기만의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그 모호하고 애매한 단어는 재활용된 낭만주의로 넘쳐날 뿐이었다.(p.234)
사실 그 새로운 소설가들(누보 로망)은 전쟁 전에 모더니스트들이 했던 문학비판을 재탕하고 있을 따름이었다.(p.724)
혹은 다다나 초현실주의에 대한 낮은 평가라던가...
이렇게 조금 거리를 두는 논평이 개인적으로 정말 흡족했던 것은 당사자들은 나팔에 꽹과리에 온갖 요란 소란을 떨어도
내가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어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갔던 것들에 대해 '시끄러운 건 시끄러운 것'이라고 말해준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당장 지금도 인터넷을 조금만 돌아다니면 개코딱지 같은 영화나 음반 등에 세상 천지에 둘도 없을 걸작이라며
뿌뿌 나팔을 부는 평론가연 하는 글들이 갈퀴로 긁히는 실정이니, 혼자서 잘나신 예술가 나으리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보여주는 이 사학자의 평가가 개인적으로는 뭔가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눈에 좀 밟혔던 것은
프로이트의 전기로 유명세를 얻은 저자답게
중간중간 프로이트를 미세하게 삽입하는 부분이 있는데 뭐 어떤 예술가는 '승화'를 시켰다던가 식으로.
이게 약간 거슬린다. 나는 아직 프로이트가 지금도 존중할만한 학자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
더하여 오타가 제법 많다. 읽으면 읽겠지만 앤디 워홀이 19세기 말에 활동하고
보들레르가 20세기 후반에 활동하는 내용을 담는 책이 되어버리는 건 꽤 우스꽝스럽지 않나?
심지어 장의 소제목에 '크누크 함순'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도 있고.
교정을 제대로 안 보고 그냥 출판한 느낌이 굉장히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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