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일 수요일

문영심,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제목에는 김재규 평전이라 쓰여 있지만 인간 김재규에 관한 전기적인 묘사나 내용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79년 10월 26일이 가까워오던 시기 당시 중정부장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실체를 목도하여
박정희를 설득할, 그리고 설득이 실패하자 거사를 단행할 결심을 하게 되는 초반 약간을 제하면 저자는 10.26 당일의 묘사와
재판 과정에 지면을 거의 할애하고 있다. 그래도 평전을 자처했다면 김재규의 성장과정 비슷한 것 정도는
서술해도 괜찮지 않았나 싶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개인 김재규의 삶이라 해봐야 크게 보아 당시를 살아가던 권력자들과 아주 다르지는 않았을 터인즉
저자는 10.26과 그 이후의 짧았던 모습이 '우리'에게는 더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런 내용을 저자는 소설식으로 서술한다고 느껴지는데
어떤 순간 어떤 인물의 내면묘사까지 읊어내는 소위 전지적 3인칭 시점의 화자로서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게 맞는 서술태도인지 조금 아리송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일종의 몰입감을 주기도 하고,
평범한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라는 점에서 딱딱한 문체를 피하려 했다는 것도 이해함직 하지만
그래도 꽤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글인데 읽으며 좀 낯간지럽다는 느낌을 억누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혹은 무슨 부마항쟁 당시 부산의 택시 기사가 중정 보고서나 진배없이 시세를 파악하고 있었다느니...
(이것은 아마 부마항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데, 이런 사회 하층의, 말하자면 무식해야 할 인물마저
지성을 가지고 당대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이니... 이런 투박한 '민중' 색안경이 좀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격이라 할만한 부분에서 공히 등장한 인물에 눈길이 가는데
책의 내용을 나름의 자료를 토대로 한 진실이라고 일단 상정하자면 이 인물은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사태파악을 위해
부산행 이후 시위대의 틈 속에서 정찰을 하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소위 '시민 동지'인데
김재규 추모행사에도 말없이 참가했다가 저자의 눈에 띄어 저자가 그런 사연을 듣게 되었다는 식의 내용이 있다.
이게 소위 수미일관을 노린 저자의 기교인지, 아니면 그런 사실이 정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만약 전자라면
글쎄... 나는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부려놓은 장치를 굳이 읽고 싶거나, 궁금했던 건 아닌데... 쯧, 하고 혀를 찰 수밖에.

거기에 김재규가 소위 시절 미군과의 시비로 일본도를 꺼내들었다느니 하는 일화 또한
저자는 그 일화를 소개하는 다른 인물의 입을 빌려 "싸나이 답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소위 '욱 하는 성질'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건 아닌가 싶고도 하고...
어차피 인간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그의 거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언행을 통해서 충분히 가능할텐데
이런 방식으로 미화할 필요까지는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신경써야 할 부분은 아니라지만.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식이다보니 뭐 사건의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
말하자면 이미 아는 내용과, 굳이 알 필요 없거나, 낯간지럽기만 한 서술들 사이에서 책이 유의미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런데 재판 과정을 다루는 3부부터는 제법 읽을만한 내용이 되었던 것인데 아마도 재판 기록에서 발췌한 것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발언들이 오고갔는지 세세히 인용하고 있고 그에 저자가 본인의 판단을 덧붙이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보다 읽으면서 낯간지럽지 않아 좋았고, 제법 충실한 기록을 읽는다는 맛이 있었다.

그 세세한 내용을 여기다가 인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읽으면서 내가 느꼈고 저자 또한 제법 강조했던 점을 적어보자면
하나는 이 재판이 그 자체로 제법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김재규와 변호인단 등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이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당시를 규정하려 했는데 재판부는 이를 무마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신군부가 계엄의 해제도 김재규의 사형 이후로 고집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신군부는 계승하려던 체제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당시의 정치가들은 본인들의 치적을 뽐내기 위해(이렇게만 말하면 좀 악의적인 서술이겠지만;)
김재규와, 그의 재판 과정을 크게 부각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김재규의 거사는 잠정적으로나마 깔끔하게 봉합되었던 것.

둘은 김재규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들도 제법 많지만 전후의 정황상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부분이 분명 있지 않은가 싶다는 건데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의연한 모습이나 나름의 논리를 가진 그의 '혁명론'이 그러하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눈여겨보게 되었던 대목은
"박정희는 언제나 김재규의 인사권자였다"는 한줄인데 그렇게 본인을 아껴주었고 본인도 그래서 충심으로 대했던 상관을 죽이게 되었을 때는
이를 권력욕 혹은 분기를 억누르지 못한 우발적 행동으로 보는 것도 물론 가능하겠지만 그런 은인마저도 저버려야 했던 어떤 대의가 그의
마음 속에 있었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지 않은가 싶어서이다. 10.26의 전개 과정에서 그의 부하들이 일언반구의 반발도 없이 그를 따른 점이나
재판 과정에서 상관에 대한 존경이나 명령 복종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도 인간 김재규가 인격자였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더하여 변호인단이 남긴 개인적인 기록이나 사제단의 청원서 등을 보아도 그의 행동이 막무가내이기만 했던 건 아니지 않을까 싶어지는데
그 정도의 인망을 지녔던 인물이 그런 극단적 선택을 내려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면 그게 소위 신군부가 발표한 근거보다는 좀 더 그럴싸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셋은 당대의 소위 분위기인데, 1심의 구형에 대한 변론에서 태윤기 변호사가 이런 말을 남겼다.
"법조생활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변호인을 만나는 데 경찰관의 방해를 받았고, 저희 집에는 자칭 시민이라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조직적인 협박전화가 왔고, 심지어는 역적 재판을 맡았다고 살해하겠다는 서신까지 보내고 있습니다."
맙소사. 그러고 보면 새삼스러운 부분인데 막상 읽고서야 알았다. 살해 협박이라...

개인적으로는 김재규의 '혁명'발언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었다. 무엇보다 2017년을 사는 나로서는 신군부 독재가 기정사실로 주어졌으니까.
어차피 전두환이 집권하게 될 거 좋은 빌미나 줬지 싶고, 전두환이 집권할 수 있었던 그 구조를 뚫어내지 못하고 그저 박정희 하나만 축출하면
민주주의가 오리라 믿었던, 좋게 말해도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하고 무지한 인물의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리고 그의 진심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재판 과정이 좀 더 적법하게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신군부에게는 대단한 곤란이었을 것이다.
자기들이 물려받아 입으려던 옷이 어떤 것인지 발각될 위험이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당장 박정희의 '행사'들도 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었으니...
그랬기 때문에 재판 과정이 대단히 서두르듯 이루어졌다는 모양이다. 그들을 죽여서 입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고 보니, 그의 '혁명'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더하여 에필로그에서 함세웅 신부가 했다는 말이 이렇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를 죽인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이후는 우리 국민들의 몫이었지요. 김재규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당시 박정희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런 박정희를
제거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거지요."
음... 곱씹을만한 구석이 있다. 박정희가 죽어야만 했다면, 김재규 말고 다른 이가 있었을까 싶어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