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누군가 올린 리뷰를 보고 머릿속 한구석에 넣어두긴 했으나
이렇게 빨리 읽게 될 거라고는 생각 안했는데, 재미있는 일이다.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 수녀가 크루아마르 후작에게 자신을 도와줄 수 없겠냐면서 자기가 처한 상황과 그때까지의 사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 수녀가 보내는 긴 편지글이 소설의 태반을 이루고 있는데, 이 역시 화자가 극중에 만드시 위치해야만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당시의
문(文)의 감수성이 묻어나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3인칭 시점이 그러고보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새삼 다시 느끼게 된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쓰기는 했으나 아직은 기독교의 아귀 힘이 전혀 풀리지 않은 유럽 사회가 배경이다.
주인공 쉬잔 시모넹은 변호사의 삼녀 중 막내인데, 어머니의 외도로 태어난 여식으로 어머니의 외면과, 그 사실을 의심하는 아버지의 핍박 사이에서
말하자면 자식 취급을 받지 못하게 된 인물이다. 본인의 과오를 밝힐 생각은 없으나 동시에 그녀를 다른 딸들과 똑같이 대해 줄수는 없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그녀를 수녀원으로 밀어넣는 것은 사실상 최선의 선택으로 남았던 것인데 이는 딸을 신에게 인생을 바치게 함으로써 자신과, 존재 자체가
죄인 딸이 속죄를 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조금도 흠결이 되지 않는 길이며, 결정적으로 그 딸을 사회적으로 깔끔하게
매장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부모도, 부모의 재산을 한푼이라도 더 차지해야 하는 두 언니도, 그리고 그녀의 수련수녀
생활을 맡게 된 수녀원의 원장 및 성직자들도 그녀의 부모가 제공해줄 거액의 지참금 때문에 그녀의 수녀서원을 적극 지지하고, 강제한다.
이런 상황의 촘촘한 짜임새에 여지가 없음을 느낀 그녀는 체념하려고도 해보지만 수녀원 제도와 비인간성과 그 구성원들의 가식으로 인해 진저리를 치며
결국 자신에게 강제된 길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다짐하게 되는데.
작중 두드러지는 점은 이 소설이 한 개인에게 부과된 체제에서의 자리와,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 간의 사투를 그린다는 점이다.
주인공 쉬잔 시모넹은 태어날때부터 자신의 자리가 없이 태어난 사생아이다.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그녀가 발 붙일 곳이 없었던 것으로 이미 결정된 채 태어났던 것인데
초반부 처음 들어간 수녀원에서 수녀서원을 거부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 때의 어머니의 냉랭한 태도에서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읽을 수 있다.
당대는 인간이 자기자신으로서 자연히 갖고 태어난 권리라는 관념도, 모성애의 관념도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이 어머니는
뼛속깊이 그녀를 잘못 태어난 인간으로, 어머니 자신의 죄가 체화된 존재로, 그래서 쉬잔이 살아 숨쉬는 내내 어머니 본인만이 그 죄로 아프고, 괴롭도록 만든
일종의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에게 온갖 경멸만을 표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쉬잔이 "그래도 어머니는 제 어머니시잖아요..."라고
절규해 보아도 어머니에게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너는 아직도 나를 괴롭게 만들 셈이냐?"라는 차가운 대꾸 뿐이었다.
더하여 기독교인으로서의 삶 또한 그녀에게는 그저 부과된 것인데 "그저 갓난아기 때 기독교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녀가 된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절규한다. 그런가하면 그녀의 어머니가 죽기 전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데 여기에는 "너를 낳은 것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죄악이었다. 그러니 속죄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신께서 너의 선행을 보아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도록 말이지."(p.62)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을 읽어 보면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느꼈을 모성애를 한사코 거부하며 자기 딸마저 죄악의 덩어리로 보아야만 했던 그녀 어머니의 태도는 기독교적 질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신이 두렵기에 어머니는
딸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부자연과 부자유만으로 짜여진 수녀원 생활을 벗어나고 싶고, 벗어나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후작에게 편지를 보내면서도
본인은 "자유와 운명에 대한 비밀스러운 확신"(p.29)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버텨나가는 것인데 이 감옥같은 수녀원과 나아가 실상 감옥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그 밖의 사회 체계를 대하여 보잘것없는 한 개인이(심지어 그녀는 여성이다) 자유를 향한 열망에 기대어 분투하는 모습은
분명히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결국 자신을 둘러싸고 조여오는 체제에 체념하고 롱샹 수녀원에서 서원을 마치고 수녀생활을 시작한 주인공인데
그것의 수녀원장인 모니 원장은 독실하고 선량한 인간이었다. 그녀에게 쉬잔은 감화되어 성실하게 생활을 이어나가려고도 해보지만
결국 모니 원장은 명을 달리하게 되고 후임은 생트 카트린 수녀는 표독스러운 인물이었기에 신임 원장 체제 하에서도 전 원장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않았던 주인공에게 폐쇄 사회 하에서의 박해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조금 경악스러웠던 건 온갖 따돌림을 통해서 그녀를 박해하던 수녀원의 구성원들이 그녀가 정원 구석의 우물가에 가서
자살을 떠올리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것을 모른척 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도에게 자살은 큰 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방조할 만큼 가식적이고 우악스러운 인물들이 신의 찬미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이에 그녀는 수녀원을 벗어나기 위하여 서원을 무효화하기 위해 소송을 꾀하게 된다. "법의 보호"(p.89)를 요청한 것이다.
천상의 권력에 이어져 있다는 수녀원 생활에 맞서서 세속의 '법'에 기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세속화가 진행중이었던, 다시 말해 종교권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풍경의 묘사인 셈.
소송 과정에서 그녀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마누리 씨의 웅변에서도 이런 관점은 드러난다.
그는 "유독 종교적 서원만은 그러한 엄격한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p.145)하고 역설한 것인데
이는 권력의 기원이 둘이어서는 안 된다는, 즉 법의 지배가 종교계 안으로도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송 사실을 알게 된 원장과의 면담에서 쉬잔은 소리친다. "진실로 신을 욕되게 하는 것은 제가 수녀복을 입고 살면서
날마다 이 옷을 더럽히는 생활, 바로 그것입니다."(p.106) 수녀생활이 오히려 신을 모욕하는 셈이 되는 아이러니가 가능한 것은
개인이 그 자신의 자유를 통한 것이 아니면 그저 거짓이고, 거짓은 악한 것이라는 논리가 뒷받침하고 있을 터이니,
이 또한 시각과 태도의 변화를 보여 주는 웅변으로 느껴진다. 동시에 무신론자로 찍혀 옥살이도 했던 디드로로서는
결국 '신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만큼은 자신도 지키는 척은 해야만 했던 제스처이기도 하겠고.
그러나 결국 소송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녀의 괴로움은 한층 더 강해지지만 그런 소동으로 인해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부주교의 개입 덕분에
그녀는 다른 수녀원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 여기서도 "그분은 공정하시기는 하지만 전혀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니까요. 그분은 덕행을
행하되 그 감미로운 맛을 모르고, 감성이 아니라 추론을 통하여, 즉 이성에 따라 선행을 펼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p.132)라고 부주교의 성정을
묘사하는 그녀의 말은 흥미롭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내재된 동정심을 통하여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를 '감미롭게 여겨야' 선행에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그녀의 윤리관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물론 저자인 디드로 본인에게서겠지만)
그녀가 새로 향하게 된 아르파종의 생트 위트로프 수녀원의 원장은... 소설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만큼은 묘사하고 있는 바로서, 레즈비언이었다.
쉬잔 수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원장은 그때부터 그녀를 총애하기 시작하고, 한밤중에 원장실에 불러 함께 악기 연주를 연습한다고 하면서
이마, 볼, 팔, 다리에 키스를 하는 등...심지어 "육체적인 욕망"(p.224)을 느끼는지 묻기도 하고...
"손으로 가슴이며 허벅지며 배를 쓰다듬지는 않느냐? 그렇게 희고 단단하고 또 부드러운 네 육체를 말이다"(p.227)하고 묻기도 하며...
소설에서는 이런 수녀원장과 가까이 지내는 쉬잔이지만 그녀의 순수함에 원장도 차마 그녀를 부여잡고 농락하지는 못하고 그저 찬탄하며 가까이
지내기만 하는 생활이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화자가 쉬잔 본인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정말로 순수한가?
그녀는 정말로 원장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호의와 다정다감한 애무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후작이 읽을 편지를 쓰는 중이고, 그런 '부자연스러운' 정념의 형태를 곧이곧대로 묘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편지의 말미에 자신을 "실제보다 훨씬 좋게 쓴 것을 알았습니다."(p.303)라며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고백성사를 맡은 신부인 르무안 신부에게 이런 일련의 내용을 고백해서
절대 원장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 그에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면 그녀의 순수함을 의심할 수 없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에 원장은 죄악감에 몸부림치다가 본인의 "영혼의 더러움은 씻어지지 않"음(p.290)에 절망하던 끝에 죽고 만다.
이 부분이 충격적인 것은 이 원장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이 죄였다는 사실을 깨달아 괴로움 끝에 결국 죽기까지 했다는 점인데
결국 태어난 대로의 성향을 '신'이 죄로 규정함으로써 그 사실에 그녀는 괴로워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를 왜 누가 어떻게 죽인 것인가?
신임 원장은 쉬잔 수녀가 전임 원장을 홀렸다고 믿었고, 박해가 다시 시작된다. 그녀는 탈출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껄렁껄렁한 수도사의 말에 속에 탈출은 했으나 상처입고 수배로 인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분조차 숨긴 주인공은
여관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후작에게 편지를 쓴 것인데, 후작에게 인정을 베풀어줄 것을 급히 요청하며 편지는 끝을 맺는다.
완독 후 꽤 희한하다고 여긴 것은 주인공에 처지가 대단히 개인적으로도 연민을 많이 불러 일으켰다는 점이다. 읽고 나서도 그녀의
딱한 처지에 아련한 여운이 계속 남아있었는데, 심지어 저자인 디드로조차도 본인이 쓴 글의 주인공의 비극 때문에 눈물을 훔쳤다는 말을
했으니(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효과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자유가 결여된 인물이 이무런 이유없이 받는
숱한 핍박을 읽으며,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나보려 발버둥치는 인물을 보게 되었기 때문인지?
이렇게 감동에 흠뻑 젖어 책장을 덮으려던 차에, 소설 말미에 글이 한 꼭지 더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전기 작품의 서문]이라는 이름의 이 글은 소설의 창작 배경과 과정에 관한 간단한 진술과 편지의 모음이다.
이에 따르면 위의 크루아마르 후작이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고, 수녀의 서원 취소 신청 또한 실제 있었던 일인데
이에 관심을 가졌던 후작의 모습을 알고 있던 그의 친우들(여기 디드로도 끼어 있다)이 후작을 파리로 다시 불러오기 위해
일종의 술책을 썼던 것이다. 그 수녀가 후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편지를 써서 후작에게 보냈던 것이다.
여기에 걸려들어 자신의 영지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와 친우들에게 사실을 듣게 된 후에는 사람 좋게 웃었다는 것이 후문으로 전해진다.
또한 역자 해설에 따르면 이야기의 발단이 된 수녀는 1790년 대혁명으로 인해 종교시설이 모두 폐쇄되었을 때 73살의 나이로 롱샹 수녀원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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