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3일 수요일

드니 디드로, 배우에 관한 역설

당장 루소나 볼테르처럼 계몽사상가들은 연극이라는 예술장르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연극이란 꽤나 대접받았던 장르였던 모양.
여기서 드니 디드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던 것이겠고 본인이 희곡을 써서 상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디드로가 연극과, 특히 배우의 연기에 관하여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짧은 책이다.

플라톤의 본이 있어서인지 근대 사상가들이 대화체 저술을 자주 시도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디드로의 책을 읽으면서 그게 사실이었음을 실감한다. 이 책 또한 두 명의 대화 형식을 띠고 있다.

이것으로 디드로의 책을 읽은 것도 몇 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건
기대보다 흥미롭지 못한 독서가 된다는 인상인데 그건 아마도
번역이 좋지 않거나,
원문 자체가 난삽하거나,
저작의 주제의식에 내가 공감하지 못하거나,
저자가 드는 사례나 사용하는 용어 등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등등일 터이다.

이번 독서로 문득 들은 생각이지만 디드로의 글은 대단히 당대를 밀착해 있다는 느낌이다.
이미 잊힐대로 잊혀진 정치가, 작가들의 일화나 예시들이 빈번하여 글을 따라가기 버겁다.
이건 인상일 뿐이니 어느 글은 안그렇겠냐 하면 답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더하여 디드로가 좀 난삽한 글을 쓴다는 평은 꾸준히 있어왔던 모양으로
2류 작가 취급이나 받다가 재평가를 받은 것이 생각보다도 최근의 일이라 하니
(그나마도 그 재평가의 골자가 '글쓰기의 혼란상'을 체화한 작가라는 식의,
이현령비현령식 불란서 비평가 말버릇같은 것이 되어놓으니 나는 조금 도끼눈을 뜨게 된다)
내가 느끼는 이런 곤란도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은듯 하다.

여하간 이 책의 기본 골자는 이런 물음이다.
"가장 뛰어난 배우란 어떤 존재인가?"
요컨대 배우라는 직업에 있어서의 '이데아'는 어떤 특질을 지녀야 하는지를 묻는 것인데
디드로의 주장은 뛰어난 배우는 자신이 보여주는 감정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어져서
냉정하게 자신의 몸짓을 계산할 줄 아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판단력이 좋고, 냉정하고 침착한 관찰자로서 통찰력은 요구되지만 감성은 전혀 요구되지 않는 인물이다.(p19)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배우의 재능이란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외부적 기호들'을 알맞게 토해냄에 있다.(p.30)
배역의 감정이 배우 자신의 것인 양 취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은 단적으로 우스꽝스럽기 때문.

여하간 디드로는 이를 "자연 그대로의 배우"는 형편없다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자연-인공(문화?)의 이분법이 여기서 적용되는 셈이겠고 디드로는
연기의 기술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겠다.
무엇보다도 배역의 감정을 배우 스스로 느끼는 방식의 연기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배우를 지치게 만든다는 점과 그것이 재연 불가능하는 점이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그렇다면 인위적인 관습의 연마가 유의미해지는 근거가
하나는 극장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이라는 점인데 연기의 패턴은 일상생활의 패턴과는 확연한 차이를 갖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연기 톤으로 몸짓을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기 마련이다.(p.35) 반대도 마찬가지겠고.
더하여 영국/프랑스의 극장 풍경, 즉 희곡들의 성격이나 그 문화 하에서의 연기 관습이 다르다는 점(p.19) 또한
연기를 단련함이 유의미한 이유가 된다. 즉, 관습이란 것이 실존하는데 이는 문화의 내부와 외부에서 관찰 가능하다는 것.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그 관습이라는 것 자체가 18-19세기 유럽 연극에 국한된 현상일 뿐일 텐데
당대의 과장되고 정형화된 연기는 현대의 지배적인 매체인 영상물에서의 연기와 판이할 수밖에 없겠고
현대의 연기는 '배역 속에 녹아드는' 것이 더 뛰어남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나?
그런데 이건 사실 조금 잘못된 질문인데 현대 영화 등에서의 뛰어난 연기 또한 결국 우리가 관객으로서 관찰한
연기의 뛰어남, 소위 그럴싸함이고 그래서 그 연기와 감정에 공감을 한 것이니
'관찰자에게 감정을 불어넣는다'는 기본 도식을 상한 것은 아니기 때문.
당장 디드로 본인데 이런 관습이 변화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p.36)

그러므로 제목이기도 한 배우의 관한 역설이란
'전형'으로서의 이상적 배우는 가장 거짓말을 잘 하는 인물이고 그러기 위하여 가장 무성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상적 OO'을 정의함에 있어 '가장 ~한 존재'라는 기준이 배우라는 직업? 기예?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것들에-배역/감정) 가장 ~하지 않은 존재'여야 한다는 성격, 이것이 배우에 관한 역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대학 신입생 때 과 활동으로 연극 배우를 해본 일이 한 번 있었다.
그때 느꼈던 것이 이와 똑같았는데 내가 느끼는 그대로 해서는 공감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분노의 감정을 연기할 때도 정말 실생활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화낼 때처럼 새된 소리를 질러서는
그걸 곁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그저 새된 소리만 빽빽 지르는 소음일 따름이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줏어읽은 것이지만 영화감독 샘 레이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카메라를 들고 찍을 때와 찍힌 내용을 볼 때는 느낌이 너무 다르더라고.
그래서 화면 연출에 있어 어떤 기법의 창안 혹은 습득과 그것의 연마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이것은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매체의 숙명일까?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계몽주의 시대에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저작이다.
더하여 이 책은 이전에 읽었던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에서 다루던 중심 소재였는데,
그 제목 그대로 말하자면 (출시제이긴 하지만) '근대를 탄생시킨' 책이라고 하니
대단히 호기심이 동했던 터라, 언젠가 한번은 읽어야겠다고 맘 먹던 차였다.
드디어 읽은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조금 실망스럽다.
삶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긍정하는 아름다운 책이었다는... 식으로
'우연히'(위의 책의 원제는 '일탈Swerve'이기도 했고) 이 책을 발견해
멋모르고 읽고는 은은한 기쁨을 느꼈다며 찬사에 찬사를 거듭하던
그린블랫에게 속아버렸다는 느낌도 사실은 없지 않은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책이 설파하는 유물론적인 주장들이
생각보다 이미 무의미하거나, 내게 상식선이라는 게 큰 것 같다.
어떤 원류가 되었던 책이라는 의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저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전기는 사실상 전무한 모양이고
책은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대단히 충실하게 설파하는 저서라고 한다.

아마 이 책을 손에 쥐는 사정은 보통은 셋 중 하나겠는데
라틴어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 문장의 맛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그리스/로마의 철학이나 사상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것을 톺아보려는 사람이거나
특정해서 에피쿠로스 사상의 충실한 해설서라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을 읽어보려는 사람이겠다.
즉, 소위 전공자들이나 볼 책이라는 건데 여기에 나같은 딜레탕트가 어쩌다 꼬이는 거다.
개인적으론 저 그린블랫의 책도 크게 보면 상통하는 내용이라고 생각되는데
결국 계몽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읽게 된 것 같다.

책은 특히 라틴어 원문으로 읽으면 그 시작(詩作)의 수준이 실로 대단해서
그것을 음미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쾌를 주는 모양이고 실제로
이미 당대에 베르길리우스 등의 인물이 시의 높은 수준을 상찬했으며
시인 본인이 본문에 쓰디쓴 약쑥(사상)을 달콤한 맛(시문)으로 감싼다는 식의 비유를 몇 번이나 쓰며
일종의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는 노릇인데다가, 후세에도 그 훌륭한 시문으로
추종자들이 끊이지 않았던 듯하니 과연 높은 수준의 작품인가 보구나 싶기는 하다.

문제는 시가 개인적으로는 와닿지도 않고, 가 닿을 생각도 없는 장르라는 게 하나고
이건 번역본이기에 그 맛을 어차피 느낄 수도 없음이 둘이요,
역자 서문에서 드러내고 있듯 역자는 시의 맛을 살리기보단(이게 가능이나 한지는 둘째치고)
원문에 최대한 충실한 직역을 시도했기 때문에 한국어의 어순과는 상이한 구조의 문장들이
그대로 번역되어 오히려 편하고 즐거운 독서를 방해하는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다는 점이
마지막으로 셋이니 시인이 자화자찬의 낯뜨거움까지 굳이 무마해가며 자랑했던
저 달콤한 시문이 큰 의미가 없는 셈이다.
그러하므로 이 책을 누군가 읽는다면 기대함직한 부분 하나가 사실상 결여된 셈이겠고.

그러면 사상적인 내용을 간취해보려는 의지가 이 번역본 독서를 추동하는 동력이겠는데
이게 또 생각만큼 마음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조금 뒤에 설명한다.

아마 계몽사상가들에게 가장 매력적이었던 그리고 스티븐 그린블랫에게 소소한 충격을 주었다는 부분은
종교와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하는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18세기의 유럽이나 근본주의가 꽤나 득세하고 있다는 현대 미국의 지적 토양에서
이런 식의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접했을 때는 충격 혹은 매혹을 느끼기 마련이지 않을까...

하여 주요 골자를 능력닿는 대로 간추려 보자면,
기본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은 '자연'의 토대를 원자라고 설정하고 있다.
이 원자와 '빈 공간'의 배합으로 삼라만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자들이 서로 부딪히며 운동한다면 그 운행은 단순히 기계적인 과정이겠고
그러므로 일종의 결정론적인 색채를 띠지 않을 수 없다는 건데 에피쿠로스는 이를 부정하려 한다.
2권의 216행부터 이에 관련한 내용이 나오는데 원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일탈하기도 한다는 것.
이로부터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의 '자유 의지'가 연원한다는 설명은 확실히 마음에 혹하는 구석이 있다.

에피쿠로스에게 정신은 인간의 지성작용이고 영혼은 육체에 깃든 생기 따위를 의미하는듯 한데
여하간 정신이나 영혼이란 육체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가 소멸할 때 그것들도 함께 소멸하게 된다고 한다. 요컨대 영혼이란
이미 예컨대 기독교적 의미의 존재도 아닐 뿐더러 불멸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죽음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니까.
인간에게 죽음이란 죽기 전에는 살아있으므로 무의미하고 죽은 후에는 모든 정신과 감각의 작용이
정지하므로 또한 무의미할 뿐인 것이다.

5권 110행 이하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신이 만일 신화가 말해주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그저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것임을 설파하는데 한줄만 인용하자면
"불멸하고 행복한 존재들에게 우리의 감사가 무슨 이익을 늘려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러므로 416행 이하에서 설명하듯 세계의 형성에는 어떤 신적인 힘도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종교는 좋게 봐도 무의미겠고,
1권의 60행 부근부터 이야기되는 것처럼 아가멤논이 친딸을 인신공양했던 패륜처럼 크나큰 해악을 낳고
그런 극단적 경우가 아니더라도 뭇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기까지 하고 있으니
종교를 따름으로써 오히려 죄악을 낳는 이 변태적 상황을 막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시는 말하고 있다.

이런 종교는 5권 1161행 이하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우월한 존재이자
온갖 경이와 공포를 제공하는 자연현상들의 뒤에서 그것들을 관장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떠올리게 됨으로써
발생했다고 시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시의 내용이 납득할만 하고, 그래서 옳다고 여겨진다면
이런 자연현상들은 원자의 운동 이외의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신의 존재를
제시할 필요도, 그러므로 그들을 숭배하는 종교를 만들고 믿어야 할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 다른 내용들은 온갖 자연현상들에 관한 시인의 해명이겠는데 이런 글들은
크게 마음에 와닿거나 유의미하다 여겨지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고,
대강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두려움을 벗고 삶을 누리라"는 것이 책의 주요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제법 상식선인 주장을 뽑아내고 보면 너무 두터운 책이었다는 인상이 큰 것.

흥미로웠던 구절들.
5권 705행에 "달은 태양빛에 맞아서 빛나는 것일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게 당대의 천문학 수준을 알 수 없으나 신선하게 여겨지는 건 사실이다.

4권의 말미에 인간의 성교와 관련한 내용이 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눈여겨 보게 된 대목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문장이 조금 아리송했다.
인용하자면

그리고 유혹하는 쾌락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취해지는지,
그것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보통은, 짐승들 식으로,
네발짐승의 방식으로 행하면 아내들이 더 잘
임신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씨앗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슴은 아래로 하고 허리를 들면.
아내들이 음란한 움직임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여자는 자신이 임신하는 것을 막고 싸우기 때문이다.
스스로 행복하여 남성의 베누스를 엉덩이로부터 물러나게 하고,
그 흐름을 출렁이는 가슴으로 흐르게 하면.
보습이 제대로 지나갈 부분과 길로부터 쟁기질을
벗어나게 하고, 씨앗의 타격을 제 자리에서 비껴나게 하니 말이다.
그래서 창녀들은 자신을 위해 그런 식으로 움직여 버릇한다,
되풀이 임신하고 몸 무거운 채 눕지 않으려고,
또 동시에 남자들의 베누스 자체가 더 기분 좋은 것이 되도록.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배우자들에게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게 확실하다.

대강 후배를 위로하면 임신이 더 잘 된다고 설명하는 듯하다가
이후의 행에서 대뜸 '음란한 움직임'을 말하는데 이게 도기 스타일을 의미함인가?
그렇다면 '임신하는 것을 막'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영역본을 보니 문제의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It's important how you do it. People generally believe
That wives more readily in the manner of wild beasts conceive,
For it's in this position that the seed can occupy
The right place, with a lowered breast, and with the loins raised high.
Wanton wiggling's of no use for wives - no, not one bit -
For a woman prevents pregnancy this way, resisting it,
When she grinds her buttocks against the man's member as it thrusts,
Gyrating, her whole body turned to jelly with her lust.
By doing this, she turns the furrow away from the straight and true
Path of the ploughshare, and the seed falls by the wayside too.
Whores thus have their own reasons for wriggling - so that they can
Spend less time pregnant, and to make it better for the man.
Clearly, though, our wives can have no use for such an art.

아... 후배위는 임신이 잘되고 기승위는 임신이 잘 안된다는 뜻이구나...
내가 가진 건 펭귄 클래식 판인데 이게 좀 의역을 했는지는 내가 알 수 없으나
영역본으로 이해한 바가 정확하다면 우리말 번역은 문장 구성이 독해를 방해하는 식으로 되어있다는 걸
이 예시에서 충분히 알만 하다. 이 구절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것이 충실한 번역일지는 모르나 읽기에 좋은 번역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번역본 기준 287쪽에 오타가 있다.
'뮬리적인 형태'라고 쓰여 있음. (1판 2쇄)

2017년 8월 22일 화요일

마사오카 시키/나쓰메 소세키 -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이런 책이 일본에도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역자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소세키와 시키의 서간?들 중 큰 의미 없는 편들을 제외한 후 시간과 전달순서에 맞추어 발췌 번역해 한 권으로 구성한 책이다.
오히려 소세키 전집과 시키 전집을 번갈아 뒤적거려야 하는 수고를 역자가 대신 해준 셈.

개인적으로 마사오카 시키는 나쓰메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연재했던 [호토토기스]를 창간한 인물로,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의 책에서 몇 번 언급되었던 사실 정도로 그저 이름만 알던 사람인데
나쓰메 소세키와 깊은 교우를 나누었던 인물인 모양이다.
일본의 시가 갈래인 하이쿠와 단카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인물로서
오히려 문명은 먼저 떨친 모양인데 결핵으로 인하여 요절한 인물이라고 한다.

책의 구성은 이 둘이 22세였던 1889년부터 34세였던 1901년까지 주고받았던 편지들과,
1902년 시키가 사망한 이후 소세키가 다카하마 교시에게 보낸 편지 한통,
[고양이] 중편 서문에 소세키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내용까지가 실린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소설가 소세키의 삶은 그가 영국유학을 다녀온 1903년 이후 [고양이]를 연재하면서부터이니
여기 실린 글들은 소세키에게 관심을 두고 책을 들었던 나로서는 일종의 '소세키 비긴즈'(?)인 셈이다.

편지의 분량도 소세키의 편지가 훨씬 많은데 역자는 소세키는 이사가 잦은 생활을 했고
시키는 이후 시키암이라 불렸다는 근거지에 자리를 잡은 뒤로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받은 편지를 보관하기가 시키 쪽이 용이했고, 그래서 소세키의 편지가 많이 남은 것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아쉬운 일인 것이, 시키의 편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이 소세키의 답장만 실려 있는 경우도 제법 되기 때문.

책을 펼치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두 명이 대단히 인용에 능란하다는 것인데, 일단 한문의 인용이 굉장히 두드러진다.
과연 19세기의 끝자락을 살았던 인물들이라 그런지 문(文)에 대한 감수성이
현재를 사는 독자와는 많이 다르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된다 할까...
헌데 이런 사정이라면 사실 소위 구한말 문인들의 글도 다르지는 않을 터라면
굳이 소세키의 글을 내가 찾아서 읽었다고 할 때는 이게 사대주의인 건가? 하는 자의식이 살짝 들기도 한다.
여하간, 더하여 특히 영문학자였던 소세키의 글에서는 영어의 구사나 인용도 제법 섞여들어가 있는데 이게 꽤 희한하다.
과연 소위 근대문학의 태동기에서 그 '사이'를 살던 인물의 글이라는 것일지? 글맛이 독특하다.

나머지 하나는 과연 친우끼리의 서간 내왕이어서인지 넉살 좋은 문구들이 많았다는 점인데,
이게 읽기에 재미있다.

서로를 치켜세울 수 있을 만큼은 전부 치켜세우고 있는데 사용하는 단어만도
'대인', '오우(梧右)', '님', '대형', '좌하(座下)', '어전(御前)' 등등...

거기에 두견새는 당시 결핵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하고 시키(子規)의 필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하는데
시키가 각혈을 한 후 문병을 갔다가 보낸 (지금까지 남아 있는) 소세키의 첫 편지에서
본인의 셋째 형도 각혈을 했다며 "이리 두견이가 많아서야 천하의 풍류가라는 이 몸도 두 손 들밖에, 하하."라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혹은 반 장난, 농담 식으로 서로를 깎아내리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한데
대뜸 소세키는 시키에게 "자네같은 냉혈동물은 더위도 겪지 않겠지"라는 식으로 말하거나
잠을 즐기는 것이 어디가 나쁘냐고 묻는 소세키에게 시키가 답장에
"늦잠은 건달, 낮잠은 도둑으라 이미 평판이 정해져 있는 것을 득의양양 으스대다니 가소롭구먼."하며
놀리는 부분이라던가는 친우끼리는 서로 놀려대는 모습이란 게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기도.

1890년 1월 초에 보낸 편지에서 23세의 젊은 소세키가 품었던 '문장'에 관한 생각을 잠깐 엿볼 수 있는데
아마 이 전의 편지에 시키가 나름의 문장론을 써서 보냈던 모양인데 이에 반박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후 그의 생각이 어떤 방식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따르면
문장은 그것이 담은 사상(내용)과 그 문장의 수사(형식)로 대별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 소세키 본인이 더 중시하는 것은 사상인데 이를 함양하기 위해서는 작자가 몸담은
문화적 풍경과 작자 본인의 경험이 중요하며 차등을 두자면 전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여 Idea와 Rhetoric이 좋고 나쁨에 따라 총 4개의 경우가 생기는데 특기해야할 사항은
사상이 좋고 수사가 나쁘면 기껏해야 평범한 문장으로 그치지만 사상이 나쁘면 수사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 나쁜 문장으로 귀결되므로 사상이 나쁘고 수사가 나쁜 경우와 동급이 되니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고
소세키는 보냈던 것 같다. 젊은이의 치기어린 정리에 불과할 지는 모르겠으나...

이에 시키가 다시 반박을 하고 있는데 조금만 인용하자면 이런 식이다.
"그런데 어째서 Good idea expressed by bad rhetoric과 Bad idea expressed by good rhetoric은 그 가치가
거의 같다고 하지 않는 것인가.[몰아붙이기 성공하여 통쾌]"
이렇게 하고 싶은 반박을 대강 하고는 뒤에 괄호로 한두마디 자평을 하는데
이게 읽기에 제법 우습다.

적어두고 싶은 부분.
1895년, 28세 되던 해 11.13일자 소세키의 편지에 최근의 사건 중 다행스러운 것이 '왕비 살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민비 살해 사건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무엇이, 어떻게, 왜 다행스러웠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1897년 2.17일자 시키의 편지 서두.
"뺀들거린 것도 뺀들거린 것이지만 바쁜 것도 바쁜 것이므로 오랫동안 격조했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바쁜 것도 바쁜 것이라 붓은 놓지 않고 있네.
위가 나쁜 것도 나쁜 것이지만 바쁜 건 또 바쁜 것이니 많이 먹고 있다네."
문장이 재미있어 적어놓아 본다.

1891년 11.7일자 소세키의 편지를 보면
시키가 권한 호걸담을 읽고 실망한 소세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실수담이 호걸의 전기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호걸의 명성이 실수담을 유명하게 한 것에 불과하네."라고
적고 있는데 이게 꽤 재미있는 논리의 역전이라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책에 큰 불만은 없는데, 이런 책을 냈다는 것도 감지덕지인 마당이라,
몇몇 경우 연도 표기가 오류가 있고 (1895년인 게 분명한데 1995년이라 되어있다던지)
312쪽의 'gay society'가 아마도... '게이 모임'이지는 않을 듯한데 그렇게 번역을 해놓았다는 것
정도가 눈에 조금 밟힌다. 더하여 둘 사이의 서간만을 실어놓았기 때문에 전후맥락에 관한
내용이 조금 아쉽다는 것 정도? 이런 내용까지 작성하는/기대하는 건 역자로서도 독자로서도
약간은 월권행위가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지노 에이이치, 외국어 잘 하는 법

제목이 강렬한 책이다. 제목만큼 내실있는 책일지?

저자는 일본의 언어학자로 체코어가 전공이고 그걸 중심으로 다른 슬라브어계열 어군을 연구한 사람인 모양이다.
저자 본인이 직접 경험하거나, 스승들에게 혹은 지인들에게 전해듣거나, 다른 인물들의 저서를 읽거나 하여
자기 나름대로 언어를 배운다는 일은 대강 이런 것이다...하고 전해주려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뭐 언어학이나 심리학 등의 어떤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쓴 책은 아닌데,
덕분에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복잡한 이론이나 도표를 인용하는 건
오히려 독자가 정나미만 떨어지기 십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저자는 서두에서부터 "잊어버리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접한 외국어라고 해봐야 영어, 일어, 독일어 정도에 불과하지만
언어라는 게 결국 암기싸움으로 귀결되고 그러면 다시말해 망각과의 싸움이 되는 것이니
한창 열내면서 단어니 문법이니 익혀놓고도 뒤돌아서서 며칠이면 물거품처럼 없어지는 걸
허망하게 느낀 게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보면 꽤나 재미있는 조언이다.

꽤나 공감갔던 대목 중 하나는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필요에 의함이라는 저자의 주장이었다.
언어란 학습자 본인이 필요해서, 즉 배우고 싶다고 느끼는 이유가, 목적이 있기에 배우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애써서 괴로운 과정이어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다수는
(80년대의 일본인을 지칭하겠으나 현재의 한국인을 가리켜도 납득할만할 것이다)
제 1외국어의 선택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이 비극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어도, 주위에서 영어부터나 제대로 하라는 핀잔을 듣거나,
하다못해 나 자신이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꼴이 심심찮게 발견되는 상황이니...
"배우는 사람이 영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 쪽이 학습자를 고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외국어 = 괴로움'의 등식이 습관처럼 마음 한구석에 달라붙어 독이 되는 것이다.
외국어 학습에서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필수불가결이기 때문에.

더하여 외국어 학습의 허들을 너무 높게 잡지 않을 것을 저자는 주문한다.
학습자 본인이 대뜸 해당 언어의 사전 편찬자같은 게 될 것도 아닌 마당에
그 외국어를 배우려는 목적에 맞는 수준과 방식만을 접하면 될 일이라는 것이다.
즉, 외국어 학습에 있어서 목적과 목표를 명확히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마음가짐이 이러한 뒤 세목에 있어서 외국어 습득에는 무엇이 어떻게 필요하냐면
저자는 언어의 신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던 지인의 말을 인용한다.
어학을 잘 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필요하며, 그를 기반으로 "어휘와 문법"을 익히고,
그것은 좋은 "교과서, 교사, 사전"을 통해서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저자는 어휘, 문법, 교과서, 교사, 사전, 발음, 회화, 레알리에 순으로 장을 할애하여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세세하게 더 여기서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예를 들어 단어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어 1000개를 목표로 삼으라는 것이라던가
문법사항은 컴팩트하게 하여 가장 기본이 되는 10장 정도만 일단 눈뭉치를 굴리라는 조언 등
꽤나 자잘하게 와닿는 제안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것은 발음 장에서 ザ의 발음에 관련한 대목이었는데
이 글자는 어두에서는 [dza]로 발음하고 모음 사이에서는 [za]로 발음한다는 모양이다.
친한 일본인 선배가 있었는데, 이 선배와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관련한 잡담을 나누는데
'the world'를 발음할 때 'the'를 [za]로 발음하지 않는다는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다.
뭔가 희한한걸? 하고 느꼈지만 이게 한국인으로서는 변별적인 자질이 아니다보니
그렇다고 모국어 화자에게 왜 그렇게 발음하냐고 물어봐야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고
그냥 석연찮은 기분만 느끼고 넘어갔던 일인데 여기서 그 수수께끼가 풀렸던 것이다.
뭐... 제대로 된 일본어 음성학 자료만 조금 찾아봤어도 훨씬 빨리 풀릴 문제였을수도 있으나...

여하간 저자는 아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않지만
결국 목적의식을 가지고 '꾸준히'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김빠지는 결론이지만 외국어 학습에 첩경이 있을 리도 만무하니 오히려 새삼스러운 주문인 셈.

2017년 8월 7일 월요일

드니 디드로, 라모의 조카

읽는 김에 마저 읽어나가는 중이다.
디드로의 4대 소설이라 하면 [운명론자 자크], [수녀], [입싼 보석들], 마지막으로 이 [라모의 조카]인 모양인데
특히 이 작품은 그의 최고 걸작? 문제작? 대우를 받는 모양.

내용이라 할만한 것도 딱히 없는 글인데,
'나'(아마도 디드로 본인)가 산책 중 당대에는 그럭저럭 유명했던 음악가 장 필립 라모의 조카를 만나서
종이 울리는 다섯시 반까지 대화를 나눈 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물론 이 대화가 어떤 것인지가 중요하겠고.

대화의 상대자인 라모의 조카라는 인물의 성격은
기본적으로는 악한, 건달 류의 인물형이고 남을 등쳐먹고 기식하면서 지내는 인간인데
이 인물이 그럼에도 나름대로는 일관성을 지닌? 어딘가 주목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면
자연히 이 글에도 가치부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게 좀 어려웠던 것 같다.
그저 중구난방인 요설들에 불과한 말뭉치를 꾸역꾸역 토해내는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아서인데...

흥미로웠던 점은 천재에게는 광기 혹은 악덕이 필요불가결로 함께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낭만주의적 인간형이 아닌가 싶어서다.
아마도 라모의 조카는 천재에게 악덕이 함께한다면 악덕이 있는 자는 천재이지 않은가 하는 식의 그릇된 추론을 가지고
본인을 일종의 천재라고 여기고 있는 것도 같다.

역자 해설을 읽어 보면 괴테나 헤겔 등의 인물들은 이 작품에 제법 중요성을 부과했다는 모양이고
나름대로의 의미가 도출될만한 글인듯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공감이 되지도 않고 혼란스러울 뿐이어서
아직은 진가를 알아보기 힘든 글이었다.

언젠가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워낙 짧은 글이라 재도전하기에 부담은 없겠지만.

2017년 8월 6일 일요일

드니 디드로, 수녀

여기서 누군가 올린 리뷰를 보고 머릿속 한구석에 넣어두긴 했으나
이렇게 빨리 읽게 될 거라고는 생각 안했는데, 재미있는 일이다.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 수녀가 크루아마르 후작에게 자신을 도와줄 수 없겠냐면서 자기가 처한 상황과 그때까지의 사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 수녀가 보내는 긴 편지글이 소설의 태반을 이루고 있는데, 이 역시 화자가 극중에 만드시 위치해야만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당시의
문(文)의 감수성이 묻어나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3인칭 시점이 그러고보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새삼 다시 느끼게 된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쓰기는 했으나 아직은 기독교의 아귀 힘이 전혀 풀리지 않은 유럽 사회가 배경이다.
주인공 쉬잔 시모넹은 변호사의 삼녀 중 막내인데, 어머니의 외도로 태어난 여식으로 어머니의 외면과, 그 사실을 의심하는 아버지의 핍박 사이에서
말하자면 자식 취급을 받지 못하게 된 인물이다. 본인의 과오를 밝힐 생각은 없으나 동시에 그녀를 다른 딸들과 똑같이 대해 줄수는 없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그녀를 수녀원으로 밀어넣는 것은 사실상 최선의 선택으로 남았던 것인데 이는 딸을 신에게 인생을 바치게 함으로써 자신과, 존재 자체가
죄인 딸이 속죄를 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조금도 흠결이 되지 않는 길이며, 결정적으로 그 딸을 사회적으로 깔끔하게
매장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부모도, 부모의 재산을 한푼이라도 더 차지해야 하는 두 언니도, 그리고 그녀의 수련수녀
생활을 맡게 된 수녀원의 원장 및 성직자들도 그녀의 부모가 제공해줄 거액의 지참금 때문에 그녀의 수녀서원을 적극 지지하고, 강제한다.
이런 상황의 촘촘한 짜임새에 여지가 없음을 느낀 그녀는 체념하려고도 해보지만 수녀원 제도와 비인간성과 그 구성원들의 가식으로 인해 진저리를 치며
결국 자신에게 강제된 길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다짐하게 되는데.

작중 두드러지는 점은 이 소설이 한 개인에게 부과된 체제에서의 자리와,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 간의 사투를 그린다는 점이다.

주인공 쉬잔 시모넹은 태어날때부터 자신의 자리가 없이 태어난 사생아이다.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그녀가 발 붙일 곳이 없었던 것으로 이미 결정된 채 태어났던 것인데
초반부 처음 들어간 수녀원에서 수녀서원을 거부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 때의 어머니의 냉랭한 태도에서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읽을 수 있다.
당대는 인간이 자기자신으로서 자연히 갖고 태어난 권리라는 관념도, 모성애의 관념도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이 어머니는
뼛속깊이 그녀를 잘못 태어난 인간으로, 어머니 자신의 죄가 체화된 존재로, 그래서 쉬잔이 살아 숨쉬는 내내 어머니 본인만이 그 죄로 아프고, 괴롭도록 만든
일종의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에게 온갖 경멸만을 표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쉬잔이 "그래도 어머니는 제 어머니시잖아요..."라고
절규해 보아도 어머니에게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너는 아직도 나를 괴롭게 만들 셈이냐?"라는 차가운 대꾸 뿐이었다.

더하여 기독교인으로서의 삶 또한 그녀에게는 그저 부과된 것인데 "그저 갓난아기 때 기독교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녀가 된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절규한다. 그런가하면 그녀의 어머니가 죽기 전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데 여기에는 "너를 낳은 것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죄악이었다. 그러니 속죄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신께서 너의 선행을 보아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도록 말이지."(p.62)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을 읽어 보면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느꼈을 모성애를 한사코 거부하며 자기 딸마저 죄악의 덩어리로 보아야만 했던 그녀 어머니의 태도는 기독교적 질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신이 두렵기에 어머니는
딸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부자연과 부자유만으로 짜여진 수녀원 생활을 벗어나고 싶고, 벗어나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후작에게 편지를 보내면서도
본인은 "자유와 운명에 대한 비밀스러운 확신"(p.29)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버텨나가는 것인데 이 감옥같은 수녀원과 나아가 실상 감옥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그 밖의 사회 체계를 대하여 보잘것없는 한 개인이(심지어 그녀는 여성이다) 자유를 향한 열망에 기대어 분투하는 모습은
분명히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결국 자신을 둘러싸고 조여오는 체제에 체념하고 롱샹 수녀원에서 서원을 마치고 수녀생활을 시작한 주인공인데
그것의 수녀원장인 모니 원장은 독실하고 선량한 인간이었다. 그녀에게 쉬잔은 감화되어 성실하게 생활을 이어나가려고도 해보지만
결국 모니 원장은 명을 달리하게 되고 후임은 생트 카트린 수녀는 표독스러운 인물이었기에 신임 원장 체제 하에서도 전 원장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않았던 주인공에게 폐쇄 사회 하에서의 박해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조금 경악스러웠던 건 온갖 따돌림을 통해서 그녀를 박해하던 수녀원의 구성원들이 그녀가 정원 구석의 우물가에 가서
자살을 떠올리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것을 모른척 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도에게 자살은 큰 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방조할 만큼 가식적이고 우악스러운 인물들이 신의 찬미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이에 그녀는 수녀원을 벗어나기 위하여 서원을 무효화하기 위해 소송을 꾀하게 된다. "법의 보호"(p.89)를 요청한 것이다.
천상의 권력에 이어져 있다는 수녀원 생활에 맞서서 세속의 '법'에 기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세속화가 진행중이었던, 다시 말해 종교권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풍경의 묘사인 셈.
소송 과정에서 그녀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마누리 씨의 웅변에서도 이런 관점은 드러난다.
그는 "유독 종교적 서원만은 그러한 엄격한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p.145)하고 역설한 것인데
이는 권력의 기원이 둘이어서는 안 된다는, 즉 법의 지배가 종교계 안으로도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송 사실을 알게 된 원장과의 면담에서 쉬잔은 소리친다. "진실로 신을 욕되게 하는 것은 제가 수녀복을 입고 살면서
날마다 이 옷을 더럽히는 생활, 바로 그것입니다."(p.106) 수녀생활이 오히려 신을 모욕하는 셈이 되는 아이러니가 가능한 것은
개인이 그 자신의 자유를 통한 것이 아니면 그저 거짓이고, 거짓은 악한 것이라는 논리가 뒷받침하고 있을 터이니,
이 또한 시각과 태도의 변화를 보여 주는 웅변으로 느껴진다. 동시에 무신론자로 찍혀 옥살이도 했던 디드로로서는
결국 '신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만큼은 자신도 지키는 척은 해야만 했던 제스처이기도 하겠고.

그러나 결국 소송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녀의 괴로움은 한층 더 강해지지만 그런 소동으로 인해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부주교의 개입 덕분에
그녀는 다른 수녀원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 여기서도 "그분은 공정하시기는 하지만 전혀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니까요. 그분은 덕행을
행하되 그 감미로운 맛을 모르고, 감성이 아니라 추론을 통하여, 즉 이성에 따라 선행을 펼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p.132)라고 부주교의 성정을
묘사하는 그녀의 말은 흥미롭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내재된 동정심을 통하여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를 '감미롭게 여겨야' 선행에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그녀의 윤리관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물론 저자인 디드로 본인에게서겠지만)

그녀가 새로 향하게 된 아르파종의 생트 위트로프 수녀원의 원장은... 소설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만큼은 묘사하고 있는 바로서, 레즈비언이었다.
쉬잔 수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원장은 그때부터 그녀를 총애하기 시작하고, 한밤중에 원장실에 불러 함께 악기 연주를 연습한다고 하면서
이마, 볼, 팔, 다리에 키스를 하는 등...심지어 "육체적인 욕망"(p.224)을 느끼는지 묻기도 하고...
"손으로 가슴이며 허벅지며 배를 쓰다듬지는 않느냐? 그렇게 희고 단단하고 또 부드러운 네 육체를 말이다"(p.227)하고 묻기도 하며...
소설에서는 이런 수녀원장과 가까이 지내는 쉬잔이지만 그녀의 순수함에 원장도 차마 그녀를 부여잡고 농락하지는 못하고 그저 찬탄하며 가까이
지내기만 하는 생활이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화자가 쉬잔 본인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정말로 순수한가?
그녀는 정말로 원장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호의와 다정다감한 애무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후작이 읽을 편지를 쓰는 중이고, 그런 '부자연스러운' 정념의 형태를 곧이곧대로 묘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편지의 말미에 자신을 "실제보다 훨씬 좋게 쓴 것을 알았습니다."(p.303)라며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고백성사를 맡은 신부인 르무안 신부에게 이런 일련의 내용을 고백해서
절대 원장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 그에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면 그녀의 순수함을 의심할 수 없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에 원장은 죄악감에 몸부림치다가 본인의 "영혼의 더러움은 씻어지지 않"음(p.290)에 절망하던 끝에 죽고 만다.
이 부분이 충격적인 것은 이 원장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이 죄였다는 사실을 깨달아 괴로움 끝에 결국 죽기까지 했다는 점인데
결국 태어난 대로의 성향을 '신'이 죄로 규정함으로써 그 사실에 그녀는 괴로워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를 왜 누가 어떻게 죽인 것인가?
신임 원장은 쉬잔 수녀가 전임 원장을 홀렸다고 믿었고, 박해가 다시 시작된다. 그녀는 탈출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껄렁껄렁한 수도사의 말에 속에 탈출은 했으나 상처입고 수배로 인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분조차 숨긴 주인공은
여관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후작에게 편지를 쓴 것인데, 후작에게 인정을 베풀어줄 것을 급히 요청하며 편지는 끝을 맺는다.
완독 후 꽤 희한하다고 여긴 것은 주인공에 처지가 대단히 개인적으로도 연민을 많이 불러 일으켰다는 점이다. 읽고 나서도 그녀의
딱한 처지에 아련한 여운이 계속 남아있었는데, 심지어 저자인 디드로조차도 본인이 쓴 글의 주인공의 비극 때문에 눈물을 훔쳤다는 말을
했으니(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효과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자유가 결여된 인물이 이무런 이유없이 받는
숱한 핍박을 읽으며,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벗어나보려 발버둥치는 인물을 보게 되었기 때문인지?

이렇게 감동에 흠뻑 젖어 책장을 덮으려던 차에, 소설 말미에 글이 한 꼭지 더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전기 작품의 서문]이라는 이름의 이 글은 소설의 창작 배경과 과정에 관한 간단한 진술과 편지의 모음이다.
이에 따르면 위의 크루아마르 후작이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고, 수녀의 서원 취소 신청 또한 실제 있었던 일인데
이에 관심을 가졌던 후작의 모습을 알고 있던 그의 친우들(여기 디드로도 끼어 있다)이 후작을 파리로 다시 불러오기 위해
일종의 술책을 썼던 것이다. 그 수녀가 후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편지를 써서 후작에게 보냈던 것이다.
여기에 걸려들어 자신의 영지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와 친우들에게 사실을 듣게 된 후에는 사람 좋게 웃었다는 것이 후문으로 전해진다.

또한 역자 해설에 따르면 이야기의 발단이 된 수녀는 1790년 대혁명으로 인해 종교시설이 모두 폐쇄되었을 때 73살의 나이로 롱샹 수녀원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2017년 8월 3일 목요일

서경석, 전투감각

월남전 당시 파월 맹호부대에서 소대장 및 중대장으로 복무했던 서경석 예비역 중장의 저서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후배 군인들에게 '전투감각'을 고양시켜 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집필을 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전투경험을 가진 지휘관이 이미 드물었을 91년에 이런 저서를 펴냈을 때는
휴전 이후 몇십년을 보낸 군대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안일해졌다는 판단이 조금은 숨어있을까?
어찌되었건 주적과 대치하고 있는 군이니만큼, 예리한 감각을 벼려내는 데 보탬이 되고자하는 군인정신일는지.

저자 본인이 머리말과 꼬리말에서 한번씩 밝히고 있듯 저자가 문필가는 아니다보니
그다지 글맛이 좋은 편은 아니다. 문장이 불완전할때도 있고, 글의 흐름이 유기적이지 못해 지리멸렬한 부분이 제법 되고,
같은 표현이 계속 반복되거나, 문단의 배치가 애매해서 올바른 이해를 저해한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종종 눈에 띄었다.
아마도 실전에서 저자 본인이 느꼈던 주요한 전술이나 태세 등과 실제의 경험담 혹은 무용담이 뒤섞이다보니
더 그런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글의 성격이 교범도 아니고 수기도 아닌 것이 좀 아리송한 구석이 있으니까.
이따금씩 글의 방향이 소위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뭐 여하간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제법 세세한 것이 아마도 일기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였다. 일기에 쓰인 내용을 토대로 해서 거기에 살을 좀 붙인 구성인 것 같다.

나로서는 이 독서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 않거나
군인도 아닌 내가 이렇게 자질구레한 부분까지 챙겨 읽어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크레모아 관리의 중요성이나 평소 훈련의 강조, 여자가 더 독하다는 저자의 인상이나 포로 처분 방식 등등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내용들은 저자의 부족한 글솜씨 탓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일반인 중에서라도 밀리터리 계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대단히 흡족하게 읽을 것 같다.
소대나 중대 규모에서 실제 전투가 어떻게 행해지는지, 졌는지에 대한 서술이 빼곡하기 때문에.
과연 전투 수행에 있어서 어떤 점이 중요한지 되짚으며 강조하는 대목이나
본인이 겪었던 경험담을 풀어내는 내용들은 실제 전투가 과연 이런 식이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조금 갸우뚱 했던 건 책에 그려진 저자의 모습이 제법 이상적인 군인상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건데
실제로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평판을 받았던, 뛰어난 군인이었기에 본인의 경험을 서술한 것 뿐인데도
그런 상이 그려진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전투감각'이라는 의도도 있는 마당에 애써서 지저분한 내용을
서술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현지인들과 교류를 나눠야 한다는 내용이나 적이 먼저 쏴야 우리도 쏜다는 등의 이야기는 너무 옳고 좋기만 한 얘기같아서.

조금 의문이 드는 대목도 하나 있는데 13장인 '마이 여인'을 읽어보면
매복 작전 중 휘하의 병사가 매복이 들킬 수 있는 상황이어서 부득이하게 한 베트남인 여성을 쏘게 되는데
풀어주자니 발각될 위험이 있어서 데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찾으러 왔다가 그 또한 총격에 목숨을 잃게 되는데(이 둘은 무고한 민간인은 아니었다)
여인이 자신에게는 자식이 있다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던 말도 들었던 저자 본인으로서는 이런 결말이 대단히
씁쓸했고, 그로 인해 이후 악몽도 빈번하게 꾸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 서술된 작전 하에서 사망한 인물은 이 두 명인데 265쪽을 보면
"시체를 끌어다가 마이 여인을 묻었던 자리를 파고 합장해주었다. 나무로 십자기를 만들어 머리 쪽에
박아놓았다. 시체를 찾아다가 장사를 잘 지내주라는 표시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약 2시간 가까이 개울을 따라 철수했을 때 우리가 매복했던 지점에서 폭음이 발생한 것을 청취했다.
시체를 뒤지다가 시체 밑에 매설한 수류탄 부비트랩이 터진 모양이었다."라는 문장이...?
비록 전시였기는 하나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이들에게 예우를 표하려 했다는 것 같은데
거기에 부비트랩을 설치해 뒀다는 건가? 못할 거야 없겠지만서도...

대강 눈치를 보니 내가 읽은 판은 91년 판과 비교해서 뒤에 두어 장이 더 붙은 형태인 것 같은데
특히 마지막 장이 자계서 냄새를 피워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무도 이 책에서 저자의 경험담과 전투에 관련한 일정한 조언들 이상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의 군인으로서의 글이 읽고 싶을 따름인 것을... 아마 저자도 그를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그런 의미로 말하자면 더 거슬리는 것이 말미에 저자가 월남전을 보는 시각도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이미 참전한 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운 저자의 기상에 딴지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기왕 베기로 한 것이라면 칼은 날이 서 있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아마 혁혁한 전과만 올린 저자의 경험담이 서술되어 있으니 전투는 이렇게 이겼는데 전쟁엔 왜 진 거야? 하는
의문을 독자가 품을 수도 있으리라 저자도 짐작했고, 그래서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월남전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밝혀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조금 갸우뚱하게 되는 건데,
간단한 예를 들어 "월남 내부의 철없는 종교인"이라거나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정치 싸움만 반복했다" 등의 서술을 읽으면...전투의 프로페셔널인 저자가, 대뜸 아마추어 역사가나 정치가 흉내를 낼 필요는 없었지 않을까... 싶어 지는 것이다.
뭐 아무래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군인이란 직업과, 심지어 공산군과 전투까지 벌였던 인물의 시각이 이렇다는 게
나는 너무너무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다고 생각해서 참을 수가 없다 말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겠지만.

독서 이후에 간단히 관련 내용을 찾아보다가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저자가 소총중대장으로 복무할 당시 직속상관인 대대장이 노태우 중령이었다.

2017년 8월 2일 수요일

문영심,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제목에는 김재규 평전이라 쓰여 있지만 인간 김재규에 관한 전기적인 묘사나 내용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79년 10월 26일이 가까워오던 시기 당시 중정부장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실체를 목도하여
박정희를 설득할, 그리고 설득이 실패하자 거사를 단행할 결심을 하게 되는 초반 약간을 제하면 저자는 10.26 당일의 묘사와
재판 과정에 지면을 거의 할애하고 있다. 그래도 평전을 자처했다면 김재규의 성장과정 비슷한 것 정도는
서술해도 괜찮지 않았나 싶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개인 김재규의 삶이라 해봐야 크게 보아 당시를 살아가던 권력자들과 아주 다르지는 않았을 터인즉
저자는 10.26과 그 이후의 짧았던 모습이 '우리'에게는 더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런 내용을 저자는 소설식으로 서술한다고 느껴지는데
어떤 순간 어떤 인물의 내면묘사까지 읊어내는 소위 전지적 3인칭 시점의 화자로서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게 맞는 서술태도인지 조금 아리송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일종의 몰입감을 주기도 하고,
평범한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라는 점에서 딱딱한 문체를 피하려 했다는 것도 이해함직 하지만
그래도 꽤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글인데 읽으며 좀 낯간지럽다는 느낌을 억누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혹은 무슨 부마항쟁 당시 부산의 택시 기사가 중정 보고서나 진배없이 시세를 파악하고 있었다느니...
(이것은 아마 부마항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데, 이런 사회 하층의, 말하자면 무식해야 할 인물마저
지성을 가지고 당대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이니... 이런 투박한 '민중' 색안경이 좀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격이라 할만한 부분에서 공히 등장한 인물에 눈길이 가는데
책의 내용을 나름의 자료를 토대로 한 진실이라고 일단 상정하자면 이 인물은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사태파악을 위해
부산행 이후 시위대의 틈 속에서 정찰을 하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소위 '시민 동지'인데
김재규 추모행사에도 말없이 참가했다가 저자의 눈에 띄어 저자가 그런 사연을 듣게 되었다는 식의 내용이 있다.
이게 소위 수미일관을 노린 저자의 기교인지, 아니면 그런 사실이 정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만약 전자라면
글쎄... 나는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부려놓은 장치를 굳이 읽고 싶거나, 궁금했던 건 아닌데... 쯧, 하고 혀를 찰 수밖에.

거기에 김재규가 소위 시절 미군과의 시비로 일본도를 꺼내들었다느니 하는 일화 또한
저자는 그 일화를 소개하는 다른 인물의 입을 빌려 "싸나이 답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소위 '욱 하는 성질'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건 아닌가 싶고도 하고...
어차피 인간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그의 거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언행을 통해서 충분히 가능할텐데
이런 방식으로 미화할 필요까지는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신경써야 할 부분은 아니라지만.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식이다보니 뭐 사건의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
말하자면 이미 아는 내용과, 굳이 알 필요 없거나, 낯간지럽기만 한 서술들 사이에서 책이 유의미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런데 재판 과정을 다루는 3부부터는 제법 읽을만한 내용이 되었던 것인데 아마도 재판 기록에서 발췌한 것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발언들이 오고갔는지 세세히 인용하고 있고 그에 저자가 본인의 판단을 덧붙이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보다 읽으면서 낯간지럽지 않아 좋았고, 제법 충실한 기록을 읽는다는 맛이 있었다.

그 세세한 내용을 여기다가 인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읽으면서 내가 느꼈고 저자 또한 제법 강조했던 점을 적어보자면
하나는 이 재판이 그 자체로 제법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김재규와 변호인단 등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이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당시를 규정하려 했는데 재판부는 이를 무마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신군부가 계엄의 해제도 김재규의 사형 이후로 고집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신군부는 계승하려던 체제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당시의 정치가들은 본인들의 치적을 뽐내기 위해(이렇게만 말하면 좀 악의적인 서술이겠지만;)
김재규와, 그의 재판 과정을 크게 부각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김재규의 거사는 잠정적으로나마 깔끔하게 봉합되었던 것.

둘은 김재규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들도 제법 많지만 전후의 정황상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부분이 분명 있지 않은가 싶다는 건데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의연한 모습이나 나름의 논리를 가진 그의 '혁명론'이 그러하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눈여겨보게 되었던 대목은
"박정희는 언제나 김재규의 인사권자였다"는 한줄인데 그렇게 본인을 아껴주었고 본인도 그래서 충심으로 대했던 상관을 죽이게 되었을 때는
이를 권력욕 혹은 분기를 억누르지 못한 우발적 행동으로 보는 것도 물론 가능하겠지만 그런 은인마저도 저버려야 했던 어떤 대의가 그의
마음 속에 있었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지 않은가 싶어서이다. 10.26의 전개 과정에서 그의 부하들이 일언반구의 반발도 없이 그를 따른 점이나
재판 과정에서 상관에 대한 존경이나 명령 복종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도 인간 김재규가 인격자였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더하여 변호인단이 남긴 개인적인 기록이나 사제단의 청원서 등을 보아도 그의 행동이 막무가내이기만 했던 건 아니지 않을까 싶어지는데
그 정도의 인망을 지녔던 인물이 그런 극단적 선택을 내려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면 그게 소위 신군부가 발표한 근거보다는 좀 더 그럴싸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셋은 당대의 소위 분위기인데, 1심의 구형에 대한 변론에서 태윤기 변호사가 이런 말을 남겼다.
"법조생활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변호인을 만나는 데 경찰관의 방해를 받았고, 저희 집에는 자칭 시민이라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조직적인 협박전화가 왔고, 심지어는 역적 재판을 맡았다고 살해하겠다는 서신까지 보내고 있습니다."
맙소사. 그러고 보면 새삼스러운 부분인데 막상 읽고서야 알았다. 살해 협박이라...

개인적으로는 김재규의 '혁명'발언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었다. 무엇보다 2017년을 사는 나로서는 신군부 독재가 기정사실로 주어졌으니까.
어차피 전두환이 집권하게 될 거 좋은 빌미나 줬지 싶고, 전두환이 집권할 수 있었던 그 구조를 뚫어내지 못하고 그저 박정희 하나만 축출하면
민주주의가 오리라 믿었던, 좋게 말해도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하고 무지한 인물의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리고 그의 진심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재판 과정이 좀 더 적법하게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신군부에게는 대단한 곤란이었을 것이다.
자기들이 물려받아 입으려던 옷이 어떤 것인지 발각될 위험이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당장 박정희의 '행사'들도 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었으니...
그랬기 때문에 재판 과정이 대단히 서두르듯 이루어졌다는 모양이다. 그들을 죽여서 입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고 보니, 그의 '혁명'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더하여 에필로그에서 함세웅 신부가 했다는 말이 이렇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를 죽인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이후는 우리 국민들의 몫이었지요. 김재규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당시 박정희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런 박정희를
제거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거지요."
음... 곱씹을만한 구석이 있다. 박정희가 죽어야만 했다면, 김재규 말고 다른 이가 있었을까 싶어서...

2017년 8월 1일 화요일

드니 디드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요즘 계몽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읽다 보니 자연히 각 사상가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첫 타자는 드니 디드로가 되었다. 이전에 독갤에서 그의 [수녀]를 추천하는 글을 보기도 했고.
이 작품은 밀란 쿤데라가 그렇게 극찬을 했다는 작품이기도 하니...

계몽사상가의 저서를 읽는다면 보통은 흄, 칸트 등을 읽거나
프랑스인 중에서라면 볼테르, 혹은 루소가 먼저 떠오르지만 오히려 그런 의미에서 평범(?)해 보이는
그에게 왠지 관심이 갔던 것.
드니 디드로는 저명한 계몽사상가이자 백과전서파의 수장격 인물인데
2017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사는 내게는 무언가 특색없는 인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사상의 내용이나 영향이 시공을 넘어 나에게까지 울림을 줄만한 구석이 있는지
사실은 조금 아리송하기 때문에...

소설로 분류되는 책이기는 한데, 구성이 꽤 독특하다.
주인공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크와 그의 주인인데,
이 둘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화자의 존재가 굉장히 부각되어 있다.
대뜸 대화 중간에 화자가 끼어들어서 논평을 하는 부분도 많고,
어떤 때는 심지어 가상의 독자의 목소리까지 끼어들어서
예를 들어 "그런 것은 부당하다!"라고 외치면 거기에 화자가 대답하는 등...

이런 방식으로 통상 '소설'이라 불리는 장르의 관습이 꽤나 훼손되어 있는 느낌인데
이런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역자는 책 말마의 해설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 글쓰기를 선취한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하는 것 같지만 그런 설명은 내 생각에는 수레를 말 앞에 둔 격이 아닌가도 싶다.
개인적으로는 아마 '소설'이란 문(文)의 장르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나쁘게 말하면 혼란스럽고
좋게 말하면 다채로운 시도가 있었던 따름이지 않을까. 1700년대 후반에 쓰인 소설이니까.

특히 화자(저자)가 서사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것은
(심지어 중간에 자크와 그 주인의 이야기를 옆으로 제쳐두고 본인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글쓰기'라는 행위를 대하는 자의식이 표현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는데
당장 이런 별 것 없는 독후감을 끄적이는 나조차도 느끼는 이 '글쓰기'의 지난함과 어려움이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정제되어 표현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 희한하지만 부연하자면 디드로는 연극 배우론을 쓰면서 거기에 최고의 배우는 혼자 감동을 받아서
끅끅거리는 연기를 하는 인물이 아니고, 자신의 몸짓과 발성이 어떤 효과를 낼지 전부 파악하고 있는,
오히려 자신의 연기로 표현하는 그 감정에는 멀찍이 떨어져서 계산적으로 연기할줄 아는 인물이여야 한다는
내용을 적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게 글의 직조에서도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해보자면...

하여 중간에 화자는 자신은 당시의 통속적인 혹은 저자 본인이 열등하다고 느낀 다른 작품의 전개 방식을 예로 들며
자신은 그런 방식으로 글을 전개시키지 않고, 오직 사실만을 적어놓겠다고 엄숙하게 선언하기도 하는데,
주인의 입을 빌려 역사에 도덕적 훈계를 섞지 말라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지도(p.82) 모르겠다.
여하간 그런 것 치고는 전혀 '사실주의적'이지 못한 이 글의 얼개가 도리어 저자 본인에게는 대단히 사실적인 글쓰기의 방식이었다는 의미라면
여관 여주인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계속 삽입되는 여관 일꾼들의 방해를 예시로 들자면
저자는 그런 방식의 글이 '이야기를 한다'는 행위의 진정한 형태라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사실주의'적인 소설들의 형태는 오히려 화자가 이야기를 하고, 독자는 그것을 편하게 몰입하여 읽는
의외로 대단히 인공적인 글의 마당(?)을 펼치고 상정해놓는다는 점에서 부자연스럽고 비사실적이라는 일종의 주장이기도 한 건가?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웠던 점을 하나만 더 들자면
소설의 화자는 자신이 이야기를 하는 그 시간과 장소에 함께 입회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자크와 주인이 저 멀리로 사라지니, 우리는 잠시 이 이야기도 멈출 수밖에 없겠다...는 식의 서술이라던지.
바로 위 문단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이 '화자'의 존재가, 그 설정이, 생각보다 꽤 부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환기가 되는 독서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크는 제목에서 저자가 명시해 놓았듯이 운명론자인데,
계속해서 어떤 사건의 향방은 이미 '위에서 쓰여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그렇다.
사건의 연쇄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이 결정론이라면
그것이 어떤 주재하는 섭리(그것이 신일 수도 있고)에 의함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운명론일까?

여하간 재미있는 점은 자크는 그렇게 입버릇처럼 (본인이 말하기로는 후렴구) '저 위'를 말하지만,
즉 자신은 더 높은 원리나 법칙에 의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무릅쓴다는 점이다.
특히 초반부 여관에서 악당들과의 조우에서 그걸 볼 수 있는데
악당들을 혼내주고 나서 돌아온 자크에게 주인이 그들이 덤비지 않을 지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그는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해보기 전까지는 몰랐다는 것 아닌가.
자신의 의지와 그 실행에 방점을 찍는 운명론자라는 건 꽤 흥미로운 설정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크 본인의 입으로도 '두루마리가 풀리는 것'이라는 비유를 쓴 것이다.
위에 쓰여 있는데, 두루마리를 풀어 봐야 쓰여 있는 줄 안다는 것.

자크와 그 주인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데 (그게 어디인지 화자는 한사코 밝히기를 거부한다)
그러는 도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으나
작중 인물들 자신의 말대로 본성에 의해, 자크는 말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고
주인은 듣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특히 자크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자크의 사랑 이야기가 큰 화두이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런 저런 자잘한 사건에 의해 그 얼개를 풀어내는 것을 방해받고
사이사이에 다른 이들의 이야기나 대화 등이 삽입되면서 계속해서 지연된다. 고도?

그리하여 온갖 이야기들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소설인데,
기억에 남는 것들을 추려 보자면
역시 으뜸은 포므레 부인의 복수극이 되겠다.
이것은 두 주인공이 여관에 묵게 되었을 때 그곳의 여주인이
다른 객실에 묵은 두 명의 사정을 전해들었다며 다시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전달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포므레 부인이 자신을 배신하고 외도를 한 아르시 후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창녀를 고결한 여인으로 포장시켜 그가 그녀에게 반해 결혼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서술을 마치고 화자는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데 그녀의 처사가 극악무도하다고 하겠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남자들은 그보다도 작은 일을 가지고도 결투를 벌여 남의 몸에
칼을 꽂을 것이라 설명하는 부분은 제법 진보적인 시각이지 않나 싶기도.

더하여 아르시 후작의 이야기나 이후 위드송 신부의 이야기 등으로 미루어
당대 귀족이나 성직자들의 부패와 가식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같다.
특히 주인이 수도승들을 비난하는 부분이나(p.70) '두루마리를 쓴 자'를 욕하는 부분(p.120)을 보면
계몽사상가답게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듯도 하다.

주인공인 자크는 자기 주인에게 대단히 무례한 행동을 많이 보이는데
매를 맞을 기분이 아니라고 대든다거나 주인에게 계속 깐족거리는 장면들이 있다.
여주인의 여관에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중 그 상대가 되는 여성의 정체가 밝혀지는 데에서
그녀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녀를 찬탄의 대상으로 생각하던 주인이 "너 같은 녀석에게 그녀가..."라는 식의
말을 하자 거기에 화를 내 주인과 방에서 나가라, 싫다로 옥신각신을 벌이는 장면은 그 극치일 것이다.
이 장면의 결말은 여주인이 그들의 방으로 올라와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후 둘이 맺게 되는 약정에는 자크가 모든 업무를 맡을 능력을 지니고 있고 주인은 나약할 따름이라
오히려 실권은 자크에게 있고 주인은 그를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건 소위 주노의 변증법이 아닌가? ㄷㄷ;
뭐 이런 거창한 소리를 떠나서도 하인인 자크의 언행은 피식피식 하게 만드는 데는 있었던 것 같다.

감상은 이정도로 하고,
책이 대량 500쪽정도 되는데 그 중 70쪽 정도가 역자 해설이니 대단히 두툼한 구성이다.
대단히 혼란스러운 구성의 소설인데 덕분에 흥미롭게 정리도 잘 한 것 같다.
위에 쉰소리 한마디 적어놨지만 역자 해설에 들인 노고가 제법 대단했으리라.
그걸 읽고도 내 감상이라며 사족을 달기도 조금은 우습기도 했지만...

(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