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30일 금요일

피터 게이, 모더니즘

속표지가 꽤 멋들어지다. 구성주의적인 느낌으로 중절모를 쓴 신사를 표현한 느낌? 아님 말고.
여느 예술사조가 그러하듯이 모더니즘 또한 단어는 거대하고, 정의는 어려워 그저 막막한 느낌만 주는 단어다.

저자는 모더니즘을 대강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는 이단의 유혹, 즉 관습적인 감수성에 저항하는 충동이며
또 하나는 철저한 자기 탐구이다.
다른 분류 기준에는 단점이 있다고.
에즈라 파운드의 "새롭게 하라!"는 슬로건이 그의 대표격으로 인용된다.
더하여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적의가 덧붙을 수 있겠다.

그런데 '개인'에 대한 주의 환기는 이미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르네상스기에 빛나는 그 천재적 개인들이라던지,
유아론이라는 비판까지 감수할 만큼 '나'를 중심에 놓았던 데카르트라던지 등이 그러하지 않나?
더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태도는 오히려 낭만주의적인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낭만주의와의 대별이 유효할 것 같은데 낭만주의 또한 개인에의 강조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천재'의 이미지가 낭만주의의 고안물이기도 했고.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낭만주의는 코스모폴리탄적인 계몽주의의 물결에 맞서서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려는 움직임으로서
(보통은 목가적인 형태의) 이상향을 설정한다는 점과, 그런 이상적 시공간을 어떤 구체성 안에 투사하는 방식을 통해
예술활동을 했다는 느낌인 것 같다. 그 구체적인 존재가 소위 '천재'인 것이겠고 뭐 '민족'인 것이겠고 등등...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겠지만 낭만주의에서 개인을 강조하는 것은 일단 이념이 먼저인 셈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진보...적?) 물결에 대한 반동적 성격과 '천재'상을 중시하는 것 치고는 희한하게도 집단성이 강조되는 성격이 공존하는 것으로
음... 이것봐라; 파시즘의 시초?

그러면 모더니즘은 일단 '진보'라는 단어에 깃든 긍정성을 인정하든 안하든 간에
이미 달라져버린 세계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 시작인 것 같다.
모더니즘은 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 체제, 세계화, 도시화를 모두 포용한다.
그가 처한 삶의 조건이 '그렇게' 된 이후 이를 받아들인 인간들이 내놓은 예술의 갈래들을 총칭하는 단어가 아닌가...
다시 말해 내 생각에는 모더니즘이란 뚜렷한 구획이 가능한 흐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세대의 구분인 것도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 가량을 살아가던 세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저 삶의 조건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기에,
그들의 예술은 자연히 이전과는 다른 형태를 띠었을 것이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나로서는 이런 세대적인 구분이 유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예술'을 대하는 태도로 보아도 예술이란
(계몽주의) 칸트에게는 완상의 대상이고
(낭만주의) 헤겔에게는 시대정신의 표상이고
(모더니즘) 니체에게는 개인의 예술로서의 삶의 표출인 것...일까?
'예술로서의 예술'이란 태도로 함께 묶을수도 있지만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차이가 그렇게 드러날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으로 분류 가능한 형태의 예술과 예술가들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그런 외부적인 조건을 인정하고 나서
예술가 본인, '나'에 집중한 사람들인 것 같다. 이런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나만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
여기서 기법에의 천착이 이루어진다. 모더니즘 예술은 어떤 형태로 드러나든 간에 내용과 형식의 대별에서
형식에의 집착, 그것도 새로운 형식에의 집착이 굉장히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형식에 집착하다가 '예술'의 경계마저 무너뜨리게 되는 결과(뒤샹, 팝아티스트)가 된 듯하고.

저자 또한 몇몇 곳에서 암시해 놓았지만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체제를 뒤엎어 보려는 의도를 지닌 이들의 작품들이
바로 그 부르주아들에게 각광받고 '팔리게 되는' 지점에서 모더니즘의 취약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아웃사이더로서의 감성(?)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형식의 고안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는 자연히 예술운동의 추동력 자체를 갉아먹게 되었으니까.

아마도 우리가 대중문화를 평가하는 방식도 이러한 태도와 적지 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몽키스는 안되고,
비틀즈는 되고,
비치 보이즈는 안될뻔 하다가 그래도 고개를 끄덕여 줄만한 이유가 바로
가수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한 음악을 부른다는 것에,
심지어 그것이 당대 대중문화의 맥락 안에서 아주 새로웠다는 사실과 결부하여
갈채를 받고 지금도 그렇게 회자되는 것일테니까.

꽤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는 것도 같다. 그렇게 보면.
음반을 몇천만 장이나 팔아낸 '대중문화'의 첨단, 그 기수들이 (모더니즘적인 잣대를 통해) 당당히 예술가로서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말이다.
소위 시대가 바뀌는 것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예술의 각 분야에 걸쳐서 모더니즘적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예술가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활동과 사상을 간단히 정리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벼운 내용이었고 읽기에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간다.
예를 들어 헨리 제임스,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푸르스트 이 네 명을 하나로 묶어
작은 장을 할애하는데 쪽수가 30쪽도 나오지 않을 때는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일람식 구성이 좋았던 건은 그저 어디서 줏어들었지 싶은 인물들이
어디에 위치하는 지를 알려준다는 점이었다. 회화를 예로 들면 인상주의니 야수파, 입체파니
고흐, 고갱, 세잔, 마티스, 피카소, 달리... 이름이야 심심찮게 듣지만 애써 정리할 이유를 못느꼈기에
어지럽게 이름으로서만 머릿속에 존재하던 인물들과 그들의 예술활동이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좋았다.
처음 듣게 된 이름들도 많았고.
제임스 앙소르와 에른스트 키르히너. 책에 실린 그림 몇 점만을 보았을 뿐이지만 전자의 유머감각과 후자의 묘하게 공허한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꽤 재미있었던 건 저자가 한두마디씩 논평을 남긴 부분인데 예를 들면
칸딘스키가 자기만의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그 모호하고 애매한 단어는 재활용된 낭만주의로 넘쳐날 뿐이었다.(p.234)
사실 그 새로운 소설가들(누보 로망)은 전쟁 전에 모더니스트들이 했던 문학비판을 재탕하고 있을 따름이었다.(p.724)
혹은 다다나 초현실주의에 대한 낮은 평가라던가...
이렇게 조금 거리를 두는 논평이 개인적으로 정말 흡족했던 것은 당사자들은 나팔에 꽹과리에 온갖 요란 소란을 떨어도
내가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어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갔던 것들에 대해 '시끄러운 건 시끄러운 것'이라고 말해준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당장 지금도 인터넷을 조금만 돌아다니면 개코딱지 같은 영화나 음반 등에 세상 천지에 둘도 없을 걸작이라며
뿌뿌 나팔을 부는 평론가연 하는 글들이 갈퀴로 긁히는 실정이니, 혼자서 잘나신 예술가 나으리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보여주는 이 사학자의 평가가 개인적으로는 뭔가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눈에 좀 밟혔던 것은
프로이트의 전기로 유명세를 얻은 저자답게
중간중간 프로이트를 미세하게 삽입하는 부분이 있는데 뭐 어떤 예술가는 '승화'를 시켰다던가 식으로.
이게 약간 거슬린다. 나는 아직 프로이트가 지금도 존중할만한 학자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
더하여 오타가 제법 많다. 읽으면 읽겠지만 앤디 워홀이 19세기 말에 활동하고
보들레르가 20세기 후반에 활동하는 내용을 담는 책이 되어버리는 건 꽤 우스꽝스럽지 않나?
심지어 장의 소제목에 '크누크 함순'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도 있고.
교정을 제대로 안 보고 그냥 출판한 느낌이 굉장히 많이 든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작은 자본론

마르크스 사상과 자본에 관련한 개론서는 이미 썩어넘칠대로 많다. 그러면 왜 이 책인가?
누군가에게는 아마 저자인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스타성(?)이 주효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고서야 이런 사람이 있구나... 했던 터라 애초에 이 책을 손에 들은 이유는
1의 추천 때문이었다. 어떤 글인가에 댓글로 달아놓은 게 있길래,
마침 책이 얇고, 제목도 적절해 보이고, 타이밍 좋은 추천까지 보고 한번쯤 읽어봐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망스럽다고까지는 못하더라도 만족스러운 독서가 아닌 것은 분명했는데
일단 제목부터 썩 잘 된 것이 아니었다. 원제는 대강 '내 딸에게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정도인 듯한데
작은 자본론이라....; 말의 무게가 너무 다르잖아 이건. 나는 80년대 골방 냄새나는 논의도 감수할 생각으로 펴들었더니
딸에게 세상을 올바르게 볼 것을 당부하는 아버지의 차분한 어조로 글이 되어있으니;

그러니 내용이 꽤 가벼운 게 사실이다.
그게 단점이랄 건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글이 아니다보니 독서경험이 아주 긍정적이기만은 어려웠다.

과연 저런 제목을 출판사에서 붙였을 때는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본 개념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내용인데
생산이라는 하부 구조를 강조하는 내용이라던가
시장과 시장경제의 대별, 이윤을 동력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설명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굳이 이 책이어야 할 이유가 개인적으로는 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다른 개설서 등으로 대강은 알고 있었던 내용이고...
어리게 잡으면 초등학생이 읽어도 될 내용을 지금 와서 읽으려니 페이지도 잘 안넘어가고...

재미있었던 건 부채를 통한 신용의 사이클이 '미래'에서 가치를 떼어오는 것이라는 표현과
실업 문제를 바라보는 저자의 설명이었는데
하나의 상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그 시장의 가격 균형에 맞도록 가격을 낮추다 보면 수요층이 생길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노동력 상품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고, 그러므로 사회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실업은 자기 노동력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개인의 문제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를 들어 집은 살고, 음식은 먹는다는 쓸모가 있으나 노동력 그 자체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윤을 위한 상품 생산의 수단으로서만 기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력의 가격이 하락함이 경제 침체의 신호로 기업가들에게 받아들여지면 도리어 사업 규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결말이 나기도 한다고.

굳이 나누어 본다면 저자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지 싶었던 것이
국가의 역할을 굉장히 강조한다. 시장이 실패하는 지점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이것을 국가가 나서서
조정해야 된다는 입장이 꽤나 자주 반복되고 있다. 소련의 경험이 이런 입장을 제법 막고 있다고도 난 생각했는데,
내가 이 사람의 생각을 짧은 책 하나 가지고 알 수야 없겠지만 일종의 사민주의자인가? 뭐 각자 입장은 있는 거니까.

2017년 6월 19일 월요일

최인훈, 광장/구운몽

[광장]
대한민국에서 글쪼까리 좀 줏어읽고 다닌다는 인간이라면
더듬이에 한번도 스치지 않기 어려운 바로 그 소설, [광장]이다.
이제사 읽게 된 것도 조금 웃기다면 우스운 일인데...

워낙 개작이 많이 된 걸로 유명한 작품이라
모르긴 몰라도 각 판본의 차이를 주제로 한 연구도 충분히 있을 법한데,
내가 읽은 건 전집본 1권으로 나온 판이다. 아마도 이게 일단 가장 최신판인듯?
개인적으로는 관념적인 외래어로 범벅이었다는 초기 판에도 마음이 꽤나 쏠리지만,
뭐... 이런 방식의 작품들이 으레 그러하듯 괜스레 최신판이 가장 나은 판처럼 느껴지는 마음도 한구석에 드는 것이다.

드디어 확인해 본 광장의 진면목은 사실 생각보다 강렬하지는 않았다.
그러하므로 광장이 입고 있는 후광은 역사적인 경험으로 인해 켜켜히 쌓인 먼지(?)에 기대는 측면도 좀 있지 않은가 싶다.
남한과 북한의 대립 사이에서 용감하게도 양자를 부정적으로 표상하는 일을 해낸 작품이 전무했고 후무했던 덕으로,
당대의 충격이 있었던 모양이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그때 참 충격을 줬지'라는 식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은 아닌지.

최인훈의 작품을 많이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여기서도 어김없이 뜬소리를 속으로 읊어대는 소위 '지식인'이 주인공이다.
소설의 현재는 중립국으로 가는 배인 타고르 호의 선상이다.
주인공인 이명준은 전쟁 포로의 신분으로 영어를 제법 하는 덕으로 통역을 맡아서
나름대로는 대우받으면서 지내는 형편인데,
선상에서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소설이 진행된다.

이명준은 분단과 한국전쟁의 사이의 시간을 살아가는 철학과 학생이었는데,
아버지의 친구이자 남한에서 은행장을 맡고 있는 변성제 선생 댁에서 기식하는 입장이다.
아버지는 독립 운동을 하던 인물인 모양으로 이명준 또한 소년기에 신징, 하얼빈, 연경 등에서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여하간 그런 활동들 끝에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나름 높은 지위를 맡고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 덕분으로 어느 날 경찰서로 끌려서 뭇매를 맞는 일이 생긴다.

그는 그다지 남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는 정 선생과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정 선생은 무의미한 일에 마음을 쏟으며 지내는 일종의 한량으로 어느 날 그가 새로 구하게 된 미라를 보여준다며
이명준을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서 남한의 갑갑한 상황에 관하여 일장 연설을 쏟게 되는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지만, 여기서 '미라'는 소위 전통, '우리의 것'도 그저 이런 식으로 박제화되어서
구경거리로서의 지위 정도만을 갖게 되었다는 자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후의 [회색인]을 읽어 보아도 최인훈은 당대의 문제를 직면하고, '전통'으로 후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여하간 이 일장 연설에서 이명준은 남한에는 광장은 없고 밀실만이 있다고 부르짖는데
여기서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은 아마도 이런 의미라고 생각된다.
광장이란 인간과 인간이 모여서 만들어낸 어떤 공동체 일반을 의미하고
밀실은 일종의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통칭함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밀실은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이라는 대목을 보아 그렇다.
그러므로 밀실은 근대에 등장한 주체, '나'라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인듯 하다.
남한에는 광장다운 광장이 없어서 문제고 북한에는 밀실다운 밀실이 없어서 문제라고 했던
그의 절규는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될 것 같다. 밀실의 비유로 제시되는 건강한 개인들이 모여
함께 소통하는 뜨거운 장이 그에게는 광장다운 광장인 셈이겠는데 어디 이게 간단한 문제일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광장이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 단초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
경찰서에서 고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당시로서는 아주 예삿일이었을 매 찜질을 당하고서 그는 속으로 읊조린다.
몸으로써 아버지를 느낀다고. 이 대목이 재미있는데 머리만 부풀어오른 지식인 이명준이 '몸의 길'을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어서다.
그때껏 아버지에게 연대감 비슷한 것도 하나 느끼지 못하던 그이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육박하는 고통을 통해서
이것이 아버지 또한 받았던 고통인가, 하고 문득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 사건을 연유로 하여 그는 우연히 마주쳤던 윤애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몸의 길'을 통해 소통해보려 시도한다. 개인과 개인이 맞닿아 소통할 수 있다면,
그러한 원리로 뜨거운 광장으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할 터라면 이는 그에게 제법 치열한 몸짓일 수 있다.
다만 그 수단이 이런 방식의 '사랑'(?)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회의 또한 들지만....
그러나 이 시도는 제법 간단히 기각된다. 윤애는 그와 소통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에 월북을 결행한다.

그가 당도했던 북한은 광장의 미명 아래에서 그 이름을 팔아먹는 허깨비들만 즐비한 공간이었다.
그곳은 오직 당의 역사와 당의 입장만이 유일한 이상으로 제시되고 그것을 앵무새처럼 따라하지 않으면
저 허깨비들에게 다시 박해받는 일만이 인민들에게 부과되는 곳이었다.
이명준은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그의 보고가 '부르주아적'이라며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이에 환멸을 느끼던 그는 은혜를 만나게 된다.

은혜와의 교제에서 그는 다시 한번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무용수인 그녀에게 모스크바로 떠나는 것을 만류했던 것인데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가도 이후 모스크바로 훌쩍 떠나버린다.
한국전쟁기, 낙동강 전선에서 뜻밖으로 그녀와 다시 조우한 이명준은 자기만의 공간으로 준비했던 동굴에서
그녀와 꾸준히 밀회를 갖는다. 그들의 밀회로 인해 아군(인공군)의 피해가 있을 수도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그들은
악착같이 그에 매달리는데 어느 날, 그녀는 딸을 가졌음을 그에게 알리고 얼마 뒤 폭격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그들이 맺어낸 소통의 결실이 문득, 체제의 폭력으로 인해 무마되어버린 셈이다.

어디에도 적이 없는 이명준은 포로 수용소에서 중립국행을 택하고,
타고르 호 위에서 끊임없이 느끼던 위화감,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기분의 정체를 문득 깨닫는다.
선장이 언젠가 갈매기들은 육지에 두고 온 여인들이 화한 것이라는 뱃사람들의 미신을 알려주었는데
이명준은 그 시선은 갈매기가, 그의 여인들이 보내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명준은 아마도 바다에 몸을 던진 것처럼 묘사된다.

책의 말미에 실린 해설에서는 평론가 김현이 어머니로 표상되는 바다에 자기를 던짐으로써
이명준의 행위에 절망이 아닌 희망이 깃들어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건 사실 조금 납득이 안 된다.
뭐... 패배주의적인 내용을 애써서 긁어오지 않으려는 태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싶지만,
자살이라는 결말은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도 거기서 절망의 정서를 읽지 않기 어렵지 않나?
이명준은 광장과 밀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바랐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던 게 아닌가 싶다.
(이 부분은 개고한 부분이라는데) 이명준이 선상에서 꿈을 꾸는 장면이 있다.
인공 치하의 서울에서 태식과 윤애를 만나 그를 구타하고, 그녀를 강간하려 하다가 깨어나는 장면이다.
이는 '몸의 길'조차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아닌가?

그는 남한에서 한 번, 북한에서 한 번, 두 번을 박해받고
두 번 여인들에게 배신당하고
두 번을 도피한 끝에
결국 그러한 결말을 맺은 것인데,
이에는 그의 소시민성이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봄직 하다.
그는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


[구운몽]
기왕 합본이니 이 또한 곁들여 읽었다.

꽤나 정리하기 난감한 소설인데,
주인공 독고민은 어느 날 귀가하여 자기에게 온 편지를 읽고는
자기를 훌쩍 떠났던 연인 숙이 자신을 애타게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약속 장소인 극장에서 그녀를 기다려 보지만 그녀는 오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일군의 시인들이 몰려 있는 카페에서 갑자기 '선생님'으로 오인받으며
시작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으며 쫓기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은행의 장 대우를 받기도 하고
무용수들? 쇼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희한한 수용소(아마도 정신병원)를 방문한 '각하'가 되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사이 혁명과 그 진압을 둘러싼 방송이 울려퍼지는데
수용소에 극비명령이 떨어져 풍문인이라는 죄명으로 수감되기도 하다가
장면이 바뀌면 술집의 여급과 거친 손님의 다툼을 목도하는 다른 손님이 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소설 내내 등장하던 혁명 혹은 반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가
남한의 가톨릭 대 주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9개의 인물과 역할을 번갈아 떠맡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기에 구운몽인지?

그러면서 왼쪽 뺨에 점을 가진 여성이나
카바이드등과 같은 눈빛의 늙은이라던가 하는 요소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러다 급기야는 정신과 의사인 김용길의 이야기나
영화의 해설 등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그러면 위의 꿈같은 이야기는
김용길의 창작이거나, 그의 병원에서 얼어 죽었다는 독고민 씨의 죽기 전 환각이거나,
어떤 영화의 장면장면들이었거나 한 것일 수도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조리극 같아서 슥슥 읽기에 아주 나쁘지는 않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아주 궁금한 것도 실은 아니다.
아마도 카프카를 염두에 둔 소설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카프카를 그닥 읽어보지 않아서
비교를 바로 해보지는 못하겠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른 작품은
[도구라마구라]인데 이를 최인훈이 접해본 일이 있을지, 하여 어떤 영향 관계가 정말 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떤 특징을 공유하는 인물들이라는 접점으로만 엮인 기묘한 단편들의 연쇄라는 구성과
김용길을 등장시키며 정신의학 비스무리한 것을 버무려놓는 부분, 특히 수백 년 전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개인 운운하는 부분이
선조의 기억을 유전해 받았다는 소재와 조금 비슷하지 않나 싶기도 하거니와,
액자의 테와 같이 빠져나가는 결말부 정도가 제법 유사해 보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뒤의 해설을 보면 이는 4.19를 이은 5.16에 대한 절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으나 중간에 나오는 시나 '4월'에 관한 서술 등이 과연 그럴지도 모르기는 하겠다.

후루룩 읽기엔 나쁘잖았지만 영양가가 높다는 생각은 굳이 들고 싶지 않았던 소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에 달린 댓글들

게르마늄

이문구, 관촌수필

소설가 이문구의 대표작인 관촌수필이야.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영화감독 박찬욱 여러 인터뷰에서 자주 추천했던 책이어서야.
아마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관촌수필을 그야말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면서 자기가 너무 아끼는 책이라고 얘기를 하더라고.
특히 공산토월을 읽으면서는 자기도 어찌나 울었는지 모르겠다면서.
나는 박찬욱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이름을 날린다는 예술가를
그렇게 울렸다는 소설이라니 관심이 갈법도 한 거잖아?

호기롭게 구입한 책이건만 읽기에 녹록한 것은 아니었어.
이문구는 소설어 사전이 나왔을만큼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는 소설가이다 보니
이게 '소설 읽듯이' 후루룩 읽히지가 않는 거라. 아무렴 옛 소설을 읽다 보면
까끌까끌 해석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문장들과 마주치곤 한다지만
아 이거는 정말 심하더라고. 정말 읽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던 거야.
하여 한 번은 읽어내야겠다 하는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방식이었지. 이짓을 책 전체에 했는데
하면서도 이거 참 무식한 짓이다 속으로 몇번은 되뇌였는데, 어찌나 귀찮고 품이 들던지 원;
여하간 이런식으로 부득부득 풀이해가며 읽었던 소설이건만
이렇게 읽어내려니 맛이 맛이 아닌 거라.
그랬던 게 몇 년 전 일인데 요번에 문득 눈에 띄길래 이거 이번에는
조금이나마 편하게 읽겠구나, 하는 마음과 그러니만큼 좀 더 음미를 하면서 읽겠구나,
어휘에 치이지 않고... 하는 기대가 있었지.

이 책은 작가인 이문구가 72-77년 동안 발표한 단편 여덟개를 묶은 소설집이야.
배경은 작가의 고향이라는 충남 대천의 관촌 마을이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 '나'가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야.
내가 이문구 씨의 전기에 대한 정보는 사실상 전혀 없으니 이 연작이 자전적일 것이라
기대할 따름이지만, 아마도 허구 또한 조금씩은 섞여 있을 테지.
그렇다고 허구의 비율이 어느 정도일까? 라고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로서 형상화한 관촌이란 공간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거야.

이 소설은 70년대를 사는 작가가 자기 고향을 다시 찾으면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나,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 어떤 사건들 등을 회상하는 형식이야.
(뒤의 세 편인 관산추정, 여요주서, 월곡후야는 '현재'의 이야기지만)
작가는 그런 그리운 장소와 시간을 떠올리며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아갔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해.
그러면서 이 관촌이라는 향토적 공간이 일종의 아련한 이상향으로 그려진다는 느낌도 살짝 받을법 한데
책의 말미에 권성우의 해설에서도 이 주제를 루카치가 말한 그리스 문화의 충만함과 연결시켜보려 시도해.
그러나 글쎄... 내 생각에는 이 부분은 따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락서산 - 관촌수필 1
말미의 작가의 말에 따르면 연작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기소개가 맞겠다고 생각했다네.
신정을 맞아 할아버지의 성묘를 하러 고향으로 내려온 작가가 풍경을 보며 떠오르는 소회를 서술하고 있어.
도입부터 양놈들 신년을 쇠는 일이 다 뭐냐고 역정을 내던 분이었건만, 신정을 타서 성묘를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묻어나고 있지.
더하여 작가는 선조인 이지함이 꽂아놓은 지팡이에서 잎이 돋아나 큰 소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다는
동네의 명물 왕소나무가 베어져 사라진 걸 보고 그야말로 '타락한 동네'라고 읊조리기도 해.

41년생인 이문구는 토정 이지함의 후예인 모양이야. 그래서 지체높은 양반가라는 의식을 가진 할아버지에게
어릴때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아서 주변의 상놈들을 하대해도 으레 그런 줄 알면서 사는 소년이었다고도 하네.

연작에 실린 단편들 모두 사실 그다지 서사라 할만한 게 없다시피 해.
굳이 말하면 서사보다는 묘사 위주의 소설이라 해야될 것 같네. 이런 풍경, 저런 인물, 자그마한 사건 등등...

소설을 읽어보면 뭔가 이상한 것이 이건 자신의 유년기를 서술하는 소설인데
아버지의 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거든. 찾아봤더니 이문구의 아버지는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한국전쟁기에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고 나오더라고.
거기다 이 소설에는 형제자매의 이야기도 하나 나오지 않는데 두 형이 또한 아버지처럼 처형당했다고 하네.
비단 작가의 아버지 이야기 뿐 아니더라도 이 소설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한국전쟁이 가져온 슬픈 사연들이 많이 등장해.

여하튼 이 편에서 아버지의 이야기가 잠깐 나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조하는 것이 이 단편의 주요한 점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작가는 여기서 가정에 무심했던 아버지의 모습이라던가,
당시에는 '위험 분자'로 찍힌 인물들은 예비 검속이라며 그냥 감옥에 가두기도 했던 모양이지?
그런 옥고를 견디고도 의연했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오히려 거리감을 느꼈다던가,
작가 본인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아버지와의 자그마한 사건이라던지 등등을 근거로
아버지에게 크나큰 거리감을 느꼈다고 토로하고 있어.
그리고 그런 만큼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경외심이 컸다는 고백을 하고 있기도 한데
실제로 바로 첫 페이지에 "내가 그리워해온 선대인은... 그분 한 분만이 진실로 육친이요..."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거든.

부친의 좌익 활동을 연좌제 삼으려는 사람들이 과연 대단했으리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일락서산은 할아버지의 대한 존경심을 담은 단편만은 아니리라고 짐작해봄직도 하겠지.
나는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의, 전통의 편에 섭니다. 라는 고백 아닌 고백이라고 읽을 수도 있을 거야.
여기서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내가 읽은 책의 54쪽에 보면 작가는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전통적 의식이 의미마저 무가치하게 여겨진다고 말하는 부분이야.
전통에 무의미함을 느끼지만, 그런 의식의 화신이었던 할아버지에게는 경애를 느낀다는 말은
단순히 보면 그저 사람의 정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묘한 느낌을 주는 데가 있지.


화무십일 - 관촌수필 2
여기서는 윤 영감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어.
동란 틈에 피난왔던 윤 영감의 가족에게 들이닥친 비극을 관찰한 작가가
그를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는 이야기야.

여기서 윤 영감의 아들인 윤학로는 징집을 피해다닌 청년이거든.
그에게 크나큰 불행이 닥쳤다는 건 과연 작가가 경험하고 관찰한 바를 서술하기만 함일까?


행운유수 - 관촌수필 3
여기서는 작가 집에서 안머슴 노릇을 하던 옹점이라는 여성을 주로 다뤄.
옹점이는 화자인 나에게 말하자면 나이 차 조금 나는 누나 같은 인물이야.
인정넘치고, 남을 항상 보살펴주고, 챙겨주고, 티격태격 할 때도 있지만 져 주기도 하고...
내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 어디서 났는지 카라멜을 가져다가 입에 넣어 주기도 하고.

중간에 작가는 회고조의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에 갑자기 현재로 돌아와서는
근래에 유행하는 주체성이니 주체 의식이니 하는 말이 자기는 참 마뜩잖다고 하거든.
이 또한 '외래종'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나쁘지는 않겠지.
오히려 이런 속 빈 강정같은 말잔치보다는 본인의 행동으로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작가는 옹점이가 본인의 인생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주체적인 인물이라고 공언하기도 해.

그런 옹점이도 다른 집에 시집을 갔다가 동란 중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게 돼서
남편 잡아먹은 년이란 소리에 구박만 받다 결국 약팔이 일행에 떠돌이 신세가 됐다는 내용으로 끝이 나는데,
본인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남긴 소중한 사람마저 그런 식으로 잃어야 했다는
당대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는 셈이기도 하지, 이런 내용은.

관심이 반짝 갔던 내용이 있는데,
옹점이가 시집살이하던 집에서 고추가루와 마늘을 넉넉히 써서 김치를 담갔다며 구박을 맞는 내용이 있거든.
한국인이 세계 기준으로도 고추와 마늘을 그렇게 먹는다고 하더니
당장 5,60년 전에는 이런 사정들이 있었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고추나 마늘을 많이 쓰는 식문화는 그런 식재료가 풍족해지고 난 뒤에
'우리 집도 부잣집처럼 이렇게 해 먹는다'는 일종의 과시적인 형태가 굳어지게 된 건 혹시 아닐까?

여하튼, 이 인물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렇게 순박하고 속없지만 남을 위하는 인물상이 소설에 많이 등장해.
그건 이제는 없는 시골의 따뜻한 사람들을 형상화하는 것이기도 하겠고
작가가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읽으며 마음이 푸근해지기도 하네.


녹수청산 - 관촌수필 4
작가가 따르던 동네 청년 대복이의 이야기를 여기서는 하고 있어.
이야기가 반분되는데, 초반부는 대복이나 그 어머니와 함께 부대끼며 지냈던 작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특히 대복이와 이곳저곳 쏘다니며 짐승들 잡으며 놀고 장난치며 놀았던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동네 망나니 취급을 받던 대복이가 기어이 삐뚤어져서 안하무인에 도둑질까지 일삼으면서 다니다가
결국 잡혀들어가기까지 하는 이야기야.

그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내용은 참봉집 규수였다는 순심의 이야기인데,
군산까지 유학을 했던 지모겸비의 아가씨였으나 이 처자가 도시 물을 먹더니
고향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좌익 활동을 하게 된 거였어. 그러다 어느 날 대복이가
강간 미수 혐의로 잡혀 들어갔다 나온 거야.
국군에게 마을이 수복된 이후 대복이가 빨갱이 척살을 외치고 돌아다니니 참봉집이 벌벌 떠는 거지.
그런데 대복이가 대뜸 참봉집에 머슴살이를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게 되고...

대한민국의 형성 자체가, 그리고 한국전쟁의 경험이
남한 땅에서 좌익 비슷이라도 했던 건 그야말로 일소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여기서도 좌익 활동을 했던 인물에게 커다란 비극이 찾아오고야 말았지?
심지어 결말부를 보면 마치... '범죄자가 도망쳐서는 안 된다'던 범죄영화 장르의 검열 클리셰까지 조금 떠오르고.
이건 자연스러운 사실의 서술이기도 하겠지, 역사가 그랬을 테니. 그러나...


공산토월 - 관촌수필 5
이 단편은 박찬욱이 읽고 이렇게 펑펑 울었다는 편이야.
아... 나도 이걸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뿐은 아니겠지만
연작 중 최고작이라고 여기게 되네. 여기서 소개하는 인물의 됨됨이와, 그의 마지막이 워낙 가슴 절절하게 느껴져서...

단편이 조금 희한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초반에는 웬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
영화 [대부]에 관련하여 이런 폭력적 영화를 개봉해도 괜찮은가 하는 찬반이 있었나봐.
작가에게 찬성 편에 서서 글을 한 편 써달라는 청탁이 오는데 그 근거가 냉혹한 면이 있다는 평가가 있어서라나?
거기에 기막혀 하면서도 과연 내가 그런 면이 없다고만 할 수 있겠나... 하며 회상으로 들어가는 글의 구성이지.

주인공은 신현석, 본인이 돌을 좋아했기도 하지만 천생 돌처럼 우직했던 사람이라 석공石公으로 불렸다는 사람의 이야기야.
이 인물의 소개를 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형태의 혼례식을 묘사하고 있기도 해.
작가에게는 그곳에서 본인의 아버지가 신명나게 노시는 모습을 보고서 감명을 받았던 기억도 있는 듯한데
그런 풍경이 작가뿐 아니고 마을의 모두에게도 충격적이고 의심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인 광경이었던 모양이야.
그 이후로 석공은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외경이 더욱 깊어져서 그렇게 위할 수가 없었다는 식인데
작가 부친의 옥바라지에 정성이었고 그를 빌미로 같이 잡혀 본인도 옥살이에 고문까지 겪었다는 내용이 나오네.

그러다 전쟁기에 인공 치하의 짧은 시기에 석공이 잠시 면청 서기로 발탁되는 일이 생기고
국군의 수복 이후 그 때문에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됐다는 내용이 이어져.
그 이후로 고문과 형무소 생활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몸이 망가졌음에도
그야말로 형무소에서 못한 일 다 하겠다는 듯이 묵묵한 소처럼 내남없이 마을 대소사에 열심이었다고 하네.

그러다 채 40도 채우지 못한 어느 해에 그가 갑자기 쓰러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며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작가는 가족처럼 가까운 이의 일이니 밤낮없이 그를 보살피는 거지.
백혈병으로 투병하는 석공의 마지막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는데,
나는 살아야만 한다고, 논답 다 팔아서라도 살려달라며 부르짖다가도 퍼뜩 자식들 생각에
자기가 죽고 만다며 번갈아 체념하는 모습을 보면 한번씩 울컥울컥 치밀어오르는데,
심지어 이대로 죽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런 자기희생적 인물은 문학을 읽으며 자주 볼 수 있지.
문학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기에 오히려 이런 인물형은 진부할 때가 있어.
좋은 것은 반복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진부해지는 것이 아닐까?
현실에서 보기 힘든 인물형이기에 오히려 관념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석공의 저 삶을 향한 절규가 굉장히 와닿더라고.
그저 소같이 묵묵한 인물형을 그리고 말았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이긴 했겠지,
그러나 저 절규 때문에 이 인물은 현실감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고,
'나'가 있는 인물이 너나없는 희생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더욱 큰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거지.
개인적으로 관촌수필을 읽으면서 아주 입맛에 맞는 글이라고는 차마 못 느끼겠음에도
공산토월의 후반부는 읽을때마다 가슴이 저릿, 하네.


관산추정 - 관촌수필 6
이 편부터는 관촌과 작가의 현재를 그리는 내용이 나와.
엄밀히 따지면 공산토월부터 작가의 현재의 삶을 그리는 것이긴 하겠지만
이 이야기부터는 현재의 이야기가 도입이나 액자의 테로서보다는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것 같아.

여기서는 작가의 또래 친구였던 대복이와 대복 아버지인 유천만을 주로 그리고 있어.
대복 아버지가 일이라고는 전혀 손에 잡지 않는 한량이지만, 여기서기 쏘다니며
마을의 자질구레한 일은 도맡는 인물이었다는 내용이 나와.
특히 마을에서 여우 우는 소리가 들리면 재수가 없다며 장정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와서 쫓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서 앞장서는 인물이었다고 하네.

재미있었던 장면은 284쪽에 작가가 쇳도막이나 양철조각을 훔치곤 했다는 대목이야.
양반집 자제로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하던 할아버지라던가,
미군이 던져주는 음식따위 절대 먹지 말라고 하던 옹점이의 역정을
기껍게 받아들였다고 서술하던 작가 이문구의 모습이건만
여기서는 여느 마을 개구장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문득 나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인데
무심코 이런 서술을 했던 거라면 작가가 직조한 그의 어릴 적 삶은 어떤 잣대에 맞춰서
재구성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따라서 슬그머니 드는 거지.
이 한 줄에서 그만 아차, 하고 본심이 나왔던 건 아닐까 하게 되는 거야 ㅋㅋㅋ

그런가 하면 이런 장면도 있어. 눈병이 났던 작가를 보고 작가의 할아버지는
살 없는 방향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집에 못을 박은 일이 있으니 아이의 눈이 상했다고 하거나
팥을 쥐고 주문을 외면서 눈을 비벼주기도 하는데
이어 작가는 복산이네 가서 그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짧은 동물 뼈를 매달아줬다고도 해.
작가가 그리는 관촌은 이런 주술이 통하던 세계인 거야.

또한 작가가 붓글씨를 대단히 귀찮아 했다는 서술이 나오기도 하는데
당장 일락서산에서는 아버지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고는 홀로 열심히 붓글씨 연습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거든.
이건 모순적이라고까지는 못하지. 싫지만 열심히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작가가 연작의 초반부 단편들에서 말한 내용과 조금 부딪친다는 느낌을 받는
서술들이 이 단편에서 엿보이게 되니 어떤 일이었을까? 갸웃 하게 되기는 하지.

단편의 마무리는 현재로 돌아와 장성하여 처자식까지 둔 복산과 만나 그의 집에서 하루 묵는 이야기로 맺어져.
나들이객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이야기나,
반가웠던 도깨비불들이 사실 낚시꾼들이 켜놓은 불이었다는 이야기,
관광객이 들판에 버리고 간 콘돔을 먹고 속이 꼬여 돼지들이 죽어버렸다는 이야기,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나버려서 잠복 형사가 근무하는 데 복산이가 라면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러 가야 한다는 이야기 등
관촌의 옛날과 지금의 대비를 선명하게 그리고 있어.


여요주서 - 관촌수필 7
이 단편도 작가의 고향 친우 신용모가 겪은 조금 안타까운 사연을 그린 이야기인데
동네 아이가 꿩을 잡아다 팔려고 하길래 본인이 나서서 좀 흥정이라도 잘 해 주려다가
보호동물을 팔려 했다며 연행돼서 결국 재판정에까지 서게 된 그의 사정을 작가가 관찰한 거야.
여기서는 아예 '옛날'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지.
꿩 따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았던 옛날과는 달리 삭막해진 지금의 인정을 그리려던 걸까?


월곡후야 - 관촌수필 8
김희찬이라는 친우가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그 아들 수찬이가 조금 수상쩍인 일을 벌이는 듯 하여 작가가 함께 지켜보는 게 주요한 골자야.
열네살 먹은 순이라는 아이가 사나운 개한테 놀라 자빠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 통에 낙태를 하게 돼서 마을 사람들이 대경실색한 거지.
범인이 누구냐 하던 끝에 결국 두 해 전에 귀농했다던 김선영이란 인물이었던 거고
그가 나름 수를 써서 당국의 처벌을 피하는 눈치가 되다 보니 마을 청년들이 그를 잡아와서
린치를 하려고 했던 거야.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렇게 잡아온 김선영을 가운데 두고 청년들이 놓는 으름장인데
그 중에 국민교육헌장도 모르니까 그런 못된 짓을 했다는 말이 있거든.
혹은 우리가 지역 사회 발전과 근대화를 위해서 발벗고 나섰다고 말하는 대목이라던가.
박정희 시대는 혹시 당시를 살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시해주고,
그걸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의식을 함양해 줬던 시대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이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
이 장면에서 몽둥이를 들고선 코 큰 척 하는 청년들이 바로 지금
50,60대들인 셈이고 그들의 소위 '꼰대질'이나 좀 더 심하면 '박사모'짓들이 저런 경험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으니까.
그런 일면을 엿보게 하는 장면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자부심일 수 있었겠구나,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가 상명하달식이기는 했으되 민중의 차원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기도 했구나, 하는.


이로써 관촌수필 독서 후기는 대강 마무리인데,
마지막에 하고 싶어서 남겨 놓은 이야기가 하나 있지.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서는 여러 대비가 나오거든.
이는 전통과 근대, 시골과 도시 정도의 대비로 추려보면 되겠지.
그 중에서도 작가는 푸근한 정이 남아 있던 시골과, 그곳에서 지켜지던 전통을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것 같아.
하여 이 소설에서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야.
당장 내가 읽은 책 말미의 해설들이 그렇고 이 책을 추천한 박찬욱도 한국의 전통적 공동체상을 그렸다는 식으로 말했지.

그런 방식의 작법과 독법은 사실 이 텍스트가 작가의 직조물이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거든.
너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쓴 것이지? 라는 질문을 던지니 그런 대답이 나오는 거야.
그런데 동시에 이 소설은 작가가 자신의 유년기를 회상하며 쓴 자전적 기록이기도 해. 제목의 '수필'은 거기서 연유하겠지.
이 텍스트는 적어도 이중의 지위를 가진 바, 한쪽 면만 보는 독법이 온당할까? 싶어지기도 하는 거지.

만일 이 소설이 개인적인 체험의 기록일 따름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
작가가 그리워하는 인물들과 풍경들이 사실은 이 책을 읽고 있던 나에게는 그렇게 푸근한 것만은 사실 아니거든.
조명도 어두컴컴하고 땟국물이 질대로 진 부엌의 풍경이나
쉰 막걸리에 똑같이 쉬어 빠진 열무김치나 우적우적 씹는 술자리의 모습,
갯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즐겁다고 깔깔대는 아이들이 모습,
아마 할아버지를 찾아온 나이든 사람들 군내를 견디기 힘들었다던 작가의 어머니의 한마디도 있지만
얼마나 쉰내 풀풀나는 사람들이었겠어?
거기에 이름도 모르는, 이미자보다도 더 윗세대의 가수들이 불렀다던 창이라던가 등등.
단적으로 말하면 내겐 불편하고, 더럽고, 심지어 흉한 것들이지.
내게 그리운 풍경은 오히려 80,90년대의 풍경들이야.
치토스 먹으면 따조 나오고 그런 거 있잖아. 문방구에서 꾀돌이 사먹고.

읽다보면 심지어 작중에도 드럼통이니 전봇대니 전깃줄이니 철로니가 등장해.
사실 이문구가 그려낸 관촌의 풍경은 의외로 이미 근대문물이 침입해있는 공간이야.
오히려 40년대에는 너무도 당연해 그릴 수 없었던 풍경들이 문득 30년 가량의 시간이 지나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그려진 풍경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지는 거지, 나는.
요컨대 이건 70년대를 살던 작가가 문득 사무치게 그려낸 응답하라 1940같은 거야.
40년대라고 특정해버리니 뭔가 묘해지지? 전통적 이상향을 그리기에는 그렇게 옛날도 아니라는 느낌이잖아?
아마 그 30년 정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립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그러니 오히려 작가가 비판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들조차 오히려 내게는 낡은 것으로 다가올 때,
또한 예를 들어 8,90년대에는 작가가 그린 '현재'가 누군가에겐 추억으로 회상하는 '과거'가 되어
그것을 누군가가 또한 윤색해서 그리기도 했다면, 결국 내가 읽는 건 작가의 '그리워한다'는 행위와 그 정서인 거지.

소설을 논하면서 가장 중요한 점을 아직도 이야기하지 않았지.
이 소설의 문체는 다채로운 어휘의 구사로 요약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위에서 내 입맛에 썩 맞지 않는다고 했던 것도 이것이 큰 연관이 있어.
어찌나 읽으면서 심상에 브레이크가 걸리는지; 외국어 원서를 읽는 기분이 다 드니까.
나는 그런 생각도 들었어. 이 까끌거리는 문체야말로 소설이 그리고자 하는 전통에의 동경을 곧바로 체화한 것들이거든.
이를 못내 편하게 읽을 수 없음이 곧바로 그 전통적 풍경이 와닿지 않는 나의 모습과 연결된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러니 온전히 개인적인 텍스트라고만 하면 내게는 사실 전혀 감동적일 게 없는 소설인 셈이야.
암만 전통이니 농촌이니 해봐야 무슨 소용이람? 내게 와닿지 않는걸.

그러니 이 텍스트를 그저 작가 개인의 체험을 그린 것이라고만 봐서는 안 될거야.
이 개인적이고도 개인적인 내용들을 우리는 왜 읽을까? 거기서 어떤 보편성을 끄집어내려는 생각이 있어서 아니겠어?
그렇다면 거기서 어떤 의도를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든.
바로 위에서 적었지만 소설을 나는 하나의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은
나는 맛도 모르는 가재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가재를 잡느라 친우들과 뛰놀던 기억을 회상하며 마음 한켠이 저리는 경험이거든.
이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거야.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소설이 이렇게 자전적 기록과 허구적 구성물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었어.
지나간 것 그리워지기 마련일 따름이니...

2017년 6월 5일 월요일

장승진·프랙티쿠스 연구팀, 나는 더 영어답게 말하고 싶다 구동사편

음 드디어 네번째 권까지 2회독을 마쳤다.
그치만 스피킹 연습이라고 해봐야 짬짬히 책 펴서 입으로 소리내 읽고
표현들 머리에 담아두려고 좀 끙끙대는 게 전부이다 보니 결국
스피킹 실력이 그닥 느는 기분은 전혀 아니라 답답하긴 하네.
결국 연습을 해봐야 하는 거고 투입한 시간이 정직하게 드러나는 법인데
말하기는 연습의 절대량 자체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이런 책 읽어가면서 자기기만 하는 것도 한도가 있게 되네... 음;

여튼, 책을 펼치면 바로 느껴지는 건 이전 책들과 글씨체가 조금 달라졌다는 거야.
나는 그런 부분에서 일관성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약간 거슬렸네.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배울 때 관사와 전치사가 가장 골치라고 하지?
우리말에 없는 개념이라서 와닿지가 않으니 더 그런 것 같아.
그러니 구동사도 머리를 싸매게 하는 개념일 수밖에.
어차피 구동사의 맥을 뚫는 신묘한 법따위야 있을리 없고
이 책은 유의미한 구동사를 200여개쯤 추려서 예문을 곁들여 설명하는 정도의 책이야.

어디가 특출나게 거슬린 건 사실 없었는데,
전반적으로 표현의 선택이나 예문의 질이 조금 별로라는 인상을 받았어.
혹은 구성이 조금 무의미하게 반복적이라는 느낌도 많이 들었는데
예를 들어 50쪽 근처에 전화와 관련된 표현들을 나열하거든.
이것들이 몇쪽에 걸쳐서 독립된 표제로 나와야 할 표현들인가 좀 의심이 가기도 하는 것이...

이전의 세 권은 사서 읽은 게 아깝다고 생각 안했는데
이 책은 좀 도서관용이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

2017년 6월 3일 토요일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이 책은 여기, 독갤에서 보고, 알고, 읽게 된 책이야.
누군가가 자기 책장샷을 올렸고, 거기에 이 책이 있었고, 아마 한경님이 이 책에 대한 코멘트를 간단히 하셨어.
내가 한국현대사에 아주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중앙정보부 비사라는 게 흥미를 자극했지.
제법 두터운 책인데, 내용이 어려울 건 전혀 없고, 오히려 소설식으로 술술 읽히는 책이었어.
아마 신문에 연재했던 내용을 묶어서 나왔던 책을 12년에 개정해서 출간한 모양이야.
대충 찾아보니 나름대로 고전적인 지위를 부여받은 저작이라는 모양인데.

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사실 한마디로 말하면 "더럽고 치사하다"야.
세상에 그 뒷공작에 뒷공작들이 더럽고도 더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인데
그 쓰레기더미 위에서 왕관을 쓰고 있던 게 박정희였던 말인가? 하는...
박정희가 독재자고 박정희 18년이 군부독재였다는 건 상식선이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지탱되었다는 세부를 엿보게 되는 건 또 신선한 충격이었네.
새삼스레 이 땅에 뿌리내린 민주주의가 참 자랑스러운 거였구나 하게 되더라고.
저런 막강한 힘을 저렇게 치졸하게 사용하던 인물들과 집단이 군림했는데도
거기에 맞서 싸우고, 이겼던 사람들이 있었구나, 하게 돼서.

요즘 느끼는 건데, '역사'라는 게 참 오묘해.
역사란 꼭 책에 기록된 거창한 일들만은 아니거든.
모든 역사는 누군가에겐 동시에 일상이었을 테니까.

여기 쓰여 있는 일들은 물론 당시에는 정부의 고위층만이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었겠지만, 여기서 서술하는 폭력들이 얼마나 낙수되었을지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어쨌든 나 어릴때까지만 해도 당장 군에서 의문사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학교에서 선생들이 학생들 빠따질하고 귀싸대기 올리고 그런 일들이 아직도 채 없어지지 않았었거든.
당장 논산훈련소 인분 사건도 고작 2005년 일이니. 시대의 그림자가 길지.

뭐 박정희 시대가, 중정이 그런 폭력적인 시대의 모든 책임을 안았다고는 생각 못하지.
당장 이 책 1장에도 중정에는 일제 앞잡이 고문기술자 같은 이들도 모여들었다는 내용이 있었으니.
그런 경향의 확대 재생산에 분명한 일익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
저자의 표현이 좋은데 그야말로 무뢰배들이 모여들어 온 양산박이나 다름없었다는 서술을 하고 있네.
여하간 꼴뚜기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고 대통령이 총칼을 기반으로 집권하고, 그 아래 수하들이 그 위세를 업고
뭐 예를 들어 남의 멀쩡한 기업 강탈해가고 그러던 때이니...
얼마나 억울한 사연들이 많았을지 하나만 보고도 열을 헤아리게 되는 거지.
이렇게까지 말하면 비약이겠지만 저 하층의 좆도 없는 소시민조차 군대 가서 몇개월만 있으면 아랫것들 줄빠따를 때리고
재수없으면 실수로 사람 죽이기도 하던 때였던 거 아냐.
그런 시대를 일상으로서 살았던 사람들은 여기 실린 이야기들이 경악스러움 보다는
그저 자기 인생의 한자락을 회상하게 해 주는 흥밋거리일 뿐일까? 문득 궁금하네.

여하간... 책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중정의 역사를 훑는 거야.
김종필이 중정을 세우는 61년부터 박정희가 암살당하는 79년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시간순으로 굵직한 사건들과 그 사건에 어떻게 중정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대강 다루는 형식인데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씩 서술의 시점이 옮겨가기도 하고.
윤필용 사건을 서술하면서 강창성과 하나회의 악연같은 걸 서술하면서
12.12 이야기를 살짝 곁들인다던지 그런 식이지.

중정은 시작부터 국내 정치에 관여하려는 뚜렷한 목적이 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어.
박정희의 혁명공약은 사회혼란이 사그라들면 권력을 민간으로 이양하겠다는 거였거든.
그런데 현실은 자기가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돼서 그 권력을 받는... 자기가 자기한테 받는? 전개였지.
그 과정을 돕기 위해 온갖 공작을 벌이는 목적의 집단이 중정이었다는 내용이 나오네.
1대 중정부장 김종필이 공화당 창당을 위해서 주가조작을 감행한다던가...
ㅋㅋㅋㅋㅋㅋ 이게 도둑질이지 뭐야? 첫 단추부터 구린내가 풀풀 나는 거지.
중간중간 야당인 신민당의 국회의원들이 정권에 거슬리는 소리 하면 희한하게 감시가 붙고,
사고가 나고, 빨갱이로 몰고, 아예 정보부 요원들이 납치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뭐 여튼 책 내용을 따라가면서 설명하는 건 큰 의미가 없겠고...
읽으면서 느꼈던 점 몇 가지만 대강 말하자면

꽤나 경악하면서 읽었던 구절은 71년 대선에 쓰인 박정희 측 정치자금이 당시 국가예산의 10% 이상이었다는 내용이었어.
도둑질이라고 하면 이게 진짜지. 이런 대도가 어디 있어?
그 돈이 어디서 났을지 생각해보면 나는 혐오감이 느껴지는 거라.
박정희의 경제발전 신화는 내가 판단할 깜냥이 전혀 안되지만,
흐루쇼프가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했지.
소련은 스탈린이 있어서 독소전쟁에서 이긴 게 아니고 스탈린이 있음에도 이긴 거라고.
글쎄...?
도둑질을 하면 박정희만 꼴랑 하고 말았겠어? 망둥어도 뛰어야 할 거 아냐.
실제로 책에 6대 중정부장 이후락이 후에 그런 말을 했다고도 나오고.
"떡을 만지다 보니 떡고물이 손에 묻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고.

중정 5대 부장 김계원(이사람 작년에야 죽었더라; 명도 길지)때 정인숙이란 여성과 관련된 스캔들이 있었나봐.
그 여자를 보호해준다는 명목인지 일본 폭력단 계열 인물인 정건영이란 인간이
외환은행에서 돈을 당시 100억도 넘게 빌렸다는 내용이 있거든. 이게 나랏돈 아냐?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와의 연으로 그렇게 됐다는데, 이것도 웃기지도 않는 일인 거야.
죄 도둑놈들이잖아.
'높으신 분들' 오입질 쉬쉬하는 데 그 인력과 재원들이 낭비되었다는 건데 참...
심지어 저 정건영이 빌린 돈으로 벌린 사업 때문에 외환은행에서 계속 이자 명목으로 돈이 새어나갔나봐.
그걸 막으려고 77년에 재무장관이 뭐 저당잡힌 사업을 인수해서 부도처리를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혹여 암살당할까봐 그 인물은 일본쪽으로는 가지도 못했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삼스레 참 나라라는 게 내 생각만큼 쫀쫀하지 못하구나 싶더라.
어디 굴러다니는 폭력배 따위가 국가 요직에 앉은 인물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읽으려니까.
하기는 김형욱도 그렇게 비명에 갔다고 하니... 세상 새삼 참 무섭구나 싶기도 해.

얘기가 그렇게 되면 김대중 납치 사건도 참 대단하더라.
국가 기관에서 독재자에게 눈엣가시같은 인간이라고 냅다 납치해서
죽여버릴 궁리를 했었다는 게 참 ㅋㅋㅋㅋㅋㅋㅋ 그 무분별한 폭력의 강도가 말이지.

그게 6대 중정부장 이후락이 벌였던 일이라는데
중간에 이후락이 일본 대사관에서 일할 때 근처에서 즐겨찾던 초밥집의 초밥을
청와대까지 공수했다는 내용이 나오거든. 이것도 참 기가 차더라.
그렇게 똥꼬를 빨아대는 인간이나 빨라고 엉덩이를 대주는 인간이나.
내가 이런 내용까지 읽어야 되나? 싶어지더라고.

육영수 여사 피살 이후의 내용에서 박정희가 대단히 슬퍼하는 내용들이 나오거든.
그럴 수 있지. 개인으로서 슬픈 사건이었을 수 있어.
그러나 뭐 자신이 거사를 치루고 운영하느라 집안을, 특히 부인을 돌보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서술이 있던데 음... 나는 왜 여기서 코웃음이 자꾸 나오는 걸까.
본인의 무리한 집권과 권력욕으로 인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고문실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받았던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인데, 그것은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단 걸까?
그렇다면 박정희 개인의 마음 속에 있는 그 대의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다보면 기본적으로는 중정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 박정희라는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아.
그러나 어쨌든 박정희 정권을 뒷받침하는 버팀목이었으니 박정희 개인은 꼭 그림자처럼...
그보단 중정이 박정희의 그림자였겠고, 그 그림자의 이야기를 하려니
그림자의 주인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만, 이따금씩 자기 존재를 드러낸단 말야.
10.2 항명 파동때 대노했다는 내용이라던가 등등 말이지. 국정을 뒤에서 조종하는 정보부의 이야기라
은근슬쩍 대한민국의 역사는 일종의 충성과잉이 빚어낸 비극들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지만
어떤 사건, 어떤 폭력들은 박정희로부터 하달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건들도 제법 되어 보이거든.

내가 받았던 인상은 이거야.
박정희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혹은 칼을 손에서 놓기 아쉽기도 했을 테고.
내가 읽으면서 경악했던 내용이 있는데 유신을 선포하려고 준비하던 과정에서
미국의 닉슨 행정부나 일본의 대 중국 유화 정책이 유신 선포의 근거라는 걸 빼라는 압박을 받고
"뼈 없는 어묵"(심지어 이것도 일본어로 읊조렸다고)이라고 혼잣말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당시에는 북한과의 체제경쟁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살결에 와닿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 상황에서 대단히 의존하고 있는 우방국 둘이 중공과 데탕트 무드를 연출하니 이게 불안으로 작용하고,
불안한 사회는 혼란으로 이어지고 혼란한 사회는 북한에게 잡기 쉬운 덜미가 되니
철권을 휘둘러야만 한다는 판단이 유신으로 이어졌다는 게 나름의 논리였던가 봐.

물론 책에서는 그런 해석도 있어. 이후락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후
외부의 위협을 근거로 해서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이 꽤나 구미에 당겼을 수 있다는 거야.

허나 어찌되었건, 간간히 등장하는 박정희는 마치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나는 읽었는데, 이게 참... 모르겠어. 전여옥이 박근혜를 평하길 뭐 대통령이 가업이라는 식이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정말 한 나라를 그렇게 철권으로 다스리는 게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과연...
민주화된 사회에서 사는 내 눈으로 읽게 되었기 때문에 더 그게 불가해하고 불쾌할 수 있을 테지만...
정말 이 인간은 자신이 말하자면... 악한? 독재를 한다는 의식이 없거나,
혹은 이것은 필요악이다. 내가 악역을 짊어진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국정에 임했던 건가?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건 '박정희'가 할 수 있는 사명이요 임무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오른 인간이 박정희였을 뿐이고, 그렇게 흘러간 18년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역사로서
부여받아 버렸기 때문에, 기정사실로서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런 후광들이 나오는 것 같거든.
그러나 그 당시를 소위 일상으로써 살았던 인간, 개인 박정희가 본인을 그런 상으로 그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글쎄... 나로선 참 마음 한구석에 탄식이 흐를 수밖에 없더라고. 그 자리에 미련을 버리질 못하고
심지어 2인자를 키울 생각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런 개억지까지 부려갖고 3선개헌 후에 유신까지 하고,
전두환을 키운 것도 결국 박정희였던 걸 생각하면 말야.

뭐 일각에서는 전두환을 우상시하려는 사람들도 돋아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 인물은 그야말로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거든.
실제로 책의 서두에서부터 5.16을 성공시킨 큰 공이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였는데
이걸 기획한 자가 전두환이라고 나오고 있네.
읽다보면 우스운 게 전두환을 키운 게 박정희였던 것 같더라고.
박정희는 존중하지만 전두환은 독재의 마수다! 라는 이분법이 통하는 게 아닌 것 같아.
책을 읽어보면 뭐 그렇다고 박정희가 전두환 대머리가 반짝반짝 예뻐서 키워줬겠어?
그게 아니고 집권을 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다 보니 자기는 왕인데, 신하들이 기어오르는 걸 좀 막아야겠던 거라.
당장 김종필이 두고두고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듯 살았더라고. 견제에 견제를 어찌나 당하던지.
나는 어릴적 이미 3김이니 뭐니 거물 정치인 김종필만 봐서 정작 박정희 아래서는
그렇게 견제만 당하면서 시달렸는지는 생각도 못했어. 여하간...
육사 5기를 8기로 막고, 8기를 전두환이 속한 11기로 막는 식의 형국이었더라고.
나중 가서 전두환 집권시에는 17기의 불만을 기반으로 전두환 노태우가 집권했던 거였더구만.
그러니 결국 박정희의 그 권력중독 덕에 군부독재가 8년은 더 이어진 거잖아.
그런 쿠데타 행렬을 보고 "한국에는 대령 계급을 없애면 쿠데타가 사라질 거다"라고 한 미국인이 평했다는데
우습고도 쪽팔리는 일이지 싶네.

위에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지만, 박종규나 차지철같은 사람들이 딱 그짝이야.
박종규같은 경우는 고작 중사였던 인간이 줄을 잘 서서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의 역사에서
가장 서슬이 퍼랬다던 김형욱하고도 으르렁대던 사이라고 나오던데, 이 천박한 인간이 뭘 알면 얼마나 알고
뭘 하면 얼마나 알았겠어? 이런 무뢰배들이 떵떵거리던 시대였구나... 하는 착잡함이 난 많이 들더라.

예전에 들었던 한국 현대사 수업에서 교수님이 그런 말을 했거든.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회주의의 역사라고. 친일행적이 다만 보여주기 형식으로조차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 정도로
친일하던 인간들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
그 집단적 뇌리 한 구석에 '기회주의적으로 살아야 하는구나'가 각인된 거라고.
그런데 그게 꼭 일제강점기나 이승만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닌 거야.
고스란히 그런 천박한 인간들의 집권과 그 아래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살아갔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서 상세히 드러나고 있거든. 당장 지금 이름을 날리는 김기춘은 유신 헌법의 초안을 도맡았던 인물이더라.

진짜 어이가 없었던 건, 이게 신문 연재본이나 원판과 비교해서 어떤 추가가 이루어졌는 지는 내가 모르겠지만
여기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 살짝 있더라고.
원판에도 있던 내용이라 치면 당장 90년대 초에도 기자가 열심히 취재하면 알 수 있었던 커넥션이었다는 거잖아.
아무래도 현재와 연관된 내용이다보니 잠깐 지나치는 내용이지만 너무 화가 나더라.
그러고도 일각에 어떤 인물들을 최순실을 몰랐다느니 하고 있었단 말이지...; 음...

김재규는 근자에 대단히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이지. 뭐 그 재평가라는 게 주갤같은 데서
오오 재규어의 앞발터ㅂ 같은 형태로 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야.
의외로 이 책에서 김재규의 비중은 대단히 적어. 중정의 역사를 서술하는 게 주인 책이고,
중정 8대 부장으로서 김재규는 그다지 한 일이 많아 보이지 않더라고.
이미 박정희가 노쇠하여 판단력이 티미해졌는지 차지철 딸랑이 소리나 듣고 있었다는 식이다 보니
그에 밀려서 힘도 수완도 좀 부족한 중정부장이었다는 식으로 서술되더라고.
언젠가 김재규를 예찬하는 글에서 그의 임기시에는 중정에서 간첩조작사건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는 김재규가 좀 의젓한 선비 기질이 있는 인물이어서일수도 있지만 그럴 깜냥도 안되는 조직의 장이었던 건 혹시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더라.
여하간 저자는 10.26을 차지철과의 충성경쟁에서 밀린 후 고작 대위밖에 안되었던 인간이 자기를 하대하자
홧김에 그를 쏘고, 동석하게 된 박정희까지 쏘아 죽였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 같아.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김재규가 없었다면, 부마항쟁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지"라 했던 박정희라는데
광주로 인해 전두환이 8년을 해먹었다면 박정희가 부마를 찍어누르면 유신은 더 지속될 수도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김재규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만 할 수는 없는지도 모르지.
자지털이가 캄보디아 300만을 운운했다잖아.
더하여 김재규가 3선개헌을 지지해달라는 부탁으로 깍듯이 어르신으로 모시던 원로 정구영을 대하는 태도라던지를 보면
자기 나름의 원칙은 있었던 사람이었던 걸까? 싶기도 해.

대강 인상에 남는 내용은 이정도인 듯 하네.
아무래도 국회 내부의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한 내용들이 뇌리에 많이 남지는 않아.
흥미롭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건 전혀 아니지만. 내게 좀 더 살결에 와닿는 느낌이 없어서일까?

사실 굉장히 두꺼운 책이고
그런 만큼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종횡무진 등장하는 책이라
구체적인 역사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인상이었는데
이걸 가지고 후기를 대강 끄적여 보려니까 좀 두루뭉술~한 인상만 서술하는 글이 된 것 같네.
여튼 좋은 책이었어.

2017년 6월 1일 목요일

장승진·프랙티쿠스 연구팀, 나는 더 영어답게 말하고 싶다 문장만들기편

드디어 3권!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어다운 문장을 만드는 요령을 정리한 책이야.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한국어로는 이렇게 하고, 영어로는 그것을 저렇게 해야 자연스럽다...는 식의 대응을 두지 않고
영어권 화자는 아예 문장의 구성을 이렇게 한다...는 내용을 몇 개 추려서 설명하고 있어.

그러다 보니 어떻게 보면 설명은 추상적이게 되고
예문은 결국 조금 구체적이다 보니 감 잡기가 조금 애매한 경우도 있고.
이전의 책들처럼 슥 읽고 외울 수 있는 건 외워 보자~ 는 느낌이 조금 안 통하기는 해.

여하간 영어는 명사를 중심으로 말하는 편이고,
그래서 형용사를 잘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라던가
품사를 확장시켜서 말하는 것이 좋다던가
동사가 워낙 많다보니 우리말처럼 부사를 써서 말의 맛을 살리지 않고 그에 적합한 동사를 여럿 아는 게 좋다거나
보어에 관한 설명, 수동태와 능동태를 중 어느 것이 더 적절한 상황인지 가려보는 방식 등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제법 있어. 이런 내용은 내 기억으로만도 이 책만의 강점은 아니고
종래에도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책들이 몇 더 있기도 했지만, 뭐... 어차피 지나쳐 가는 책이니까.
반복한다고 더 나쁠 거야 사실은 없지.
오히려 대동소이한 책들을 여럿 읽으면 나는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게
지루한 반복이 되지 않으면서도 반복학습의 효과는 누리게 되거든.

신경쓰였던 점들.

15쪽에 He downed his coffee and went back to work라는 예문이 있어.
이건 내 생각에는 그가 커피를 급히 마셨다 정도가 될 것 같거든?
'커피를 내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가 된다고 설명하는데 이게 말인가 막걸린가?
오히려 우리말에선 커피를 내린다고 하면 마셔서 목구멍으로 내려보내다 라는 의미보다는
커피를 추출했다 라는 의미로 더 통할 텐데. 설명을 할거면 똑바로 해야지;
십중팔구는 저 해석만 읽고서는 뭐 문장의 주인공이 사무실 막내라서 커피라도 타나보다 하지 않겠어?

29쪽에 보면 brown-noser라는 표현을 가르치는데 이 단어는 내가 알기론
똥꼬를 핥아주다 보니 코가 갈색이 됐다는 의미거든?
근데 여기에는 구두를 핥다가 구두약이 코에 묻었다는 어원도 있다는 식으로 소개했더라고 ㅋㅋㅋㅋㅋ
상스러운 이야기를 안하고 싶었으면 차라리 그냥 넘어가지 이건 무슨 싶더라.

88쪽에 있는 예문을 보면
표제에는
Can you help me? I can't seem to pry open the lid of jam jar. 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그 아래 예문박스에는
I can't pry open the lid of the jam jar.라고 되어 있네.
문장이 거의 같은데 왜 위에선 jam jar이고 아래에선 the jam jar일까?
나도 소위 중급자 수준으로서 관사를 신경 안쓸 수가 없는데 예문이 이런 식이면
괜히 사람 헷갈린단 말야. 이러면 문제가 잘못 나온 문제집처럼... 조금 신뢰가 안 가게 된다고.
심지어 정말 잘못 나온 문제도 아래 쓸 거지만;

117쪽에는
sweep somebody off one's feet이라는 표현이 나와. 비유적으로 말해서 사랑에 빠졌다는 뜻인 모양인데
문자 그대로는 소위 공주님 안기를 했다는 의미인가 봐. 다리로 바닥을 쓸듯이 쓰윽 하고 안아 올린다는 거지.
예문에는 My fiance swept me off my feet when we met two months ago.라고 되어 있거든?
내가 그렇게 공주님 안기의 행위를 받게 되었고, 그러므로 내 약혼자가 나에게 반했다는 의미라는 건가?
그니까 이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 '안기'의 행위자와 그 행위를 피동으로 받게 되는 인물하고
그렇게 해서 사랑에 빠진 사람과 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조금 헷갈리는 느낌이 들어.
위의 예문대로 하면 공주님 안기를 한 사람은 약혼자(남자)이고, 당한 사람은 나(여자)이며,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약혼자이고, 사랑의 대상이 된 게 나인 셈인가?
근데 막상 설명에 보면 sweep her off her feet은 '여성이 남성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뜻'이라고 하거든?
그럼 사랑에 빠진 사람이 나이고, 그 대상이 약혼자라는 거야?
읽다 보니 뭔가 짜증이 막 나는데, 이런 거는 제대로 설명해야 되지 않겠어?
쓰는 당사자들은 머릿속에 제법 뚜렷한 그림이 있으니까 이렇게 대충 설명하고도 오케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124페이지에는 막간 퀴즈가 있는데
여기 1번 문제가 이래.

자식이 먼저 세상을 뜨리라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다.
Every parent expects to ______ their children.
1. outlive 2. live longer 3. liveout 4. alive longer

이거는 그 전에 다뤘던 표제어를 감안해도 답은 그냥 1번이지. 실제로 해답에도 1번이라고 되어 있고.
근데 그렇게 되면 예문과 해석이 일치하지 않는 거잖아?
예문의 올바른 해석은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한다' 정도가 되지;;;;;;
아니면 예문이 every parent expects their children to outlive them. 정도여야 되는 거 아닌가?
out-이 붙은 동사들이 조금 헷갈릴 수 있는 게 사실이고, 그래서 여기서도 두어쪽에 걸쳐 다룬 거겠지만,
이런 식으로 잘못 사용한 내용을 떡하니 내놓으면 글쎄... 이것도 신뢰도의 문제가 된단 말야.

이런 것들을 나쁘게 보자면 정성 부족이겠고
좋게 봐주자면 경험 적은 출판사의 미숙이겠지만,
소비자로서 눈에 밟히는 건 결국 밟히는 거거든.
나쁜 책이라고는 안하겠지만 흠... 싶네.

(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