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6일 화요일

(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을 느끼기도 하는 법이겠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한테 좋은 거지

나한테도 좋으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


소설의 기본적인 토대는 이렇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에 의하여 여섯 명의 사람들이 지하 벙커에 갇히고

이들이 나름대로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는데,

이를 중학생 정도의 소년인 주인공이 일기의 형식으로 서술해놓은 내용.

독자가 읽는 것은 이 일기의 묶음이다. 파운드 푸티지?

흥미롭다면 흥미로운데 진부하다면 진부한 설정이라 하겠다.


이런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소재를 채택했을 때

독자로서는 뭐...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들이 드러내는 추악한 모습들과

그로 인하여 고조되는 갈등, 파국, 그 (보통은 씁쓸한, 폭력을 수반하는) 해결 과정,

무엇보다도 그들이 어떻게 탈출에 성공하는가 정도를 예상하며 책장을 넘길법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진부하다면 진부한 건데 이 소설이 진부함을 피하는 방식은

그런 기대되는 전개들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본다.

딱히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는 편도 아니고, 인간 본성의 추악함이 날 것 그대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며

갇힌 인물들 대 가둔 인물 사이의 처절한 대결이 펼쳐지는 것도 딱히 아니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을 포함한 인물들은 그냥 지하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알라딘 평을 보니 실망스럽다는 평도 있었던 듯하다.


이는 서술의 주체인 라이너스가 청소년이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학 교수인 러셀과의 대화 내용을 일기에 거의 옮기지 못하는 지적 능력과,

불량배인 프레드와 (소설의 전개를 위해서는 편리하게도) 굳이 대립할 일조차 불가능할 신체 능력 등...


역자의 말에서도 전하고 있듯 특기할만 한 사항으로

소설의 악역이라 불러야 할 인물에 대한 정보가 조금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있는데,

지하에 갇힌 인물들이 끊임없이 소통을 요구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묵살하면서도

그 어떤 탈출시도나 불복종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제재를 가할 만큼 요컨대 전지전능하다는 점이

미스터리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 같다. 요컨대 신의 비유로 설명해도 무방할, 어떤 불가사의함이 있는 인물?

이런 집요한 신비화는 사실은 좀 공허하게 느껴진다. 작가도 이를 모르지 않았을 터라면 어떤 의도하는 바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정도면 대강 작품의 얼개는 설명한 것 같고,

그래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은 이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 소설은 소위 '이해하면 무서운 사진'으로 비유할만 한 어떤 섬뜩함을 담고 있다.

주인공을 포함한 인물들은 전부 지하에서 아무런 희망도 얻지 못하고 죽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일기'는 누가,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


요컨대, 범인은 독자다.

오직 주인공들을 가두고, 괴롭히다가 결국 죽인 바로 그 인물만이 이 일기를 읽을 수 있다.

범인의 자리에 독자를 대입시키는 설정을 작가는 맞춰 놓은 것이다.

저 간수에 대한 어떤 정보도 차단하는 내용들이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아귀가 맞는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고, 작중 여섯 명이 서술하는 그의 외모조차도 서로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면 이 소설을 손에 들 독자가 누군지 정할 수 없기 때문.


주인공은 일기를 쓰면서 계속 '너'라는 2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dear log 운운하는 영미권의 일기 서술의 특징을 답습한 것일 수 있겠고

일기 서술 곳곳에서도 이 글을 읽을 사람은 우리를 가둔 그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을 거라며

애매하게 처리를 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꼭 '그'인 것은 아니라며 연막을 친 것.

소설이 가진 트릭이 있다면 이 지점일 것이다. 범인의 자리에 독자를 대입시키는 구성을 나름대로 교묘하게 가려놓는 작업들.


이것 하나 읽어내자고 책을 잡을만한 가치가 있었느냐고 하면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나름대로는 재미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책이 짧아서 후루룩 읽기에 좋았고.

2018년 1월 6일 토요일

요즘 읽은 책들 / 일본어 공부

오랜만이야, 거진 세달만에 글쓰네;
그동안도 책을 안읽은건 아닌데 좋은 일은 꾸준히 하기 힘드노니... 막상 글을 쓰기가 귀찮아서 놓았더니 한동안 글을 못썼네.
더하여 요즘은 독서보다는 일어공부를 좀 열심히 하고있어서 이걸 가지고 뭘 쓰는 게 우습기도 하더라고.... 등등 하여 격조했어.
오늘 그럴 기분이 든 참에 뭉텅이로 글한번 써보려고 ㅋ

도련님의 시대 - 다니구치 지로 / 세키카와 나쓰오
이 책은 몇년전 시사인 별책부록에서 굽시니스트가 추천했던 책인데
이번에 사서 읽게 되었어. 일본의 근대화가 이루어진 메이지 천황기를 배경으로 해서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몇 명을 주인공으로 하여 서로 얽혀들어가는 모습을 당대적인 호흡으로 그려낸 만화야.
주인공은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 이시카와 다쿠보쿠, 고토쿠 슈스이 정도일까? 조선 청년 안중근도 등장한다;

역사라는 걸 우리는 정형적으로 생각하지만 이게 지나고 나서 보면 그렇지 당장 그 흐름 속에 있을 때는 뭐가 뭔지 알수 없거든.
나는 나이를 먹고서 노무현 대통령 때는 이랬다느니 저랬다느니 하는 글들을 인터넷에서 읽고 (그게 벌써 10년도 더 전이니까)
아 이런게 역사구나 하고 새삼 느꼈던 적이 있어. 동시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성인들(지금의 20대 초반?)이 있으니, 그런 설명이 가능하고
그런 설명에 뭐 낭만화도 섞이고 조작도 섞이고 그럴 수 있는 거겠지.
아니면... 나무위키 <다크 나이트> 항목을 보니 뭐 조커라는 캐릭터가 그 당시에는 대단한 충격이었다느니 적혀 있는데
10년이나 지난 영화니 그게 그렇게 쓰이는구나 싶으면서도 뭔가 우스운 거야 나는. 그게 '그렇게 충격'은 아니었거든 ㅋㅋㅋ

하여 내가 하고싶었던 말은 저 '근대화'의 과정이 꽤나 희한하고 흥미로운 사건이라는 얘기야.
만일 서양의 충격이 없었다면 일본은 그때까지처럼 그렇게 흘러갔겠지. 뭐 한중일 포함해서 세계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고.
실제로 그래서 지금도 전근대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들도 있는 거잖아. 새삼스럽지만 근대화라는 게 꽤 부자연스러운 과정이었겠고,
그 충격을 세대의 완충 없이 몸소 받아내야 했던 첫 세대의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며 살아갔는지,
소위 치열하게 고민했는지를 읽어내는 건 그 자체로도 즐거운 일이고, 뭐... 우리의 뿌리를 찾아본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지.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대입해봐도, 지금 여기의 '우리'의 뿌리는 고조선에도, 가깝게는 조선에도 거의 없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저 근대화 과정 속에서 몸부림쳤던 인물들이 직계 조상인 거지, 혈연의 가까움 뿐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들이 빚어낸 체계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맞닿아 있으니까... 의미 부여를 하자면, 내 생각은 그래.

나쓰메 소세키는 서양과 근대화의 충격 속에서 조금 갈팡질팡하던 사람으로 그려져.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영국과 서양 문명을 지독히 혐오했다는 모양이지? 실제로 'Literature'를 배우고 어딘가 속은 기분이었다는 감상을 남긴 양반이니까;
그럼에도 (시대가 그를 떠밀기 때문에?) 서양 문명을 배워야 하고 좇아야 하고 일본으로 귀국해서도 그걸 가르쳐야 하는 마당이니
그게 신경쇠약과 위장병으로 나타났고, 이를 달래기 위한 나름의 치유책이 소설 쓰기였다는 식으로 그려져.
소세키가 나름의 맛을 지닌 인물이라면 자기 자리를 알지 못하는 이런 갈팡질팡하는 면 때문이려나?

모리 오가이는 신과 구의 갈등 속에서 (자기 나름의 깊은 고민 끝에?) 체제와 전통을 택하는 유형의 인물로 그려져.
이걸 나타내는 주요한 계재가 [무희]의 모델이 되었다는 독일 여성과의 인연인데
글쎄? 내가 이 사람의 이름 빼고는 아닌 게 거의 없어서 그럴테지만 조금 자기정당화에 불과한 인물이지 않나? 싶어져서,
작가들이 근대화의 물결 속에는 이런 유형도 있었다...는 식의 제시가 아니었을지 싶어지기는 해.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나를 사랑하는 노래]의 한 구절이 참 절절하다고 생각했던 시인인데, 인용하자면

한 줌의 흙에 침을 흘려 빚어 본
어머니 얼굴 우는 모습만 같아
마음 아파하노라

장난하듯이 엄마를 업어 보니
너무 가벼워 참을 수 없는 눈물
세 걸음 걷지 못해

절절하지? 여튼 가난으로 고생하다가 요절했다는 사실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 아는 바는 거의 없는 사람이거든.
그런데 이 사람은 대단히 낭비벽이 심하고 가난을 자처하는 인간형이었더라고.
이걸 간단히 말하면 한심한 인간이겠지만, 작가들은 이 또한 근대화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행동원칙을
세우지 못해 방황하던 하나의 인물형으로 해석하고 있어. 재미있는 시각이라고 생각해.

고토쿠 슈스이는 그 인물의 삶이나 됨됨이보다도 그가 연루되어 사형까지 언도받은 역모 사건의 충격에 조금 더
비중이 있다는 느낌이었어. 근대 일본 제국의 경도된 무자비함은 이 사건을 효시로 하여 그 뒤로도 이어진다는 느낌?
역모 사건의 전모는 대강 말하면 천황을 암살하려는 모의를 꾸민 네 명의 젊은이가 적발되었는데, 여기에 조금이라도 이들과 접촉했던 사람들이나,
소위 '주의자'들을 억지로 옭아매서 극형을 내렸다는 내용이거든. 체제를 수호한다는 미명 하에 '분열세력'을 어거지를 써가면서 말소시키려는 체제의 모습이
뭔가 데자뷰가 있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작품인데 4권의 내용은 천황제를 좀 삐딱하게 보는 시각이지 않나 싶거든.
일본인들은 천황의 ㅊ자도 공석에서 못꺼낸다느니 하던 얘기를 많이 들어서 조금 놀라웠기도 해.
천황제와 그걸 빌미로 온갖 개짓거리 다했던 일제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러고보면 제법 있었나 보구나, 싶어서?
심지어 안중근 의사가 꽤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올 정도니; 잠깐 지나쳐가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실종일기 - 아즈마 히데오
지은이는 일본에서 나름대로 인기를 구가하던 만화가였는데 그럭저럭 한물 간 시점에서 대뜸 우울증이 도져서 하던 일을 전부 팽개치고
노숙자 생활을 하게 돼. 노숙을 두번, 알콜병동 입원을 한번 했다는데 그런 모습을 그려낸 자전적(?) 만화야.
노숙자의 일기 만화라는 게 꽤 신선하잖아? 소재면에서 한번쯤 읽어봄직한 물건이라는 생각을 할만한 거지.

너무 우울한 얘기를 하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작가는 너무 심각한 얘기는 빼고 조금 우스꽝스럽게 그려냈다고 하는데
이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 좋은 건 뭐... 이렇게 삶이 바닥에 바닥까지 가도 삶은 아름답구나! 싶은 느낌이 좀 묻어나서,
그런 희망찬 모습에 빙그레 하게 되는 거고 나쁜 점은 여하간 찌들고 어두운 삶의 모습인데 그걸 조금 더 객관적으로 그려줬다면 싶은
바람이 없지는 않은 부분이지.

개인적으로는 우울증과 의존증에 관련한 작가 개인적인 체험의 내용들에 아 저런 기분은 나도 느껴본 적 있는데 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흥미롭고, 조금 이해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더라. 이런 식으로 힘든 게 나뿐은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
훨씬 심하게 앓고, 훨씬 심한 꼴을 당하면서도 저렇게 살아서 자기 얘기를 풀어내는 사람도 있구나, 싶어서.


공각기동대 - 시로 마사무네
유명한 책이지. 영화판이 개봉하면서 책이 새로 나왔는데 그때 샀던 걸 이번에야 읽었네.
별로 감상을 적을만한 게 많지는 않아. 인간의 정체성이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는 내용은 로크 때부터 있었던 얘기고,
그게 기술력의 발달로 조작 가능해진 세계를 그리는 것도 제법 에전 얘기인 걸로 알고.
뭐 극장판이 나왔을 때 <블레이드 러너>에 답을 보냈다!느니 난리였다면서 ㅋㅋㅋ
즉 뭐가 새롭고 뭐가 진부한지 별로 알지 못하니 작품 자체에 할말이 적은 거지 ㅋㅋ

그런데 1권 후기란에 그런 내용이 있더라고. 사이버펑크면 꼭 세기말적인 권태를 그려야 되는 게 자기는 조금 불만이었다고?
그 말은 좀 와닿더라고. 내가 사이버펑크 장르를 많이 봐서 공감을 했다는 건 아닌데,
당장 극장판부터가 '그런' 작품이잖아.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극장판은 좀 겉멋이 많이 들었다고 생각해왔던 차인데
그에 대한 비판(?)이 원작에서부터 있었다는 게 되게 아이러니하지 않아? 오시이 마모루 센세?;

1.5권은 쿠사나기가 없는 9과의 일상인데 이것도 소소하니 재미있더라고.

그리고는 2권을 보니 융합 이후의 쿠사나기의 행적을 그린 내용인데
글쎄; 내가 제대로 내용을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거 유년기의 끝 냄새가...;
나는 저 소설 되게 별로라고 생각하거든.
뭔 영능국이니 하는 오컬트 테이스트를 가미한 것도 장난같고...
2권을 읽고 나니 1,1.5권이 뭐가 좋았는지 조금 보이더라.
사이버펑크적 세계관 설정도 좋지만 거기에 수사물, 탐정물스러운 전개도 흥미로운 거였더라고.
그걸 벗겨놓으니 설정놀음같고 괴상한 전개가 되는 것 같고.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그 설명을 읽는 재미? 찬탄?도 있긴 했지만 말야.
그리고 2권에선 뭐 그렇게 여체를 벗겨놓는지; 어차피 야한걸 볼거면 유포른 가지 내가 공각기동대2를 읽을 이유는 없는데.


만화로 읽는 성의 역사
성의 역사를 만화로 읽으면... 제법 시각적인 설명들이 있을 거란 말이지...
미리보기로 몇쪽 읽고 구매결정한 책이야.
내용은 아주 재미있고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그러진 않아. 당연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섹스를 대단히 좋아했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소돔 120일 - D.A.F 사드
독갤 공식 추천 소설!
떨리는 마음으로 드디어 손에 잡고 읽었던 책인데...
어차피 읽는다는 게 꾸역꾸역 읽으면 그만인 거라 악명만큼 괴롭지는 않았는데
좀 지루하고 단조로운 소설이었다는 감상이 드네.
거진 200년 넘게 옛날 소설인데도 지금도 충격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내용이나 묘사가 있어서
그거는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쥐...라던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김정선
책의 구성이 반으로 나뉘어 있거든?
몇 페이지 안되는 챕터가 계속 끊어지면서
문장 다듬기 / 소설 / 문장 다듬기 / 소설....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 기능적으로만 생각하면 저 문장 다듬기 부분만 간추려 읽어야 할 책인 셈이고
소설 부분이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이 책이 제법 훌륭한 책이고, 구성이겠지.
그 취지도 그럭저럭 이해함직은 해. 무미건조한 지침서보다는 나름의 흐름을 부여하고 싶다는 저자의 욕심이겠지.
그런데 나한테는 저 소설이 좀 많이 사족같고, 그닥 공감도 안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라...;
문장 다듬기 지침 파트는 제법 맘에 들었어.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라던지 ㅋㅋ
좋은 책인데, 반쪽만 좋고, 사보기엔 좀 아까웠다는 느낌?


일본어 공부
신뢰의 후지이 아사리 센세의 책들을 전부 사서 보았거든.
뭐 두말할 필요도 없지. 정말 좋은 구성의 책들이야.
내가 조금 수집벽이 있다보니 그래서 무따기 일본어 책들을 좀 모으게 됐는데

김웅권 저자의 회화 편은 좀 지뢰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어학 책은 어차피 습득이 목표이니
아무리 좋은 책도 일종의 사다리같은 역할이 되고 나쁜 책도 그런 의미에서는 건질게 하나 없지는 않으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않고 싶은데 저 책은 구성도 내용도 성의가 너무 없어.
그야말로 읽어 치웠는데 저 책은 누가 읽는다면 좀 말리고 싶다;

이미 절판돼서 누가 구하려고도 안하겠지만 저 김지룡 씨의 책도 좀 비추.
김지룡은 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 쯤 해서 나름 특이한 이력으로 반짝 했던 사람인데
저사람 책은 딱 두권 읽었지만 아저씨 스멜이 너무 나;
당시에도 위화감 느껴지는 센스였다고 기억하는데 이번에 기왕 사둔거 읽어야지 하고 슥 읽는데도
어휴....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 사람도 '좃도 맛떼'는 알고 있단다;;;;
뭔 5단 활용 동사가 복잡하니까 왕짜증 동사라느니
센스도 구리고 이력이 독특할 뿐 딱히 교육 효과에 대한 고민이 있던 사람도 아니니
그런 사람이 쓴 책이 훌륭할 리가 없지 그러고 보면.

재미있는 건 이사람 요즘은 뭐하나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띠용?
수컷닷컴의 대표였다고 하네;;

여하간 일어 기초는 대강 떼고 나서 이제 좀 본격적으로 들어가려고
저기 15000보카 사서 보는데
일어가 참 한국어랑 닮은 데가 많은 것 같더라.
강점기에 오염된(?) 걸 수도 있기는 한데.
내가 예전에 글을 쓰면서 그냥 웃어넘기고 신경 안쓴다는 의미로 '일소에 부치다'란 표현이 머리에 떠올라서 쓰고는 뭔가 헷갈려서
국어사전을 뒤진 적이 있거든. 그런데 그런 표현은 없더라고. '일소하다'는 있을지언정.
희한하네.... 싶었던 기억이 있는데 저 책을 보다보니








2017년 8월 23일 수요일

드니 디드로, 배우에 관한 역설

당장 루소나 볼테르처럼 계몽사상가들은 연극이라는 예술장르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연극이란 꽤나 대접받았던 장르였던 모양.
여기서 드니 디드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던 것이겠고 본인이 희곡을 써서 상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디드로가 연극과, 특히 배우의 연기에 관하여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짧은 책이다.

플라톤의 본이 있어서인지 근대 사상가들이 대화체 저술을 자주 시도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디드로의 책을 읽으면서 그게 사실이었음을 실감한다. 이 책 또한 두 명의 대화 형식을 띠고 있다.

이것으로 디드로의 책을 읽은 것도 몇 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건
기대보다 흥미롭지 못한 독서가 된다는 인상인데 그건 아마도
번역이 좋지 않거나,
원문 자체가 난삽하거나,
저작의 주제의식에 내가 공감하지 못하거나,
저자가 드는 사례나 사용하는 용어 등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등등일 터이다.

이번 독서로 문득 들은 생각이지만 디드로의 글은 대단히 당대를 밀착해 있다는 느낌이다.
이미 잊힐대로 잊혀진 정치가, 작가들의 일화나 예시들이 빈번하여 글을 따라가기 버겁다.
이건 인상일 뿐이니 어느 글은 안그렇겠냐 하면 답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더하여 디드로가 좀 난삽한 글을 쓴다는 평은 꾸준히 있어왔던 모양으로
2류 작가 취급이나 받다가 재평가를 받은 것이 생각보다도 최근의 일이라 하니
(그나마도 그 재평가의 골자가 '글쓰기의 혼란상'을 체화한 작가라는 식의,
이현령비현령식 불란서 비평가 말버릇같은 것이 되어놓으니 나는 조금 도끼눈을 뜨게 된다)
내가 느끼는 이런 곤란도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은듯 하다.

여하간 이 책의 기본 골자는 이런 물음이다.
"가장 뛰어난 배우란 어떤 존재인가?"
요컨대 배우라는 직업에 있어서의 '이데아'는 어떤 특질을 지녀야 하는지를 묻는 것인데
디드로의 주장은 뛰어난 배우는 자신이 보여주는 감정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어져서
냉정하게 자신의 몸짓을 계산할 줄 아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판단력이 좋고, 냉정하고 침착한 관찰자로서 통찰력은 요구되지만 감성은 전혀 요구되지 않는 인물이다.(p19)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배우의 재능이란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외부적 기호들'을 알맞게 토해냄에 있다.(p.30)
배역의 감정이 배우 자신의 것인 양 취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은 단적으로 우스꽝스럽기 때문.

여하간 디드로는 이를 "자연 그대로의 배우"는 형편없다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자연-인공(문화?)의 이분법이 여기서 적용되는 셈이겠고 디드로는
연기의 기술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겠다.
무엇보다도 배역의 감정을 배우 스스로 느끼는 방식의 연기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배우를 지치게 만든다는 점과 그것이 재연 불가능하는 점이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그렇다면 인위적인 관습의 연마가 유의미해지는 근거가
하나는 극장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이라는 점인데 연기의 패턴은 일상생활의 패턴과는 확연한 차이를 갖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연기 톤으로 몸짓을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기 마련이다.(p.35) 반대도 마찬가지겠고.
더하여 영국/프랑스의 극장 풍경, 즉 희곡들의 성격이나 그 문화 하에서의 연기 관습이 다르다는 점(p.19) 또한
연기를 단련함이 유의미한 이유가 된다. 즉, 관습이란 것이 실존하는데 이는 문화의 내부와 외부에서 관찰 가능하다는 것.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그 관습이라는 것 자체가 18-19세기 유럽 연극에 국한된 현상일 뿐일 텐데
당대의 과장되고 정형화된 연기는 현대의 지배적인 매체인 영상물에서의 연기와 판이할 수밖에 없겠고
현대의 연기는 '배역 속에 녹아드는' 것이 더 뛰어남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나?
그런데 이건 사실 조금 잘못된 질문인데 현대 영화 등에서의 뛰어난 연기 또한 결국 우리가 관객으로서 관찰한
연기의 뛰어남, 소위 그럴싸함이고 그래서 그 연기와 감정에 공감을 한 것이니
'관찰자에게 감정을 불어넣는다'는 기본 도식을 상한 것은 아니기 때문.
당장 디드로 본인데 이런 관습이 변화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p.36)

그러므로 제목이기도 한 배우의 관한 역설이란
'전형'으로서의 이상적 배우는 가장 거짓말을 잘 하는 인물이고 그러기 위하여 가장 무성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상적 OO'을 정의함에 있어 '가장 ~한 존재'라는 기준이 배우라는 직업? 기예?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것들에-배역/감정) 가장 ~하지 않은 존재'여야 한다는 성격, 이것이 배우에 관한 역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대학 신입생 때 과 활동으로 연극 배우를 해본 일이 한 번 있었다.
그때 느꼈던 것이 이와 똑같았는데 내가 느끼는 그대로 해서는 공감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분노의 감정을 연기할 때도 정말 실생활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화낼 때처럼 새된 소리를 질러서는
그걸 곁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그저 새된 소리만 빽빽 지르는 소음일 따름이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줏어읽은 것이지만 영화감독 샘 레이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카메라를 들고 찍을 때와 찍힌 내용을 볼 때는 느낌이 너무 다르더라고.
그래서 화면 연출에 있어 어떤 기법의 창안 혹은 습득과 그것의 연마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이것은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매체의 숙명일까?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계몽주의 시대에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저작이다.
더하여 이 책은 이전에 읽었던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에서 다루던 중심 소재였는데,
그 제목 그대로 말하자면 (출시제이긴 하지만) '근대를 탄생시킨' 책이라고 하니
대단히 호기심이 동했던 터라, 언젠가 한번은 읽어야겠다고 맘 먹던 차였다.
드디어 읽은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조금 실망스럽다.
삶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긍정하는 아름다운 책이었다는... 식으로
'우연히'(위의 책의 원제는 '일탈Swerve'이기도 했고) 이 책을 발견해
멋모르고 읽고는 은은한 기쁨을 느꼈다며 찬사에 찬사를 거듭하던
그린블랫에게 속아버렸다는 느낌도 사실은 없지 않은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책이 설파하는 유물론적인 주장들이
생각보다 이미 무의미하거나, 내게 상식선이라는 게 큰 것 같다.
어떤 원류가 되었던 책이라는 의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저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전기는 사실상 전무한 모양이고
책은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대단히 충실하게 설파하는 저서라고 한다.

아마 이 책을 손에 쥐는 사정은 보통은 셋 중 하나겠는데
라틴어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 문장의 맛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그리스/로마의 철학이나 사상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것을 톺아보려는 사람이거나
특정해서 에피쿠로스 사상의 충실한 해설서라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을 읽어보려는 사람이겠다.
즉, 소위 전공자들이나 볼 책이라는 건데 여기에 나같은 딜레탕트가 어쩌다 꼬이는 거다.
개인적으론 저 그린블랫의 책도 크게 보면 상통하는 내용이라고 생각되는데
결국 계몽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읽게 된 것 같다.

책은 특히 라틴어 원문으로 읽으면 그 시작(詩作)의 수준이 실로 대단해서
그것을 음미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쾌를 주는 모양이고 실제로
이미 당대에 베르길리우스 등의 인물이 시의 높은 수준을 상찬했으며
시인 본인이 본문에 쓰디쓴 약쑥(사상)을 달콤한 맛(시문)으로 감싼다는 식의 비유를 몇 번이나 쓰며
일종의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는 노릇인데다가, 후세에도 그 훌륭한 시문으로
추종자들이 끊이지 않았던 듯하니 과연 높은 수준의 작품인가 보구나 싶기는 하다.

문제는 시가 개인적으로는 와닿지도 않고, 가 닿을 생각도 없는 장르라는 게 하나고
이건 번역본이기에 그 맛을 어차피 느낄 수도 없음이 둘이요,
역자 서문에서 드러내고 있듯 역자는 시의 맛을 살리기보단(이게 가능이나 한지는 둘째치고)
원문에 최대한 충실한 직역을 시도했기 때문에 한국어의 어순과는 상이한 구조의 문장들이
그대로 번역되어 오히려 편하고 즐거운 독서를 방해하는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다는 점이
마지막으로 셋이니 시인이 자화자찬의 낯뜨거움까지 굳이 무마해가며 자랑했던
저 달콤한 시문이 큰 의미가 없는 셈이다.
그러하므로 이 책을 누군가 읽는다면 기대함직한 부분 하나가 사실상 결여된 셈이겠고.

그러면 사상적인 내용을 간취해보려는 의지가 이 번역본 독서를 추동하는 동력이겠는데
이게 또 생각만큼 마음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조금 뒤에 설명한다.

아마 계몽사상가들에게 가장 매력적이었던 그리고 스티븐 그린블랫에게 소소한 충격을 주었다는 부분은
종교와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하는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18세기의 유럽이나 근본주의가 꽤나 득세하고 있다는 현대 미국의 지적 토양에서
이런 식의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접했을 때는 충격 혹은 매혹을 느끼기 마련이지 않을까...

하여 주요 골자를 능력닿는 대로 간추려 보자면,
기본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은 '자연'의 토대를 원자라고 설정하고 있다.
이 원자와 '빈 공간'의 배합으로 삼라만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자들이 서로 부딪히며 운동한다면 그 운행은 단순히 기계적인 과정이겠고
그러므로 일종의 결정론적인 색채를 띠지 않을 수 없다는 건데 에피쿠로스는 이를 부정하려 한다.
2권의 216행부터 이에 관련한 내용이 나오는데 원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일탈하기도 한다는 것.
이로부터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의 '자유 의지'가 연원한다는 설명은 확실히 마음에 혹하는 구석이 있다.

에피쿠로스에게 정신은 인간의 지성작용이고 영혼은 육체에 깃든 생기 따위를 의미하는듯 한데
여하간 정신이나 영혼이란 육체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가 소멸할 때 그것들도 함께 소멸하게 된다고 한다. 요컨대 영혼이란
이미 예컨대 기독교적 의미의 존재도 아닐 뿐더러 불멸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죽음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니까.
인간에게 죽음이란 죽기 전에는 살아있으므로 무의미하고 죽은 후에는 모든 정신과 감각의 작용이
정지하므로 또한 무의미할 뿐인 것이다.

5권 110행 이하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신이 만일 신화가 말해주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그저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것임을 설파하는데 한줄만 인용하자면
"불멸하고 행복한 존재들에게 우리의 감사가 무슨 이익을 늘려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러므로 416행 이하에서 설명하듯 세계의 형성에는 어떤 신적인 힘도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종교는 좋게 봐도 무의미겠고,
1권의 60행 부근부터 이야기되는 것처럼 아가멤논이 친딸을 인신공양했던 패륜처럼 크나큰 해악을 낳고
그런 극단적 경우가 아니더라도 뭇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기까지 하고 있으니
종교를 따름으로써 오히려 죄악을 낳는 이 변태적 상황을 막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시는 말하고 있다.

이런 종교는 5권 1161행 이하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우월한 존재이자
온갖 경이와 공포를 제공하는 자연현상들의 뒤에서 그것들을 관장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떠올리게 됨으로써
발생했다고 시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시의 내용이 납득할만 하고, 그래서 옳다고 여겨진다면
이런 자연현상들은 원자의 운동 이외의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신의 존재를
제시할 필요도, 그러므로 그들을 숭배하는 종교를 만들고 믿어야 할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 다른 내용들은 온갖 자연현상들에 관한 시인의 해명이겠는데 이런 글들은
크게 마음에 와닿거나 유의미하다 여겨지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고,
대강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두려움을 벗고 삶을 누리라"는 것이 책의 주요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제법 상식선인 주장을 뽑아내고 보면 너무 두터운 책이었다는 인상이 큰 것.

흥미로웠던 구절들.
5권 705행에 "달은 태양빛에 맞아서 빛나는 것일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게 당대의 천문학 수준을 알 수 없으나 신선하게 여겨지는 건 사실이다.

4권의 말미에 인간의 성교와 관련한 내용이 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눈여겨 보게 된 대목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문장이 조금 아리송했다.
인용하자면

그리고 유혹하는 쾌락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취해지는지,
그것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보통은, 짐승들 식으로,
네발짐승의 방식으로 행하면 아내들이 더 잘
임신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씨앗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슴은 아래로 하고 허리를 들면.
아내들이 음란한 움직임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여자는 자신이 임신하는 것을 막고 싸우기 때문이다.
스스로 행복하여 남성의 베누스를 엉덩이로부터 물러나게 하고,
그 흐름을 출렁이는 가슴으로 흐르게 하면.
보습이 제대로 지나갈 부분과 길로부터 쟁기질을
벗어나게 하고, 씨앗의 타격을 제 자리에서 비껴나게 하니 말이다.
그래서 창녀들은 자신을 위해 그런 식으로 움직여 버릇한다,
되풀이 임신하고 몸 무거운 채 눕지 않으려고,
또 동시에 남자들의 베누스 자체가 더 기분 좋은 것이 되도록.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배우자들에게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게 확실하다.

대강 후배를 위로하면 임신이 더 잘 된다고 설명하는 듯하다가
이후의 행에서 대뜸 '음란한 움직임'을 말하는데 이게 도기 스타일을 의미함인가?
그렇다면 '임신하는 것을 막'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영역본을 보니 문제의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It's important how you do it. People generally believe
That wives more readily in the manner of wild beasts conceive,
For it's in this position that the seed can occupy
The right place, with a lowered breast, and with the loins raised high.
Wanton wiggling's of no use for wives - no, not one bit -
For a woman prevents pregnancy this way, resisting it,
When she grinds her buttocks against the man's member as it thrusts,
Gyrating, her whole body turned to jelly with her lust.
By doing this, she turns the furrow away from the straight and true
Path of the ploughshare, and the seed falls by the wayside too.
Whores thus have their own reasons for wriggling - so that they can
Spend less time pregnant, and to make it better for the man.
Clearly, though, our wives can have no use for such an art.

아... 후배위는 임신이 잘되고 기승위는 임신이 잘 안된다는 뜻이구나...
내가 가진 건 펭귄 클래식 판인데 이게 좀 의역을 했는지는 내가 알 수 없으나
영역본으로 이해한 바가 정확하다면 우리말 번역은 문장 구성이 독해를 방해하는 식으로 되어있다는 걸
이 예시에서 충분히 알만 하다. 이 구절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것이 충실한 번역일지는 모르나 읽기에 좋은 번역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번역본 기준 287쪽에 오타가 있다.
'뮬리적인 형태'라고 쓰여 있음. (1판 2쇄)

2017년 8월 22일 화요일

마사오카 시키/나쓰메 소세키 -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이런 책이 일본에도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역자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소세키와 시키의 서간?들 중 큰 의미 없는 편들을 제외한 후 시간과 전달순서에 맞추어 발췌 번역해 한 권으로 구성한 책이다.
오히려 소세키 전집과 시키 전집을 번갈아 뒤적거려야 하는 수고를 역자가 대신 해준 셈.

개인적으로 마사오카 시키는 나쓰메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연재했던 [호토토기스]를 창간한 인물로,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의 책에서 몇 번 언급되었던 사실 정도로 그저 이름만 알던 사람인데
나쓰메 소세키와 깊은 교우를 나누었던 인물인 모양이다.
일본의 시가 갈래인 하이쿠와 단카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인물로서
오히려 문명은 먼저 떨친 모양인데 결핵으로 인하여 요절한 인물이라고 한다.

책의 구성은 이 둘이 22세였던 1889년부터 34세였던 1901년까지 주고받았던 편지들과,
1902년 시키가 사망한 이후 소세키가 다카하마 교시에게 보낸 편지 한통,
[고양이] 중편 서문에 소세키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내용까지가 실린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소설가 소세키의 삶은 그가 영국유학을 다녀온 1903년 이후 [고양이]를 연재하면서부터이니
여기 실린 글들은 소세키에게 관심을 두고 책을 들었던 나로서는 일종의 '소세키 비긴즈'(?)인 셈이다.

편지의 분량도 소세키의 편지가 훨씬 많은데 역자는 소세키는 이사가 잦은 생활을 했고
시키는 이후 시키암이라 불렸다는 근거지에 자리를 잡은 뒤로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받은 편지를 보관하기가 시키 쪽이 용이했고, 그래서 소세키의 편지가 많이 남은 것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아쉬운 일인 것이, 시키의 편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이 소세키의 답장만 실려 있는 경우도 제법 되기 때문.

책을 펼치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두 명이 대단히 인용에 능란하다는 것인데, 일단 한문의 인용이 굉장히 두드러진다.
과연 19세기의 끝자락을 살았던 인물들이라 그런지 문(文)에 대한 감수성이
현재를 사는 독자와는 많이 다르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된다 할까...
헌데 이런 사정이라면 사실 소위 구한말 문인들의 글도 다르지는 않을 터라면
굳이 소세키의 글을 내가 찾아서 읽었다고 할 때는 이게 사대주의인 건가? 하는 자의식이 살짝 들기도 한다.
여하간, 더하여 특히 영문학자였던 소세키의 글에서는 영어의 구사나 인용도 제법 섞여들어가 있는데 이게 꽤 희한하다.
과연 소위 근대문학의 태동기에서 그 '사이'를 살던 인물의 글이라는 것일지? 글맛이 독특하다.

나머지 하나는 과연 친우끼리의 서간 내왕이어서인지 넉살 좋은 문구들이 많았다는 점인데,
이게 읽기에 재미있다.

서로를 치켜세울 수 있을 만큼은 전부 치켜세우고 있는데 사용하는 단어만도
'대인', '오우(梧右)', '님', '대형', '좌하(座下)', '어전(御前)' 등등...

거기에 두견새는 당시 결핵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하고 시키(子規)의 필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하는데
시키가 각혈을 한 후 문병을 갔다가 보낸 (지금까지 남아 있는) 소세키의 첫 편지에서
본인의 셋째 형도 각혈을 했다며 "이리 두견이가 많아서야 천하의 풍류가라는 이 몸도 두 손 들밖에, 하하."라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혹은 반 장난, 농담 식으로 서로를 깎아내리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한데
대뜸 소세키는 시키에게 "자네같은 냉혈동물은 더위도 겪지 않겠지"라는 식으로 말하거나
잠을 즐기는 것이 어디가 나쁘냐고 묻는 소세키에게 시키가 답장에
"늦잠은 건달, 낮잠은 도둑으라 이미 평판이 정해져 있는 것을 득의양양 으스대다니 가소롭구먼."하며
놀리는 부분이라던가는 친우끼리는 서로 놀려대는 모습이란 게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기도.

1890년 1월 초에 보낸 편지에서 23세의 젊은 소세키가 품었던 '문장'에 관한 생각을 잠깐 엿볼 수 있는데
아마 이 전의 편지에 시키가 나름의 문장론을 써서 보냈던 모양인데 이에 반박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후 그의 생각이 어떤 방식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따르면
문장은 그것이 담은 사상(내용)과 그 문장의 수사(형식)로 대별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 소세키 본인이 더 중시하는 것은 사상인데 이를 함양하기 위해서는 작자가 몸담은
문화적 풍경과 작자 본인의 경험이 중요하며 차등을 두자면 전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여 Idea와 Rhetoric이 좋고 나쁨에 따라 총 4개의 경우가 생기는데 특기해야할 사항은
사상이 좋고 수사가 나쁘면 기껏해야 평범한 문장으로 그치지만 사상이 나쁘면 수사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 나쁜 문장으로 귀결되므로 사상이 나쁘고 수사가 나쁜 경우와 동급이 되니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고
소세키는 보냈던 것 같다. 젊은이의 치기어린 정리에 불과할 지는 모르겠으나...

이에 시키가 다시 반박을 하고 있는데 조금만 인용하자면 이런 식이다.
"그런데 어째서 Good idea expressed by bad rhetoric과 Bad idea expressed by good rhetoric은 그 가치가
거의 같다고 하지 않는 것인가.[몰아붙이기 성공하여 통쾌]"
이렇게 하고 싶은 반박을 대강 하고는 뒤에 괄호로 한두마디 자평을 하는데
이게 읽기에 제법 우습다.

적어두고 싶은 부분.
1895년, 28세 되던 해 11.13일자 소세키의 편지에 최근의 사건 중 다행스러운 것이 '왕비 살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민비 살해 사건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무엇이, 어떻게, 왜 다행스러웠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1897년 2.17일자 시키의 편지 서두.
"뺀들거린 것도 뺀들거린 것이지만 바쁜 것도 바쁜 것이므로 오랫동안 격조했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바쁜 것도 바쁜 것이라 붓은 놓지 않고 있네.
위가 나쁜 것도 나쁜 것이지만 바쁜 건 또 바쁜 것이니 많이 먹고 있다네."
문장이 재미있어 적어놓아 본다.

1891년 11.7일자 소세키의 편지를 보면
시키가 권한 호걸담을 읽고 실망한 소세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실수담이 호걸의 전기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호걸의 명성이 실수담을 유명하게 한 것에 불과하네."라고
적고 있는데 이게 꽤 재미있는 논리의 역전이라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책에 큰 불만은 없는데, 이런 책을 냈다는 것도 감지덕지인 마당이라,
몇몇 경우 연도 표기가 오류가 있고 (1895년인 게 분명한데 1995년이라 되어있다던지)
312쪽의 'gay society'가 아마도... '게이 모임'이지는 않을 듯한데 그렇게 번역을 해놓았다는 것
정도가 눈에 조금 밟힌다. 더하여 둘 사이의 서간만을 실어놓았기 때문에 전후맥락에 관한
내용이 조금 아쉽다는 것 정도? 이런 내용까지 작성하는/기대하는 건 역자로서도 독자로서도
약간은 월권행위가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지노 에이이치, 외국어 잘 하는 법

제목이 강렬한 책이다. 제목만큼 내실있는 책일지?

저자는 일본의 언어학자로 체코어가 전공이고 그걸 중심으로 다른 슬라브어계열 어군을 연구한 사람인 모양이다.
저자 본인이 직접 경험하거나, 스승들에게 혹은 지인들에게 전해듣거나, 다른 인물들의 저서를 읽거나 하여
자기 나름대로 언어를 배운다는 일은 대강 이런 것이다...하고 전해주려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뭐 언어학이나 심리학 등의 어떤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쓴 책은 아닌데,
덕분에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복잡한 이론이나 도표를 인용하는 건
오히려 독자가 정나미만 떨어지기 십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저자는 서두에서부터 "잊어버리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접한 외국어라고 해봐야 영어, 일어, 독일어 정도에 불과하지만
언어라는 게 결국 암기싸움으로 귀결되고 그러면 다시말해 망각과의 싸움이 되는 것이니
한창 열내면서 단어니 문법이니 익혀놓고도 뒤돌아서서 며칠이면 물거품처럼 없어지는 걸
허망하게 느낀 게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보면 꽤나 재미있는 조언이다.

꽤나 공감갔던 대목 중 하나는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필요에 의함이라는 저자의 주장이었다.
언어란 학습자 본인이 필요해서, 즉 배우고 싶다고 느끼는 이유가, 목적이 있기에 배우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애써서 괴로운 과정이어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다수는
(80년대의 일본인을 지칭하겠으나 현재의 한국인을 가리켜도 납득할만할 것이다)
제 1외국어의 선택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이 비극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어도, 주위에서 영어부터나 제대로 하라는 핀잔을 듣거나,
하다못해 나 자신이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꼴이 심심찮게 발견되는 상황이니...
"배우는 사람이 영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 쪽이 학습자를 고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외국어 = 괴로움'의 등식이 습관처럼 마음 한구석에 달라붙어 독이 되는 것이다.
외국어 학습에서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필수불가결이기 때문에.

더하여 외국어 학습의 허들을 너무 높게 잡지 않을 것을 저자는 주문한다.
학습자 본인이 대뜸 해당 언어의 사전 편찬자같은 게 될 것도 아닌 마당에
그 외국어를 배우려는 목적에 맞는 수준과 방식만을 접하면 될 일이라는 것이다.
즉, 외국어 학습에 있어서 목적과 목표를 명확히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마음가짐이 이러한 뒤 세목에 있어서 외국어 습득에는 무엇이 어떻게 필요하냐면
저자는 언어의 신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던 지인의 말을 인용한다.
어학을 잘 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필요하며, 그를 기반으로 "어휘와 문법"을 익히고,
그것은 좋은 "교과서, 교사, 사전"을 통해서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저자는 어휘, 문법, 교과서, 교사, 사전, 발음, 회화, 레알리에 순으로 장을 할애하여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세세하게 더 여기서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예를 들어 단어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어 1000개를 목표로 삼으라는 것이라던가
문법사항은 컴팩트하게 하여 가장 기본이 되는 10장 정도만 일단 눈뭉치를 굴리라는 조언 등
꽤나 자잘하게 와닿는 제안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것은 발음 장에서 ザ의 발음에 관련한 대목이었는데
이 글자는 어두에서는 [dza]로 발음하고 모음 사이에서는 [za]로 발음한다는 모양이다.
친한 일본인 선배가 있었는데, 이 선배와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관련한 잡담을 나누는데
'the world'를 발음할 때 'the'를 [za]로 발음하지 않는다는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다.
뭔가 희한한걸? 하고 느꼈지만 이게 한국인으로서는 변별적인 자질이 아니다보니
그렇다고 모국어 화자에게 왜 그렇게 발음하냐고 물어봐야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고
그냥 석연찮은 기분만 느끼고 넘어갔던 일인데 여기서 그 수수께끼가 풀렸던 것이다.
뭐... 제대로 된 일본어 음성학 자료만 조금 찾아봤어도 훨씬 빨리 풀릴 문제였을수도 있으나...

여하간 저자는 아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않지만
결국 목적의식을 가지고 '꾸준히'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김빠지는 결론이지만 외국어 학습에 첩경이 있을 리도 만무하니 오히려 새삼스러운 주문인 셈.

2017년 8월 7일 월요일

드니 디드로, 라모의 조카

읽는 김에 마저 읽어나가는 중이다.
디드로의 4대 소설이라 하면 [운명론자 자크], [수녀], [입싼 보석들], 마지막으로 이 [라모의 조카]인 모양인데
특히 이 작품은 그의 최고 걸작? 문제작? 대우를 받는 모양.

내용이라 할만한 것도 딱히 없는 글인데,
'나'(아마도 디드로 본인)가 산책 중 당대에는 그럭저럭 유명했던 음악가 장 필립 라모의 조카를 만나서
종이 울리는 다섯시 반까지 대화를 나눈 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물론 이 대화가 어떤 것인지가 중요하겠고.

대화의 상대자인 라모의 조카라는 인물의 성격은
기본적으로는 악한, 건달 류의 인물형이고 남을 등쳐먹고 기식하면서 지내는 인간인데
이 인물이 그럼에도 나름대로는 일관성을 지닌? 어딘가 주목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면
자연히 이 글에도 가치부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게 좀 어려웠던 것 같다.
그저 중구난방인 요설들에 불과한 말뭉치를 꾸역꾸역 토해내는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아서인데...

흥미로웠던 점은 천재에게는 광기 혹은 악덕이 필요불가결로 함께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낭만주의적 인간형이 아닌가 싶어서다.
아마도 라모의 조카는 천재에게 악덕이 함께한다면 악덕이 있는 자는 천재이지 않은가 하는 식의 그릇된 추론을 가지고
본인을 일종의 천재라고 여기고 있는 것도 같다.

역자 해설을 읽어 보면 괴테나 헤겔 등의 인물들은 이 작품에 제법 중요성을 부과했다는 모양이고
나름대로의 의미가 도출될만한 글인듯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공감이 되지도 않고 혼란스러울 뿐이어서
아직은 진가를 알아보기 힘든 글이었다.

언젠가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워낙 짧은 글이라 재도전하기에 부담은 없겠지만.

(스포) 케빈 브룩스, 벙커 다이어리

  얼마 전에 독갤에서 누군가 추천을 하길래 흥미롭겠다고 생각해서 샀고, 읽었다. 기대보다는 평이했다. 어쨌든 추천사가 '좋다', '암울하다', '충격적이다' 정도의 추상적인 형용사여서야 가끔은 속았다는 감상...